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프랑스에게 공격 개시일을 앞당기기로 약속했지만 그 일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막바지에 이르자 즉흥적인 대응이 불가피했다. "전방동원"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이것은 며칠 정도 시간을 벌기 위해 사전 준비단계 일부를 생략하는 방법이었다. 파리로부터 쉴새 없이 밀려와 팔레오로그의 유창한 언변을 통해전달되는 일련의 전보들도 압박을 가중시켰다. 8월 6일 러시아군 총참모부가 발령한 명령에는 "프랑스군의 위급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가능한 이른 시기에 독일에 대해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나 이를 위해서는 물론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져야만 한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자 "충분한 전력"이라는 단서는 빠져버렸다. 그 날자 명령은 "독일이 프랑스를 상대로 획책하는 엄청난 도발에 대하여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우리의 지원은 독일이 동프러시아에 남겨둔 병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가능한가장 신속하게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되어있었다. 제1군과 제2군은 M-14(8월 13일)에 진격할 수 있는 "위치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보급품은 M-20(8월 19일) 까지 완전하게준비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보급 지원도 없이 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P427

동프러시아에 울려 퍼진 "코삭이 밀려온다! (Kosaken kommen!)"는외침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이 지역을 막아 보겠다는 독일의 결심을 흔들었다. 4와 2분의 1개 군단, 1개 기병사단,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새 수비대 그리고 몇몇의 지방 여단으로 구성된 프러시아의 제8군은 수적으로 2개 러시아군 중 하나와 대략 비슷했다. 이들이 몰트케로부터 받은 명령은 동서프러시아를 방어하되 우세한 적에게 패배하거나 쾨니히스베르크 요새로 쫓겨 갇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압도적인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면 그들은 동프러시아를 적에게 내어주고 비스툴라 후방으로 후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 P434

무엇이 OHL로 하여금 공격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 전선이 약화됨에도 불구하고 3개 군단씩이나 빼내도록 설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연실색한 그는 타펜에게 동부전선에서병력 증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라도 이미 시작된전투에 맞추어 오기는 너무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타펜은 그들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써도 좋다고 말했다.
이 중대한 결정의 발단은 러시아군이 독일군의 예상대로 동원 후 6주가 아니라 2주 만에 공격을 시작하자 OHL에 야기된 공포였다. 타펜이지원병력을 보내줄 수 있다고 언급하게 된 주 요인은 프랑스 국경에서 - P466

거둔 "위대한 승리"였는데, 이로 인해 "OHL 내에는 이미 서부전선에서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 배경에서 8월 25일 몰트케는 "자신에게 쏟아진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으로부터 동프러시아를 구하기 위한 지원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 P467

리에쥬보다 더 큰 이두 번째 승리에도 불구하고 루덴도르프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렌넨캄프 군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 내게 가해진 긴장감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서부전선으로부터 몰트케가 보내 준 새로운 2개 군단과 합세하여 렌넨캄프와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승리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는데, 비록 그 이유는 틀렸지만 시종일관 정확하게 렌넨캄프가 추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제8군을 이동시켜 삼소노프와 맞서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명령을 준비한 호프만, 루덴도르프의 명령을 거부하며 삼소노프의 좌익을 확실하게 포위한 프랑수와, 결정적인 순간에 루덴도르프의 불안감을 덜어 준 - P486

힌덴부르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했던 것은 치밀하기로 소문난 독일군의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인 없었던 러시아군의 무전이었다. 루덴도르프는 참모들이 낮 동안 정기적으로 수집하여 해석 또는 번역한 다음 매일 밤 11시 자신에게 보내준 감청 보고에 의존하게 되었다. 만일 어쩌다가 그 보고가 늦어지면 그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직접 암호 해독실에 나타나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을것이다. 호프만도 감청이야말로 탄넨베르그 승리의 진정한 요인임을 인정했다. "우리에게는 우군이 있었는데, 바로 적이었다. 우리는 적군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 P487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궤멸시켜야만 하는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정부는 - P508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그 이후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목표는 독일군국주의와 그 황실의 패망이라고 선언하면 할수록, 독일도 더욱 완강하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관된 맹세를 다짐했다. 윌슨 대통령의 중재안에 대한 답신에서 베트만홀베그는런던조약이 독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독일도 강화를전제로 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양측은 전쟁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 P509

몽과 샤를루와 전투가 끝나자 시체로 뒤덮인 전장에서 장기전이라는 피할수 없는 사실이 그 실체를 드러내며, 연합국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장기전이 되면 그들은 미국에게 식량, 무기 그리고 자금을 (이때까지는 누구도 병력은 생각하지 않았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독일에 대해서는 이 같은 지원이 차단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며 거대한 중립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점차 필수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상충하는 일이 되었다. 중립국과 독일 간의교역에 새로운 제약이 추가될 때마다 공해상의 자유에 대한 미 국무부 - P528

의 또 다른 정당한 항변이 제기되면서 거북하게도 영국은 결국 두 가지목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당장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영국인의 천성적인 거부감을 가진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암초를 피해가는 조타수처럼 큰 원칙을 피하면서 또한 어느 한쪽이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 당할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에까지 논의가 비화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매 사안마다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목표는 자신의 말대로 사안이 제기될 때마다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강제할수 있는 최대한의 해상봉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 P529

