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까지 눈이 무척 많이 내렸다. 


아침까지 외부에서 놀다가 오후에 아파트에 도착해보니 이미 제법 눈이 쌓여 있었는데 1~2시간 더 많은 눈이 내려 기분을 들뜨게 했다. 산책은 힘들어도 눈 구경은 하자며 잠시 나와서 아파트 주위를 걸었다. 바람까지 불어 무척 춥기는 했지만 사람 없는 눈길을 걷는 것은 여러 모로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크리스마스 때 맞춰서 눈이 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일텐데 올해는 어찌될지 모르겠다. 꿈을 꾸는 것은 자유니까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어봐야지.




그리고 며칠 전 푸바오 굿즈를 주문한 것이 도착했다. 보자마자 은오님이 생각났는데...ㅎㅎㅎ 아무튼 아까워서 다른 것은 못 쓸 것 같고 그저 패브릭 달력만 쓸 것 같은 예감이...^^


(틴케이스)


역시 나는 동글동글하고 푸근한 캐릭터를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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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12-17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바오 굿즈, 다양하네요. 귀여움이 넘쳐나네요^^

거리의화가 2023-12-18 09:03   좋아요 0 | URL
굿즈 다양해서 좋더라구요.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달력입니다. 유용하기도 하고!ㅎㅎ 문 앞에 걸어놓고 왔다갔다 할 때마다 보면 기분 절로 좋아질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3-12-17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푸바오 굿즈라는 것이 있군요? 하하.

거리의화가 2023-12-18 09: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러게 말입니다. 푸바오 이제 곧 중국간다고 해서 이렇게라도 보면서 대리만족하게 될 것 같아요^^

은오 2023-12-18 0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헐 우리 애기들!! 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아까워서 못쓰겠어요!! 하지만 원래 팬심으로 산 굿즈는 관상용입니다. 고이 보관해두고 심심할때마다 꺼내보며 흡족해하기 >.<

잠자냥 2023-12-18 07:16   좋아요 3 | URL
마지막 사진(달력) 5월달 아래 하트 푸바오 완전 은바오 ㅋㅋㅋㅋㅋㅋ ㅠㅠ

은오 2023-12-18 07:2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친구는 러바오입니다.

잠자냥 2023-12-18 07:47   좋아요 2 | URL
헐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그게 보이다니 ㅋㅋㅋㅋㅋ 찐사랑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12-18 09:06   좋아요 1 | URL
ㅎㅎ 그쵸. 그래서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포장 안 뜯고 그대로 모셔두었습니다^^ㅋㅋㅋ 틴케이스도 이뻐서 대만족입니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질 것 같아요^^
역시 푸바오 패밀리를 잘 아는 은오님!!!ㅎㅎㅎ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지음, 이원근 옮김 / 평민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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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우연한 계기에 발견하여 읽게 된다. 이 책이 그랬다. 지난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을 읽다가 1차 세계대전의 배경의 이야기 때문에 바닥에 쌓여 있던 이 책의 붉은 색의 강렬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비록 다음에 읽기로 예정된 책이 있었으나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읽게 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지금 집어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쟁사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다가 1차 세계대전은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개인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읽어보니 저자의 흥미로운 서술 전개 방식, 인물에 대한 탁월한 묘사, 균형감 있는 서술 덕분에 끝까지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부제가 눈에 띄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1개월간의 전사’라는 것 때문이었다. 우연한 계기(사라예보 사건)로 촉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전쟁은 이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이번에도 단기전으로 종료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전쟁 초기 1개월 여의 기간 동안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4년의 시간이 흐를 정도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며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왜 그랬을까?


