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필생의 연구과제이기도 했다. 사람이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뼈였다. 선주는 혼잣말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을 할 거야." 선생님에게도 말했다. "저는 사람을 하겠습니다."

나는 A4-5다.
왜냐고 묻지 마라. 붙인 사람 마음이다. 처음으로 사람의 조각이 발견된 날, 그 자리에 폴대가 꽂혔다. 나와 동료들이 묻혔던 곳의 라인이 포착된 뒤, 폴대가 있는 곳부터 1미터 단위로 구역이 나뉘었다. A1구역에서 나는 4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A4구역에 있었다. 그리고 서쪽에서부터 다시 번호가 매겨졌다. 그렇게 내 앞에 누워 있던 네 명의 동료는 각각 A4-1, A4-2, A4-3, A4-4의 이름이, 나는 맨 끝에 있었으므로 A4-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는 특별했다. 73년 전 이 산에 끌려온 인물 중에 가장 먼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놈들에게 미움을 살 짓을 했던 것일까. 놈들은 나를 주동자급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래서 방향을 달리해 나만 참호 안에 특별하게 앉혀놓고 죽인 것일까.
내가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물건들이 나왔다. 미국제 M1 소총 탄피 5개가 나왔다. 북한제 모시나강 소총 탄피 2개가 나왔다. 분류가 안 되는 탄피 2개도 나왔다. 조각난 탄창 1개도 나왔다. 나를 분석한 전문가는 무릎과 가슴에 총을 맞은 것 같다고 했다. 허벅지와 정강이가 만나는 연결 부위 위아래에서도 총탄 자국이 많이 발견되었다. 머리뼈에서는 총탄 자국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몸통은 무차별 난사당했다. 갈비뼈와 등뼈가 파손되었다. 발가락뼈도 끝이 부서졌다. 그럼에도 내 뼈는 206개가 다 나왔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온전한 형태로 노출되고 수습된 경우는 전례가 없다고 했다.

손 선생 덕분에 고고학은 우리나라 학문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순우리말 용어를 널리 쓰는 분야가 되었다. 손 선생은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공주 석장리 유적지에 일본 사람이 견학을 오면 손 선생은 영어를 썼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났고 심지어 해방 직전 규슈제국대학에서 유학했으므로 일본어가 통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영어를 썼다. 일본 학자들이 영어가 짧다고 하면 통역을 구해오라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도 손 선생에게 배웠다. 손 선생은 발굴단장이라고, 교수라고 뒷짐을 지지 않았다. 대신 직접 지게를 지고 흙을 퍼 날랐다. 챙이 좁은 모자에 청바지와 장화 그리고 점퍼 차림으로 현장에 나왔다. 영락없는 흙일꾼이었다. 힘든 발굴을 마치고 나면 밤늦게까지 유물 정리를 했다.

승완은 생전에 툭툭 던지듯 말했다. "낫으로 죽였어." 승완과 어울려 지냈던 동네 어른들이 대꾸했다. "OOO이가 쇠뭉치를 휘둘렀지." "몽둥이로 때려 죽였어." "OOO가 아주 잔학했지." "얼마나 잘 먹었으면 이렇게 두드려 패도 안 죽냐는 말까지 하며 죽였다고 했어." 그리고 또 그 이름들을 댔다. "OO이 대한청년단장을 했지. 그 사람 형님 위세가 대단했어." "OO집도 있지. 거기도 형제야. 인민군 때 부역하다 인민군 물러가니까 부역자 잡겠다고 돌변해서 사람들을 죽였어."
죽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을 차지했다. 신팥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승우의 사촌동생 승완도 죄인이 되어 집에서 쫓겨났다.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하여, 인민위원회를 위해 밥을 해줬다 하여, 아들이 좌익 운동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 하여, 인민군 점령기에 완장을 차고 양반을 모욕했다 하여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 죽거나 쫓겨난 사람 집에 가해자 쪽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검사는 사형 구형을 남발했다. 나는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판사로서 철학이 있다.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맥락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해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야 소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부역자 처리는 보통 고민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민족의 근본 문제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역범을 처벌하려고 만든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특조령)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민족을 해치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단독판사, 단심제에 단시간 내 처리라니.

