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왕 합려의 최후
범씨 가문의 가신 왕생과 장류삭
왕기과 염유
오자서
공자, 세상을 떠나다
백공 승의 난
월앙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다

구천은 오나라의 군진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했다. 이에 사사(死: 결사대)를 두 차례나 출동시켰으나 이들 모두 포로가 되었을 뿐 오나라의 군사에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죄인들을 3항으로 열을 짓게 한 뒤 각자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제히 이같이 외치게 했다. "양국 군주가 교전하는 중에 우리는 기고(旗 : 군령)를 어겨 두 번 다시 병사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감히 형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귀사(死: 죽음으로써 伏罪함)하고자 합니다." 이에 죄인들이 스스로 목을 베어 차례로 자진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 신기한 광경을 속(屬 : 주목하는 사이에 월나라 군사가 일제히 진공해 오나라 군사를대파했다. 이때 월나라 대부 영고부(浮)가 창으로 오왕 합려를 공격했다. 이에합려가 장지(將指: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영고부는 합려의 신발 한짝을 노획했다. 이때 오왕 합려는 급히 퇴병하던 중 취리에서 7리 떨어진 오나라의 형(經)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 P433
"지금 우리 오나라는 유과나라만 못하고, 월나라는 오히려 소강 때보다 강대합니다. 만일 월나라가 장차 이보다 더욱 강대해지면 어찌 오나라의 환난이 되지 않겠습니까. 월왕 구천은 백성들을 애호하고 은혜 베풀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는 은덕을 베풀면서도 인심을 잃지 않고, 백성을 애호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세운 공을 말살하지 않습니다. 월나라는 본래 우리와 동양 :국토가 접해 있음)하여 누대에 걸친 구수(원수)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하고도병탄하지 않고 그대로 보전시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고 원수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비록 후회한들 불가식이(不已: 우환을 제거할 길이 없음)일 것입니다. 희성의 나라인 오나라의 쇠망은 이미 손가락을 꼽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오나라는 이들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도 적의 흥성을 조장하면서 패자가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원이 물러나와 어떤 사람에게 이같이 말했다. "월나라가 10년간 생취(生聚:백성을 양육하고 재물을 모음)하고, 10년간 교훈(敎訓: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킴)하면, 20년 뒤 우리 오나라 땅은 월나라에 의해 황량한 소택지로 변하고 말 것이다." - P439
이제 듣건대 오왕 부차는 한 번 출행하여 이틀 이상 숙박하게 되면 반드시 대사피지(臺池:커다란 정자와 연못을 뜻하는 말로 부차가 출행하면 늘 연못에 배를 띄워 놓고 했음을 지칭)를 갖추고, 단 하루의 숙박일지라도반드시 비장빈(妃嬪御:시침드는 여인의 총칭으로 ‘비장‘은 이들 중 귀한 자, ‘빈어‘는 천한 자를 지칭)들이 모신다고 하오. 또 1일지행(一日之行 : 당일치기 출행)일지라도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자 하여 반드시 완호(玩好:놀이 도구)를 휴대하고 진이(珍異: 귀한 물건)를 수집하여 오직 즐기는 데에만 힘을 쏟는다고 하오, 나아가 그는 백성들을 원수같이 대해 매일 백성들을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고하니 이는 지금 보는 바와 같이 그칠 기미가 전혀 없소. 이리하면 그는 자신이 먼저자패(敗:스스로 패망함)하고 말 터인데 어찌 우리와 싸워 이길 수 있겠소." - P442
당초 범씨 가문의 가신 왕생(王生)은 같은 가신 장류식(張柳朔)을 미워했다. 이에 범소자(것을 청했다. 그러자 범소자가 왕생에게 이같이 물었다. "그 사람은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사구불급공(私仇不及: 사적인 원한은 공적인 일에 해를 끼칠 수 없음)입니다. 좋아하면서도 그 잘못을 지나치지 않고, 미워하면서도 그 좋은 점을 버리지 않는장유삭을 백인의 지방 장관으로 보낼사길석)에게 - P454
것이 의(義)의 근본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그 의를 어기겠습니까." 범소자가 백인을 떠나 제나라로 가려고 하자 장유삭이 자신의 아들을 불러 이같이명했다. "너는 주인을 따라가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라. 나는 장차 여기를 사수할 것이다. 여기는 왕생이 나의 사절절조를 지켜 죽음을 위해 마련해 준 곳이다. 나는 나에 대한 그의 신임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고는 드디어 사길석을 위해 진나라 군사를 저지하다가 백인에서 전사했다. - P455
초소왕이 이같이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초나라 군사가 재패(再敗:노정공 4년에 백거의 전투에서 이미 오나라에게 한 차례 패한 적이 있음)하게 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그렇다고 맹약을 버리고 원수를 피하는 것 또한 죽느니만못하다. 어차피 죽기는 매일반이니 원수와 싸우다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고는 곧 공자 신(申:기원전 571년에 죽은 공자 신과 별개의 인물임)에게 왕이 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공자 신이 이를 사양했다. 초소왕이 또종실인 공자 결(結: 子期)에게 사왕이 될 것을 명했으나 그 또한 이를 거절했다. 초소왕은 다시 공자 계(啓 사왕이 될 것을 명했다. 결국 공자 계는 다)에게섯 번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이를 승낙했다. - P458