직관으로 그랬는지 또는 고도의 지적능력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군인인 세 사람만은 수 개월이 아닌 수 년간 길게 뻗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길고, 소모적인 투쟁"을 예언한 몰트케가 그 중 하나였다. 죠프르가 두 번째였는데 그는 1912년 장관들의 질문에 대해 만일 프랑스가 전쟁에서 먼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독일의 국가적인 저항이 시작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쪽 모두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일 것이며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각각 1911년과 1906년부터 자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죠프르나 몰트케, 그 누구도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예견한 형태의 전쟁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이자 자신의 전망대로 행동했던 유일한 인물은 키치너 경인데, 그는 최초의 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었다. 8월 4일 이집트로 향하는증기선에 승선하려는 순간 급하게 소환되어 국방장관에 임명된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수수께끼 같은 신통력에 의해 이 전쟁은 3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를 믿지 않는 다른 각료들에게 그는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3년은 각오해야 합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사실상 결말이 난 후에도 완전히 궤멸되어야만 굴복할 것입니다. 그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지금 살아 있는사람은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P218~219


1장부터 5장까지는 1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주요 참전국들의 전쟁 계획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각국의 전쟁 계획을 엿봄으로써 전쟁의 전개 방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주요국에 해당하는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슐리펜 계획’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지만 ‘플랜 17’은 작전계획이라고 하기에는 유동적인 측면이 많았던 것 같다. 


독일군의 작전명은 ‘슐리펜 계획’이었다. 핵심은 적의 양 날개를 꺾고 그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것”이다. 이 작전의 핵심은 프랑스군을 메츠와 보쥬 사이의 자루로 돌진해 오도록 유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알자스-로렌 전선의 독일군 좌익이었다. 프랑스군은 빼앗긴 영토를 해방시키기 위해 이 지점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그렇게 되면 독일군이 작전을 성공시키기에는 더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의 진정한 승리가 프랑스군의 배후에서 성취되는 동안 그들은 독일군 좌익에 의해 자루 속에 갇힌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78


반면 프랑스 군측의 주요 작전인 ‘플랜 17’은 1913년 4월에 완성되었다. 그것의 동기가 되는 아이디어는 “우리는 마인쯔를 지나 베를린으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작전계획이 아니라 정해진 목표도 없이 환경에 따라 유동적인 각 군의 몇 가지 공격로에 대한 지침을 포함한 군의 배치계획이었다.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모든 병력이 하나가 되어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진격하는 것이 총사령관의 뜻이다.” 일반 지침의 나머지 부분은 프랑스군의 행동이 두 곳의 주공격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는 메츠-티옹빌의 독일군 요새 지역 왼쪽을, 또 하나는 그 오른쪽을 공격한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총체적인 목표는 밀려오는 독일군 우익을 고립시켜 후방과 차단하면서 동시에 라인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 P108


5장부터 9장까지는 초반 전쟁의 분수령이 된 영국 참전 여부와 벨기에 중립을 둘러싼 각국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10장 이후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1개월 동안의 주요 전투의 전개, 결과를 확인하며 앞으로의 전쟁을 예상하게 한다. 


리에쥬는 독일로부터 벨기에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철책문이었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함락하기 어려운 전략 요충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독일군은 벨기에의 힘을 약하게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예상 못하게 선전하면서 독일군은 빠른 시간 내에 그곳을 통과하여 프랑스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리에쥬의 의원인 셀레스탱 뎀블롱은 그때 쌩 피에르(St. Pierre) 광장에 있다가 공성용 대포가 광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포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너무 거대하여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괴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다가왔으며 36마리의 말들이 끌었다. 포장된 도로가 들썩거렸다. 군중들은 이 엄청난 기계장치의 출현에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천천히 쌩 랑베르(St. Lambert) 광장을 지나 테아트르(Théâtre) 광장으로 들어간 다음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을 끌어 모으면서 소브니에르(Sauveniere) 대로와 아브루아(Avroy) 대로를 따라 느릿느릿 무겁게 지나갔다. 한니발의 코끼리들도 로마인들을 이보다 더놀라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과 동행하는 병사들은 거의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절도있게 행진했다. 그 대포들은 악마였다..…그것은 아브루아 공원에 조심스럽게 설치된 다음 정밀하게 조준되었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는데, 군중들은 뒤로 나가떨어졌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가까운 곳의 창문은 모두 박살이 났다." - P321