승만에게 한국전쟁은 거대한 청소의 시간이었다. 눈엣가시 국회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모략해 이 땅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다.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1992년 눈을 감아 원통할 뿐이다. 구속의 칼날을 피한 국회의원들은 전시에 ‘사형금지법안私刑禁止法案’ 등을 제안하며 폭주하는 승만의 정부를 견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처받고 외롭게 남은 나는 재기할 수 없었다. 1952년부터 1988년까지 선거에 출마했지만 떨어지기만 했다.
아산에서 꿈을 꾸던 고향 사람들도 한동안 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너무 많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였으니까.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창고 풍경은 지옥이었다. 엄마와 가족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매타작이 끊이지 않았다. 청년단원들이 장작개비로 손목이 묶인 사람들을 때렸다. 신음 소리, 우는 소리가 모든 이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때 오빠는 옆 향토방위대 사무실에서 밤을 새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를 안고 있던 엄마도 때렸을까. 엄마는 울면서 기도를 했다. 찬송가를 읊조리기도 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는 소용 없었다.

그는 처형자들을 지엠시GMC 트럭으로 이동시킨 청년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 다고. "나와 내 가족은 절대 이렇게 손가락질당하면서 죽으면 안 돼. 나는 살아야지. 내 가족은 살아야지"라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고.

갓난아기를 업고 일행과 함께 끌려가던 젊은 엄마가 어둠을 틈타 옆 콩밭에 잽싸게 숨었다. 갓난아이가 울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아기조차 울지 않더라고 했다. 정적, 갓난아이조차 입을 닫게 만든 그 정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다. 이 콩밭 이야기는 새지기 사건이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 중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비협조를 넘어 적대적이었다. 날이 서 있었다. 다른 지역의 참고인들이 새지기에 관해 진술해줘 그나마 다행이었다.

국민은 국가에 요청받은 납세와 병역 등 여러 의무를 수행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 전쟁에 나가 죽어서 돌아오지 않은 이가 있다면, 주검이라도 찾아서 가족에게 돌려주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다. 선주는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내부 구성원에게 증명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름 없는 군인의 유해는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나는 태아다. 세상에 나와 엄마 젖을 먹어보지도, 울음을 터뜨려보지도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저 하나의 수정란 세포가 되어 엄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 지 36주였다. 자궁을 찢고 세상에 나가기 딱 한 달 전, 나를 배 속에 품었던 엄마는 처형당했다.
태어났다면 맹씨네 일원이었다.

23년간 발굴된 피아 군대의 1만 3121구 중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해가 있다. 바로 승갑이다. 선주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고 회상한다. 이 드라마는 실제로 영화가 되었다. 승갑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선주를 비롯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었죠."

내 이름은 세화다.
세계 평화를 소망하며, 아버지가 지어주었다. 세상은 평화랑 정반대였다. ‘세계 평화’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전쟁의 칼날 위에 섰다. 가스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유태인 아이의 처지가 나와 같았다. 내가 갇혔던 황골의 작은 공회당 창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이 결정됐다. 그날로부터 73년, 내가 여태껏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반항했다. 정해진 코스를 거부했다. 1977년부터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다. 1979년 무역회사인 대봉산업의 해외 지사 근무원으로 독일 뒤셀도르프에 이어 프랑스 파리로 갔고, 얼마 안 돼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나는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거대한 파도가 내 인생을 덮쳤다. 생존해야 했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황골에서 시작되었다.

슈마리나이는 1940년대 우류댐 건설로 조성된 일본 최대의 인공 호수다. 담수 면적이 2373헥타르나 된다. 1938년부터 댐 공사와 함께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고 일본 하층 노동자들과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1943년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3000여 명이나 되었다. ‘타코베야’, 즉 문어 항아리라 불리는 합숙소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배고픔, 추위,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동묘지에 가지도 못하고 그 바깥에 있는 조릿대(대나무의 일종) 덤불 밑에 아무렇게나 묻혔다.