카이저는다시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전함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북해함대 사령관의 지휘권은 더욱 제한될 것이며, 황제의 사전 허락없이는 대규모 기동을 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후로 영국 해군이 독일을 에워싸는 봉쇄의 벽을 쌓는 동안 독일해군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사슬에 얽매여 힘을 잃은 불행한 티르피츠는 9월 중순에 "우리가 전투에 성공할 수 있었던 제일 좋은 기회는 선전포고 후 2주에서 3주 사이였다"고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 - P535

공의 기회가 커지기는커녕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그는 예견했다. "실재하는 함대‘가 가지는 최대 효과 즉, 중립국들에 대한 과도하게 가중된압력, 독일의 해상 교역에 대한 완벽한 파괴, 실행 가능한 최대한의 봉쇄를 거둔 쪽은 영국 함대였다. - P536

8월 28일 전방 지역이 확장되어 파리와 그 양쪽으로 세느에 이르는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면서 파리시 정부는 군정장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전 10시 갈리에니는자신의 군사 및 민간 내각을 소집하여 수도방위위원회를 개최했는데 모두 기립한 채로 진행된 위원회는 10시 15분에 끝났다. 위원들은 파리를방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적의 출현으로 인해 "비상 사태"에 관한 법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순히 인증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법적 근거를 제공할 서류는 이미 만들어져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갈리에니는 한 사람씩 불러 서명하게 하고 곧바로 폐회를 선언했다. 그것은 그가 주재한 처음이자 마지막 위원회였다. - P586

그날 밤 클룩의 선회를 다시 한번 검토한 다음 파리쪽으로 노출된 측면이 불안해진 몰트케는 새로운 일반명령을 내렸다. 좌익에 대한 문제처럼 그것은 확신이 없었던 그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1군과 제2군에게 "프랑스군을 파리로부터 멀리 남동쪽으로 밀어붙이라"고 명령 - P625

함으로써 클룩의 선회를 재가했다. 그와 동시에 클룩 군에게 "제2군의후방에서 제형(echelon, 梯形)으로 뒤따르며 "군의 측면을 엄호하는 책임을 맡으라고 명령함으로써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 하였다.
제형으로! 클룩에게 그것은 일전에 OHL이 자신을 뷜로브의 지휘 하에 두었던 것보다 더 심한 모욕이었다. 한 손에는 소총, 다른 손에는 권총을 들고 우익을 이끌고 있던 사나운 모습의 아틸라는 그 누구에게도뒤쳐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1군에게 "프랑스군을 남동쪽으로 몰기위해 내일도[9월 3일] 마른을 넘어 진격을 계속하라"는 독자적인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파리쪽으로 노출되는 측면에 대한 방어는 가장 약한두 부대 즉, 브뤼셀에 1개 여단을 남기고 온 제4 예비군단과 9월 1일 영국군과 벌인 전투에서 심하게 피해를 입은 제4기병사단을 후방에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P626

클룩 안쪽으로 선회한 것을 알아챘음에도 죠프르와 GQG에 있는그 참모들은 이때까지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예상치 않았던 절호의 기회를 보지 못했다. 9월 2일 클룩 영국군을 추격하기 위해 방향을틀자 그들은 혹시 그가 다시 파리를 향해 방향을 돌리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어쨌든 그들의 마음은 파리가 아니라 세느를 따라 펼쳐질 전면전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확고한 전선이 재구축되기 전에 이 전투를 감행할 수는 없었다. GQG에서 계속된 속타는 협의 끝에 죠르는 군대가멈추게 될 지점까지 후방으로 며칠간 더" 퇴각을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이 기간 동안 우익으로부터 증원군을 데려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모젤 방어선이 약해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1군과 2군으로부터 각각 1개 군단씩 차출하기로 결정했다. - P639

그날 밤 입안되고 다음날 이른 아침 발령되어 전 군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은 우익의 실패, 벨기에의 중립마저 희생시켰던 승리를 위한 독일의 기도가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벨기에 침략만 한 달째인 9월 4일자로 된 그 명령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담고 있었다. "적은 제1군과 제2군의 포위공격을 빠져나갔으며 그 병력의일부는 파리 방위군과 합류했다"고 언급했다. 적 부대는 모젤 전선으로 - P653

부터 철수하여 "십중팔구 파리 지역에 우세한 전력을 집결시켜 독일군의 우측을 위협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이동 중에 있다. 따라서 "제1군과제2군은 파리의 동쪽 전선을 마주한 채 그 지역으로부터 가해진 적의어떠한 작전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대기해야만 한다." 제3군은 세느를향해 계속해서 남쪽으로 진격하고 나머지 군들은 이미 하달된 9월 2일자 명령에 따르도록 하였다. - P654

이미 정해진결정을 재확인하기 위해 작전실로 들어선 죠르는 그곳에 모여 있던 - P673

장교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진격나팔이 울려 퍼질 때 전 장병들에게 낭독될 명령에 서명했다. 대개 프랑스어는 특히 대중에게 공표될 경우 그것이려하게 들리도록 정성을 들이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거의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요지는 강하고 단호했다. "이제 전투가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은 적을 공격하여물리치는 데 기울여져야 합니다.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한 부대는 어떤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하며 뒤로 밀리기보다는 차라리그 자리에서 전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 P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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