영국군은 영국의 군사적 대비책에 관한 기본 방향을 견지하였으며, 프랑스에 파병한 BEF의 지휘에 관해 죤 프렌치 경에게 시달할 지침을 통해 전쟁초기 단계에서 원정군의 책임을 제한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켰다.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 전략에 대해 비난을 반영하고 있는 키치너의 명령은 만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동원되지 않은 채 영국군이 "적의 공격에 과도하게 노출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공격 작전"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받는다면 죤 경은 우선 본국 정부와 협의해야 하며, "경의 지휘권은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며, 경은 어떠한 경우라도 동맹국 장군의 명령에 어떤 의미로도 통제 받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P338


브뤼셀의 함락소식이 전해지자 8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총공격에 임하게 된다. 랑허작은 상브르에 도착했으며 영국군도 그와 이웃한 위치에 있었다. 그동안 우왕좌왕하던 죤 프렌치 경도 마침내 죠프르에게 다음날이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로렌에서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루프레흐트의 반격이 엄청난 위력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카스텔노의 제2군은 죠프르가 일부 군단을 벨기에 전선으로 이동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후퇴 중이며, 듀바이도 혹독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알자스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독일군을 상대로 포 장군이 물루즈와 그 주변 지역을 전부 재탈환했지만 이제 랑허작 군이 상브르로 이동하면서 중앙공격에 투입될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어 포의 군대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야만 했다. 죠프르의 어쩔 수 없는 입장 때문에 포의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알자스마저 가장 큰 제물로써 플랜17의 제단에 바쳐지게 된 것이다. - P375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체 서부전선 중 네 군데였으나, 역사는 이들을 묶어 국경의 전투(the Battle of the Frontiers)라 부른다. 8월 14일부터 우측의 로렌에서 이미 시작된 각각의 전투 결과가전 전선에 알려지게 되면서 로렌의 소식이 아르덴느에, 아르덴느는 다시 샤를루와 전투로 불리는 상브르와 뫼즈에, 그리고 샤를루와는 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 P377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전방동원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전쟁에 필요한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져야 참전할 수 있다고 했지만 8월 10일이 되자 독일이 동프러시아에 남겨둔 병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가능한 가장 신속하게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형태로 공격을 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궤멸시켜야만 하는 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그 이후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목표는 독일군국주의와 그 황실의 패망이라고 선언하면 할수록, 독일도 더욱 완강하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관된 맹세를 다짐했다. 윌슨 대통령의 중재안에 대한 답신에서 베트만홀베그는 런던조약이 독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독일도 강화를전제로 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양측은 전쟁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 P509


이미 정해진 결정을 재확인하기 위해 작전실로 들어선 죠프르는 그곳에 모여 있던 장교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진격나팔이 울려 퍼질 때 전 장병들에게 낭독될 명령에 서명했다. 대개 프랑스어는 특히 대중에게 공표될 경우 그것이 화려하게 들리도록 정성을 들이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거의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요지는 강하고 단호했다. "이제 전투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은 적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데 기울여져야 합니다.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한 부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하며 뒤로 밀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전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 P674


마른 전투를 시작하는 것에서 이 책의 내용은 끝이 난다. 전투의 결과는 독일군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초반 승리의 기회는 더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서부전선의 교착은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플랜17의 실패가 합쳐져 이루어졌다. 하루에 5,000명 때로는 50,000명 꼴로 인명을 빼앗고, 무기, 에너지, 돈, 고급 두뇌, 훈련된 인력을 고갈시킨 서부전선은 연합국의 전쟁자원을 소진시켰으며 다른 경우였으면 전쟁을 단축시킬 수도 있었던 다다넬스 작전과 같은 이면작전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개전 첫달의 실패로 인해 굳어진 교착상태는 전쟁의 향후 진로와 결과적으로 강화조약의 조건, 양 대전 사이의 사회상, 그리고 제2차 대전의 조건들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끼쳤다. - P681