왜 꼭 그 유해들을 데려와야 하는 것일까. 도노히라는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말하곤 했다. 그것은 도리와 상식에 대한 상상력이었다. 가령 타지에서 온 사람이 죽으면 고향에 연락해주어야 하는 게 도리다.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에 자본과 기술을 댔던 왕자제지(오지제지)와 일본 정부는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인들을 강제 노동이 아닌 정당한 모집과정을 거쳐 고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주는 체질인류학자이기 전에 사학도로서 그 말이 어이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제국주의 침탈은 그 자체로 강제 약탈이었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70년 만의 귀향은 도노히라가 말했던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세상에 전파한 멋진 퍼포먼스였다. 홋카이도의 3인, 즉 도노히라·병호·선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인민군이 아산을 점령하자마자 다수의 우익 쪽 사람들이 체포되어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거나 9월 초 인민위원회 궐기대회에 회부되어 희생됐다. 인민군 후퇴기인 9월 27일엔 신창읍 한티고개에서 유엔군이 인민군에게 의외의 패퇴를 당하면서, 도망가다 되돌아온 좌익 세력에게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9월 29일 밤부터 10월 초까지가 1차 시기라면, 10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가 2차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4 후퇴 때가 마지막 3차였다. 1·4 후퇴 때는 특히 가족 단위의 처형이 많았다. 이때엔 아산 둔포면을 지나던 피난민 300여 명이 미군 폭격으로 비명횡사하는 일도 있었다.

대통령 정희는 나에게 아산시장 자리를 제안했다. 주변에서는 국회의원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했다. 나는 거절했다. 사람들은 내가 좌익 경력이 드러날까 봐 그냥 조용히 살았다고 쑥덕거렸다. 글쎄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종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이해해줄까. "문중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기로 했다"면 납득해줄까. 어느 날 아들 재국과 결혼한 며느리가 나에게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한도 싫다고 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북한 사회주의는 다르다.
나는 1993년 1월 17일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칠순이 되던 1984년부터 심한 천식을 얻어 거동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10년은 기나긴 투병의 나날이었다. 79세였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남았는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부역 혐의자?

선감학원은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982년까지 40년간 경기도가 운영한 수용시설에서 5000여 명에 이르는 8~19세 아이들이 강제 노역과 폭력에 시달렸다. 수백 명이 병사하거나 탈출하다가 익사했다. 2014년의 평화로운 봄날엔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250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세월호는 청소년 보호에 대한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을 상징했다. 국가는 선감도에서 악질이었고, 침몰하는 세월호에서는 아예 부재했다. 바다에 빠져 죽어서도 구조되지 못한 이들이 선주를 기다렸다.

내가 ‘학살’이라 쓰면 당신은 ‘평화’라 읽는다. 2023년 6월 9일의 어느 강연장에서 당신은 나와 같은 이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였다"고. 새로운 관점이다. 나는 전쟁 상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불가피한 피해를 입은 셈이다.

나는 선사 시대와 근현대사의 사람과 유적이 묻힌 현장을 추적해 발굴하고 증언해왔다. 매개체는 뼈였다. 나는 체질인류학자다. 나는 본 헌터다.

그를 이끄는 힘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아니었다.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탐구 정신이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든, 적 군인과 교전을 치른 국군 전사자든,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탐정의 태도로 임했다. 매번 발굴을 통해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는 젊은 학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선주가 강조하는 개념은 ‘모던 미스’였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다더라" 하면 절대 곧이곧대로 믿기 보다는 문헌과 증언을 비롯한 갖가지 기록과 직접 땅을 파보고 유해를 뒤져본 뒤의 결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려고 했다. 모던 미스를 넘어서려는 신조는 그가 작성한 모든 유해 발굴 보고서 맨 끝에 이런 표현으로 적혀 있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을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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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3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시작하셨군요! 그렇네요. 거리의화가 님이라면 이 책의 존재를 아는 이상 반드시 읽어보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다 읽고 리뷰 적어주세요!!

거리의화가 2024-06-24 16:51   좋아요 0 | URL
완독은 어제 다 했고 리뷰는 조금씩 쓰는 중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닿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