이때 채소공(蔡昭公: 채도공의 아들 채후 申)이 패옥(佩玉) 두 개와 갖옷 두 벌을마련해 초나라로 가 패옥 하나와 갖옷 한 벌을 초소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이를착용하고 채소공을 위해 향례를 베풀었다. 마침 채소공도 나머지 갖옷과 패옥을착용하고 향례에 참석했다. 이를 본 초나라 영윤 자상(子常)이 이를 갖고 싶어 했

으나 채소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이 채소공을 3년 동안이나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마침 이때 당성공(成公)도 초나라에 왔는데 그는 숙상마(馬) 두 필을 갖고있었다. 이에 자상이 이를 갖고 싶어 했으나 당성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은당성공 역시 3년 동안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이때 당나라 사람들이 서로 숙의한 뒤 우선 초나라에 전에 당성공을 수종하던 자들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초나라가 이를 허락하자 교대 차 간 사람들이 이전의 수종자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만든 뒤 당성공의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쳤다. 그러자 자상이 당성공을 귀환시켰다.
당성공이 귀국하자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친 자들이 스스로 몸을 묶은 뒤 자진해서 사패(敗:사구)에게 나아가 이같이 말했다.
"군주가 농마(馬 : 말을 애호함)로 인해 곤경에 빠지고 나라와 군신들을 버리게되었습니다. 청컨대 저희들이 말을 키우는 자를 도와 장차 말을 배상할 수 있도록해주기 바랍니다. 그리되면 두 마리의 숙상마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은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당성공이 이같이 후회했다.
"이는 모두 과인의 잘못이었소. 그대들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그들에게 두루 상을 내렸다.

"채군(蔡君)이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머문 것은 그대들이 전별의 예물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예물이 완비되지 못할 경우 그대들을 사형에 처할 것이다."
이에 채소공이 귀국하게 되었다. 채소공이 귀국 도중 한수에 이르러 옥을 꺼내 강물에 내던지며 맹서했다.
"내가 다시 이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 대천(大川)이 내 다짐의 증거가

될 것이다."
얼마 후 채소공이 진나라로 가 아들 원(元)과 대부의 자제들을 인질로 바치면서 초나라 공벌을 청했다.

초소왕이 수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 구원병을 청하면서이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봉시(封: 덩치 큰 멧돼지)와 장사(長蛇큰뱀처럼 욕심을 부려 중원의 제후국들을 천식(食: 병탄)하고 있으니 초나라가 가장 먼저 그 침해(害)를 입었습니다. 과군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현재 재초망(越在草: 원래는 잡초가 우거진 곳으로 몸을 옮긴다는 뜻으로 민간의 궁벽지로 피해 다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에 과군이 하신을 시켜 고급(告急)하게 하기를, ‘이덕무염(夷德無厭: 오랑캐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뜻으로 夷는 오나라, 德은 탐욕, 厭은 만족을 의미)하니 만일 오나라가 초나라를 점령해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 진나

라의 변경도 그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나라가 아직 우리 초나라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을 타 즉시 출병하여 초나라 땅의 일부를 점거하십시오. 만일초나라가 멸망하면 그 땅은 곧 군주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만일 군령(君: 군주의 은덕)에 기대어 초나라를 무사히 안정시키게 되면 초나라는 반드시 대를 이어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애공(아들)은 사람을 보내 완곡한 어조로 이같이 사절景公의하게 했다.
"그대가 걸사(師)하는 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대는 우선 잠시 객관으로 가쉬도록 하오. 우리가 잘 생각한 뒤 회답하도록 하겠소."
그러자 신포서가 이같이 말했다.
"과군은 월재초망 중이어서 안신(身)할 곳조차 찾지 못한 형편입니다. 어찌 감히하신인 제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궁정 담장에 기대어 밤낮으로 통곡하며 작음(飮: 물 한모금)조차 입에 넣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7일 동안 계속되자 이에 감동한 진애공이 <시경> <진풍·무의(無衣참전 용사를 칭송하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그러자 신포서가 진애공에게 9돈수(九首:아홉 번 머리를 땅에 댄 채 조아리며 극도의 사의를 표시함)한 뒤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진나라 군사가 드디어 출병하게 되었다.

이때 초나라 대부 자기가 균 땅에 화공을 펴려고 하자 자서가 만류했다.
"작년에 오초 양군이 교전할 때 전사한 초나라 부형의 친속들이 아직 균 땅에 폭골(暴骨:뼈가 들판에 나뒹굴고 있음)되어 있소. 우리는 이를 수습조차 못하고 있는데 또 이곳에 불을 질러 뼈까지 태우려 하니 이는 안 될 일이오."
그러자 자기가 반박했다.
"나라가 장차 망할 지경이오. 만일 우리의 부형의 친속들이 죽은 뒤에도 지각이 있다면 적을 이겨야만 흠구사 : 자손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는다는 뜻으로 ‘흠’은 ‘후‘, ‘구사‘는 전래의 제사를 의미)할 수 있게 되니 어찌 불에 타는 것을 두려워하겠소."
그러고는 곧 불을 지르면서 오나라 군사와 싸웠다. 이에 오나라 군사가 패하게 되었다.

"대덕(大德)을 베풀고자 하면 응당 소원(怨 작은 원한)은 괘념치 말아야 하오.
이것이 옳은 도리요."
그러자 신포서가 주위 사람에게 이같이 말했다.
"내가 진나라에 걸사(師)한 것은 군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내가 상을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군주의 자리가 안정되었으니 내가 더 이상 무엇을바랄 것인가. 게다가 나는 전에 자기(子: 투성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어찌 내가 그와 똑같은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초소왕이 내리는 상을 받지 않으려고 몸을 피했다.

"양호는 노나라에서 계손씨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오히려 계손씨를 죽이려 했고, 이제 또 노나라를 불리하게 만들려고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유한 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어진 사람은 멀리하는데 군주는 어찌하여 그를 쓰려는 것입니까. 군주가 계손씨보다 부유하고 제나라가 노나라보다 강대하자 양호는 이를 뒤엎으려는 것입니다. 노나라는 이제 그의해를 면하게 되었는데 군주가 오히려 그를 거두게 되면 장차 그 해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제경공이 양호를 체포해 동쪽 변경에 수금하려 하자 양호는 스스로 동쪽 변경으로 가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자 제나라에서는 오히려 그를 서쪽 변경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읍내 사람의 수레를 모두 빌려 계축(軸:바퀴의 축을 칼로 깎아 망가뜨림)한 뒤 이를 삼끈으로 묶어 돌려주었다. 이어 총령(옷가지를 싣는 수레에다 짐을 가득 실은 뒤 짐 속에 몸을 숨겨 달아났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이 곧바로 그를 추격해 잡아서는 제나라 도성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다시 총령에 몸을 숨겨 마침내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진나라로 가 조씨趙氏조간자)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를 두고 중니가 말했다.
"장차 조씨 집안에 대대로 화란이 있을 것이다."

위나라 군사가 회군할 때 대부 활라(羅)가 전군교郊 :(殿軍:후군)이 되었다. 그러나 조나라 국경을 넘어서기 전에 활라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어자가 이같이 말했다.
"후군이 되어 대열 속에 있으면 어찌 용기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활라가 이같이 대답했다.
"소려(素厲:헛된 勇名)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무용(無勇: 용기가 없음)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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