이 책으로 전쟁 초기의 역사를 정리한 이후 다른 1차 세계대전의 역사 사료들을 접한다면 더 풍성한 읽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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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프랑스에게 공격 개시일을 앞당기기로 약속했지만 그 일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막바지에 이르자 즉흥적인 대응이 불가피했다. "전방동원"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이것은 며칠 정도 시간을 벌기 위해 사전 준비단계 일부를 생략하는 방법이었다. 파리로부터 쉴새 없이 밀려와 팔레오로그의 유창한 언변을 통해전달되는 일련의 전보들도 압박을 가중시켰다. 8월 6일 러시아군 총참모부가 발령한 명령에는 "프랑스군의 위급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가능한 이른 시기에 독일에 대해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나 이를 위해서는 물론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져야만 한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자 "충분한 전력"이라는 단서는 빠져버렸다. 그 날자 명령은 "독일이 프랑스를 상대로 획책하는 엄청난 도발에 대하여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우리의 지원은 독일이 동프러시아에 남겨둔 병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가능한가장 신속하게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되어있었다. 제1군과 제2군은 M-14(8월 13일)에 진격할 수 있는 "위치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보급품은 M-20(8월 19일) 까지 완전하게준비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보급 지원도 없이 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P427

동프러시아에 울려 퍼진 "코삭이 밀려온다! (Kosaken kommen!)"는외침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이 지역을 막아 보겠다는 독일의 결심을 흔들었다. 4와 2분의 1개 군단, 1개 기병사단,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새 수비대 그리고 몇몇의 지방 여단으로 구성된 프러시아의 제8군은 수적으로 2개 러시아군 중 하나와 대략 비슷했다. 이들이 몰트케로부터 받은 명령은 동서프러시아를 방어하되 우세한 적에게 패배하거나 쾨니히스베르크 요새로 쫓겨 갇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압도적인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면 그들은 동프러시아를 적에게 내어주고 비스툴라 후방으로 후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 P434

무엇이 OHL로 하여금 공격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 전선이 약화됨에도 불구하고 3개 군단씩이나 빼내도록 설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연실색한 그는 타펜에게 동부전선에서병력 증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라도 이미 시작된전투에 맞추어 오기는 너무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타펜은 그들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써도 좋다고 말했다.
이 중대한 결정의 발단은 러시아군이 독일군의 예상대로 동원 후 6주가 아니라 2주 만에 공격을 시작하자 OHL에 야기된 공포였다. 타펜이지원병력을 보내줄 수 있다고 언급하게 된 주 요인은 프랑스 국경에서 - P466

거둔 "위대한 승리"였는데, 이로 인해 "OHL 내에는 이미 서부전선에서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 배경에서 8월 25일 몰트케는 "자신에게 쏟아진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으로부터 동프러시아를 구하기 위한 지원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 P467

리에쥬보다 더 큰 이두 번째 승리에도 불구하고 루덴도르프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렌넨캄프 군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 내게 가해진 긴장감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서부전선으로부터 몰트케가 보내 준 새로운 2개 군단과 합세하여 렌넨캄프와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승리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는데, 비록 그 이유는 틀렸지만 시종일관 정확하게 렌넨캄프가 추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제8군을 이동시켜 삼소노프와 맞서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명령을 준비한 호프만, 루덴도르프의 명령을 거부하며 삼소노프의 좌익을 확실하게 포위한 프랑수와, 결정적인 순간에 루덴도르프의 불안감을 덜어 준 - P486