이 싸움에서 공위(爲: 공무인)는 폐동(은 전차를 타고 분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 이에 이들을 함께 출빈(出치소 또는 묘지로 옮김)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이같이 평했다. "왕기는 능히 간과를 잡고 나라의 사직을 지켰으니 가히 무상(無자의 대신 성인의 장례로 장사 지냄)할만하다." 염유는 창을 들고 제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이로써 노나라 군사가 능히 제나라 군사를 공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공자가 이같이 평했다. "염유의 행동은 참으로 의(義)에 합당하다." - P480
그러고는 곧 오왕 부차를 찾아가 이같이 간했다. "월나라는 우리나라에게 심복(腹)의 질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접경하고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병탄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구천의 유(柔服: 유순하게 服함)은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니 월나라를 속히 도모하느니만 못합니다. 우리가 제나라를 쳐 승리를 거둘지라도 이는 석전(경작을 할수 없는 돌밭)을 얻는 것과 같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월나라를 없애 소택지로 만들지 않으면 오나라는 장차 망하고 말 것입니다." - P483
"민천(旻어진 하늘)이 부조(不吊 : 잘 대해주지 않음)하여 국로(國老: 국가원 - P510
로)를 은유(遺:잠시 세상에 더 머무르게 함)하게 하지 않도다. 그로 하여금 여일인(余一人)을 보위하게 하여 재위했는데 이제 여(余)는 경경(勞勞:고독하여 의지할 곳이 없음)히 재구(在근심으로 병에 걸림)하게 되었도다. 오호애재(嗚呼哀哉 : 아, 슬프도다), 니보(尼 : 공자)여, 무자율(無自律 : 스스로 통제할 바를모름)이로다." 이를 두고 자공이 이같이 평했다. "군주는 아마도 노나라에서 선종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공자)의 말씀에 이르기를, ‘예시즉혼: 예를 잃으면 혼합해 짐), 명실즉건(庶: 명분을 잃으면 잘못을 저지르게 됨)‘이라고 했다. 실지(志 : 뜻을 잃음)하면 혼암해지고, 실소(所 : 신분을 잃음)하면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살아 있을 때 중용치 못하고 죽은 뒤 뇌조사를 읽음)하니 이는 예가 아니다. 또한 조사( 전자가 쓰는 ‘여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는다. 군주는 예와 명분두 가지를 모두 잃은 셈이다." - P511
이때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의 신(愼: 안휘성 영상현 서북쪽) 땅을 침공했다. 그러자 백공 승이 군사들을 이끌고 가 이들을 격퇴했다. 이에 백공 승은 혜왕(惠王: 초소왕의 아들 章)에게 병사들의 전비(戰備: 무장)를 해제치 않은 채 곧바로돌진해 오나라 군사를 모두 포로로 잡을 수 종묘에 바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초혜왕이 이를 허락하자 백공 승은 마침내 기회를 틈타 반기를 들고 말았다. 가을 7월, 백공 승이 자서와 자기를 조정에서 죽인 뒤 초혜왕을 협박했다. 이때 자서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죽었는데 자기는 반군에게 잡혀 죽기 전에 이같이 - P514
말했다. "지난날 나는 용력(勇力)으로 군주를 섬겼다. 이제 죽는 마당에 불종(弗終: 有始無終으로 시작만 있고 끝이 없음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고는 곧 예장(豫章:樟木으로 곧 녹나무)을 뽑아 반군들을 죽인 뒤 분전하다가 죽었다. 이때 석기가 백공 승에게 이같이 주장했다. "창고를 불사르고 왕을 시해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백공 승이 이같이 반대했다. "그리할 수는 없다. 시왕은 불상(不祥)이고, 분고(焚庫:부고를 불사름)하면무취(無: 비축한 물자가 없앱)하게 된다. 그리하면 장차 무엇으로 초나라를 지킬 것인가.‘ 이에 석기가 반론을 제시했다. "초나라를 차지해 백성을 다스리고, 공경히 신령을 받들면 가히 득상유취(得有聚:吉祥을 얻고 물자를 비축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엇을 걱정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백공 승은 이를 좇지 않았다. - P515
이때 제나라 사람이 전에 제평이 계수 한 데 반해 노애공이 단지 하배(下拜)만 한 사실을 책하여 이를 러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노인지구(魯人之 : 노나라 사람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는 ‘쌈’의 뜻을 지니고있어 ‘구‘로 읽는 것이 옳음)를 수년이 지나도 스스로 깨닫지 못해 우리로 하여금화를 못 참아 펄쩍 뛰게 만드네. 노나라는 오직 유서여 두 나라 사이에 커다란 근심만 조성하네." - P529
노애공 22년 여름 4월, 주은공(隱公)"이 제나라에서 월나라로 달아난 뒤 월나라 사람에게 이같이 호소했다. "오나라가 무도하여 아비인 나를 억류하고 내 자식을 보위에 올려놓았소." 이에 월나라 사람이 주은공을 귀국하게 하자 이번에는 태자 혁(革)이 월나라로 달아났다. 겨울 11월 27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용동(雨東:절강성 정해현 동쪽의 海島에 위치)에 거처할 것을 허용하자 오왕 부차가이같이 사양했다. "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찌 군주를 섬길 수 있겠소.‘ 그러고는 곧 목을 매어 자진했다. 월나라 군사가 오왕 부차의 시신을 이끌고 귀국했다. - 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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