힌덴부르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했던 것은 치밀하기로 소문난 독일군의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인 없었던 러시아군의 무전이었다. 루덴도르프는 참모들이 낮 동안 정기적으로 수집하여 해석 또는 번역한 다음 매일 밤 11시 자신에게 보내준 감청 보고에 의존하게 되었다. 만일 어쩌다가 그 보고가 늦어지면 그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직접 암호 해독실에 나타나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을것이다. 호프만도 감청이야말로 탄넨베르그 승리의 진정한 요인임을 인정했다. "우리에게는 우군이 있었는데, 바로 적이었다. 우리는 적군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 P487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궤멸시켜야만 하는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정부는 - P508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그 이후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목표는 독일군국주의와 그 황실의 패망이라고 선언하면 할수록, 독일도 더욱 완강하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관된 맹세를 다짐했다. 윌슨 대통령의 중재안에 대한 답신에서 베트만홀베그는런던조약이 독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독일도 강화를전제로 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양측은 전쟁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 P509

몽과 샤를루와 전투가 끝나자 시체로 뒤덮인 전장에서 장기전이라는 피할수 없는 사실이 그 실체를 드러내며, 연합국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장기전이 되면 그들은 미국에게 식량, 무기 그리고 자금을 (이때까지는 누구도 병력은 생각하지 않았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독일에 대해서는 이 같은 지원이 차단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며 거대한 중립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점차 필수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상충하는 일이 되었다. 중립국과 독일 간의교역에 새로운 제약이 추가될 때마다 공해상의 자유에 대한 미 국무부 - P528

의 또 다른 정당한 항변이 제기되면서 거북하게도 영국은 결국 두 가지목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당장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영국인의 천성적인 거부감을 가진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암초를 피해가는 조타수처럼 큰 원칙을 피하면서 또한 어느 한쪽이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 당할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에까지 논의가 비화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매 사안마다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목표는 자신의 말대로 사안이 제기될 때마다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강제할수 있는 최대한의 해상봉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 P529

카이저는다시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전함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북해함대 사령관의 지휘권은 더욱 제한될 것이며, 황제의 사전 허락없이는 대규모 기동을 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후로 영국 해군이 독일을 에워싸는 봉쇄의 벽을 쌓는 동안 독일해군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사슬에 얽매여 힘을 잃은 불행한 티르피츠는 9월 중순에 "우리가 전투에 성공할 수 있었던 제일 좋은 기회는 선전포고 후 2주에서 3주 사이였다"고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 - P535

공의 기회가 커지기는커녕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그는 예견했다. "실재하는 함대‘가 가지는 최대 효과 즉, 중립국들에 대한 과도하게 가중된압력, 독일의 해상 교역에 대한 완벽한 파괴, 실행 가능한 최대한의 봉쇄를 거둔 쪽은 영국 함대였다. - P536

8월 28일 전방 지역이 확장되어 파리와 그 양쪽으로 세느에 이르는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면서 파리시 정부는 군정장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전 10시 갈리에니는자신의 군사 및 민간 내각을 소집하여 수도방위위원회를 개최했는데 모두 기립한 채로 진행된 위원회는 10시 15분에 끝났다. 위원들은 파리를방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적의 출현으로 인해 "비상 사태"에 관한 법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순히 인증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법적 근거를 제공할 서류는 이미 만들어져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갈리에니는 한 사람씩 불러 서명하게 하고 곧바로 폐회를 선언했다. 그것은 그가 주재한 처음이자 마지막 위원회였다. - P586

그날 밤 클룩의 선회를 다시 한번 검토한 다음 파리쪽으로 노출된 측면이 불안해진 몰트케는 새로운 일반명령을 내렸다. 좌익에 대한 문제처럼 그것은 확신이 없었던 그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1군과 제2군에게 "프랑스군을 파리로부터 멀리 남동쪽으로 밀어붙이라"고 명령 - P625

함으로써 클룩의 선회를 재가했다. 그와 동시에 클룩 군에게 "제2군의후방에서 제형(echelon, 梯形)으로 뒤따르며 "군의 측면을 엄호하는 책임을 맡으라고 명령함으로써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 하였다.
제형으로! 클룩에게 그것은 일전에 OHL이 자신을 뷜로브의 지휘 하에 두었던 것보다 더 심한 모욕이었다. 한 손에는 소총, 다른 손에는 권총을 들고 우익을 이끌고 있던 사나운 모습의 아틸라는 그 누구에게도뒤쳐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1군에게 "프랑스군을 남동쪽으로 몰기위해 내일도[9월 3일] 마른을 넘어 진격을 계속하라"는 독자적인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파리쪽으로 노출되는 측면에 대한 방어는 가장 약한두 부대 즉, 브뤼셀에 1개 여단을 남기고 온 제4 예비군단과 9월 1일 영국군과 벌인 전투에서 심하게 피해를 입은 제4기병사단을 후방에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P626

클룩 안쪽으로 선회한 것을 알아챘음에도 죠프르와 GQG에 있는그 참모들은 이때까지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예상치 않았던 절호의 기회를 보지 못했다. 9월 2일 클룩 영국군을 추격하기 위해 방향을틀자 그들은 혹시 그가 다시 파리를 향해 방향을 돌리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어쨌든 그들의 마음은 파리가 아니라 세느를 따라 펼쳐질 전면전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확고한 전선이 재구축되기 전에 이 전투를 감행할 수는 없었다. GQG에서 계속된 속타는 협의 끝에 죠르는 군대가멈추게 될 지점까지 후방으로 며칠간 더" 퇴각을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이 기간 동안 우익으로부터 증원군을 데려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모젤 방어선이 약해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1군과 2군으로부터 각각 1개 군단씩 차출하기로 결정했다. - P639

그날 밤 입안되고 다음날 이른 아침 발령되어 전 군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은 우익의 실패, 벨기에의 중립마저 희생시켰던 승리를 위한 독일의 기도가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벨기에 침략만 한 달째인 9월 4일자로 된 그 명령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담고 있었다. "적은 제1군과 제2군의 포위공격을 빠져나갔으며 그 병력의일부는 파리 방위군과 합류했다"고 언급했다. 적 부대는 모젤 전선으로 - P653

부터 철수하여 "십중팔구 파리 지역에 우세한 전력을 집결시켜 독일군의 우측을 위협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이동 중에 있다. 따라서 "제1군과제2군은 파리의 동쪽 전선을 마주한 채 그 지역으로부터 가해진 적의어떠한 작전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대기해야만 한다." 제3군은 세느를향해 계속해서 남쪽으로 진격하고 나머지 군들은 이미 하달된 9월 2일자 명령에 따르도록 하였다. - P654

이미 정해진결정을 재확인하기 위해 작전실로 들어선 죠르는 그곳에 모여 있던 - P673

장교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진격나팔이 울려 퍼질 때 전 장병들에게 낭독될 명령에 서명했다. 대개 프랑스어는 특히 대중에게 공표될 경우 그것이려하게 들리도록 정성을 들이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거의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요지는 강하고 단호했다. "이제 전투가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은 적을 공격하여물리치는 데 기울여져야 합니다.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한 부대는 어떤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하며 뒤로 밀리기보다는 차라리그 자리에서 전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 P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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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프랑스군 수송 선단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궤벤과 그동료 전함이 1912년 진수 후에 지중해를 순항하도록 파견된 한 가지 이유였다. 마지막 순간 독일은 그들이 해야 할 보다 중요한 역할을 발견했다. 8월 3일 독일군이 머뭇거리는 터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가능한 모든 압력을 가할 필요를 느꼈을 때, 티르피츠 제독은 수숀 제독에게콘스탄티노플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 P249

한동안의 격렬한 논쟁이 거듭된 끝에 한 장관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독일이 이 전함들을 우리에게 팔 수는 없을까요? 그들의 도착을 계약에 의한 인도로 간주할 수는 없을까요?"
모두들 이 딜레마를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척의 터키 전함을 압류한 영국의 독선적인 정의에도 대항할 수 있는 이 훌륭한 생각에 기뻐했다. 독일이 합의하자 이 매매는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공표되었고 이어서 바로 야우스(Jawus)와 미딜리(Midilli)로 명칭이 바뀐 궤벤과 브레슬라우는 승무원들이 터키식 모자를 쓰고 터키 국기를 게양한 채 군중들의 열광 속에서 술탄의 사열을 받았다. 마치 자신들이 도둑 맞은 두 척군함을 대신하여 귀신이 보내 준 것 같은 갑작스러운 독일 전함의현은 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독일에 대한 인기를 치솟게해 주었다. - P274

바깥 세상에서 보기에 리에쥬를 공격 중인 독일군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타임』지 종군기자의 말처럼 "아주 깨끗하게 박살 난 것" 같았다. 그 당시 잠깐 동안은 이 말이 거의 맞았다. "잠자는 양을 아주 손쉽게 제압할 것으로 기대하며 허풍을 떨었던 독일군은 요새를 강습 점령하는 것에 실패했다. 8월 9일 이후 독일군은 공격을 멈추고, 비록 병력은 아니었지만 지원군을 기다리게 되었다. 공성용 대포를 기다렸던 것이다. - P304

리에쥬의 의원인 셀레스탱 뎀블롱은 그때 쌩 피에르(St. Pierre) 광장에 있다가 공성용 대포가 광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포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너무 거대하여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괴물은두 부분으로 나뉘어 다가왔으며 36마리의 말들이 끌었다. 포장된 도로가 들썩거렸다. 군중들은 이 엄청난 기계장치의 출현에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천천히 쌩 랑베르(St. Lambert) 광장을 지나 테아트르(Théâtre) 광장으로 들어간 다음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을 끌어 모으면서 소브니에르(Sauveniere) 대로와 아브루아(Avroy) 대로를 따라 느릿느릿 무겁게 지나갔다. 한니발의 코끼리들도 로마인들을 이보다 더놀라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과 동행하는 병사들은 거의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절도있게 행진했다. 그 대포들은 악마였다..…그것은 아브루아 공원에 조심스럽게 설치된 다음 정밀하게 조준되었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는데, 군중들은 뒤로 나가떨어졌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가까운 곳의 창문은 모두 박살이 났다." - P321

영국해군의 막중한 임무를 미리 예견하고 지중해 함대에 대해 궤벤을도모하면서도 "우세한 적과의 교전을 피하라고 명령했던 처칠처럼 키치너는 자신이 만들어야 할 백만 대군을 내다보며 BEF에 대해 상호 조화되기 어려운 정책과 임무를 부여하였다.

프랑스군의공격 위주 전략에 대해 비난을 반영하고 있는 키치너의 명령은 만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동원되지 않은 채 영국군이 "적의 공격에 과도하게노출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공격 작전"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받는다면존 경은 우선 본국 정부와 협의해야 하며, "경의 지휘권은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며, 경은 어떠한 경우라도 동맹국 장군의 명령에 어떤 의미로도 통제 받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P338

8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총공격에 임하게 된다. 허작은 상브르에 도착했으며 영국군도 그와 이웃한 위치에 있었다. 그동안 우왕좌왕하던 존 프렌치 경도 마침내 죠프르에게 다음날이면 작전에 임할 수 있 - P374

도록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로렌에서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루프레흐트의 반격이 엄청난 위력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카스텔노의 제2군은 죠르가 일부 군단을 벨기에 전선으로 이동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후퇴 중이며, 듀바이도 혹독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알자스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독일군을 상대로 포장군이 물루즈와 그 주변 지역을 전부 재탈환했지만 이제 허작 군이 상브르로 이동하면서 중앙공격에 투입될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어 포의 군대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야만 했다. 죠프르의 어쩔 수 없는 입장 때문에 포의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알자스마저 가장 큰제물로써 플랜17의 제단에 바쳐지게 된 것이다. - P375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체 서부전선 중 네 군데였으나, 역사는 이들을 묶어 국경의 전투(the Battle of the Frontiers)라부른다. 8월 14일부터 우측의 로렌에서 이미 시작된 각각의 전투 결과가전 전선에 알려지게 되면서 로렌의 소식이 아르덴느에, 아르덴느는 다시 샤를루와 전투로 불리는 상브르와 뫼즈에, 그리고 샤를루와는 몽에영향을 미치게 된다. - P377

8월 24일 독일군은 거대한 자신감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패퇴한 적만 보였고 슐리펜의 천재성이 입증되었으며, 결정적인 승리가 독일군의 손 안에 잡힌 듯 보였다. 프랑스에서 프앙카레 대통령이 일기를 적었다. "아군은 후퇴하고 적이 침입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난 2주간의 환상은 그토록 컸던 것이다. 이제 프랑스의 미래는 국가적인 저항 능력에 달려 있다."
생의 약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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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다른 도심으로 놀러왔다. 생일이라 겸사 겸사^^

인천과 가까운 곳이라 가끔 떠오르는 비행기를 보기도 했다. 조만간 여권 사진 찍고 갱신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명동에 신세계 등 유명 백화점에 화려한 루미나리에가 설치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만큼은 아니어도 크리스마스 트리 등 조형물들을 보며 미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기도 했다.

점심을 부페 식당에서 거하게 먹고 호텔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 나니 이것도 또 다른 휴가가 되는 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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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15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라다이스 시티 가셨군요! 화가님 생일
축하드려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

(화가님이랑 저랑 생일이 비슷한가 봅니다 ^^!)

거리의화가 2023-12-16 21:55   좋아요 1 | URL
네. 금요일이지만 날씨도 궂고 해서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많아서 깜짝 놀랐다는!ㅎㅎ 잘 놀다 왔습니다^^

2023-12-16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3-12-15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생일 축하해요.
알라딘 서재에서 가장 금슬 좋은 부부로 인정하겠습니다.
저를 제외하고요 ㅋㅋ

단발머리 2023-12-16 09:44   좋아요 1 | URL
저를 제외하구요 ㅋㅋㅋㅋㅋㅋ
화가님 의문의 1패네요! 부럽습니다, 페넬로페님 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12-16 21:56   좋아요 1 | URL
ㅋㅋㅋ 금슬 좋은 부부라고 해주시니 다행이네요. 남편이 잘 챙겨줘서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페넬로페님도 남편 분과 친구처럼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저를 제외하고’ 인정합니다!ㅎㅎㅎ

새파랑 2023-12-16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유명한 파라다이스 시티 인가요? ㅋㅋ 추운 겨울에 태어나셨군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스테이크 맛있어 보이네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3-12-16 21:59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처음 가본 데다가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 유명한 곳이었군요?ㅎㅎ 뷔페는 저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예약해둔 게 아니었다면 그냥 단일 메뉴 먹는 곳으로 갔을 거예요. 많이 먹지 못하기 때문에 뷔페 가면 돈이 아깝습니다ㅎㅎㅎ

단발머리 2023-12-16 0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생일 축하드려요! 사진만 봐도 마음이 들뜨네요!!

거리의화가 2023-12-16 22: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잘 놀다 왔어요^^ 오랜만에 사람 많은 곳으로 가니 살짝 어질하긴 했습니다만 재미난 경험이었습니다.

희선 2023-12-17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지났지만 태어난 날 축하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셨겠지요 성탄절 분위기 많이 나는군요 이번주 주말은 무척 춥네요 주말 편안하게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2-17 16:30   좋아요 0 | URL
집 근처에는 딱히 성탄절 분위기를 즐길 수 없었는데 나오니까 확실히 그런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워서 집콕하고 있어요^^ 희선님도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책읽는나무 2023-12-17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3-12-17 16:31   좋아요 0 | URL
나무님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