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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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없지만 매년 마음 속으로 간절히 죽은 이들의 영면을 비는 날이 있다. 특히 6월 25일이 그렇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4주년, 강산이 몇 차례가 변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생존자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생존자도 여전히 발설 시 받을지 모를 불이익에 진실은 은폐되었고 대중들에게는 잊혀진 일이 되어가고 있다.


본 헌터란 무엇인가. 뼈에 눈을 번뜩이는, 숨은 뼈를 찾아내는 사냥꾼이다. 그 뼈에 담긴 수수께끼를 푸는 추적꾼이다. 


책 제목이 ‘본 헌터‘인데 표지를 보지 않았을 때만 해도 ’Born Hunter’인 줄 알았다. ‘타고난 사냥꾼‘, 그래서 스릴러나 추적물을 생각했는데 실상은 ’Bone Hunter’로 ‘뼈 사냥꾼’이다. 물론 책의 내용을 보면 스릴러나 추적물로 생각해도 말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지니 작가가 이중적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작가는 한겨레 신문에서 베테랑 기자로 오랫동안 일해온 분으로 책도 여러 편 내셨다. 


이 책의 주인공은 1950년 아산 부역 혐의로 희생된 민간인들과 이를 발굴한 방선주 박사다. 


한국 전쟁 중 많은 학살 피해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실태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도 되지 않았다. 그 중 충남 아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을 특정 짓고 유해의 주인공의 시점에서 당시 과거를 복기한다. 계기가 된 것은 2023년 무려 73년 만에 206개의 온전한 형태의 뼈가 드러난 A4-5 때문이었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발굴 현장에서 만난 유해들 속의 사연과 발굴을 담당한 방선주 박사의 이야기를 엮어 글로 담아 냈다. 


방선주 박사는 아내에게 반해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혼인 신고를 한 뒤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건너 가 체질인류학 연구에 뛰어든다. 역사학, 고고학에 이어 운명처럼 만난 전공이었다고. 방 박사는 어릴 때 몸이 허약해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기 위해 합기도의 매력에 빠져 유단자가 되었지만 폐결핵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한 때 집이 망해 광주대단지(지금 성남의 ‘모란’)에서 8개월을 어렵게 사는 등 순탄치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의 인맥은 지금 독자의 기준으로 보면 화려하기 그지 없다. 유명한 등장 인물들이 줄줄이 나와 놀라서 절로 혀를 내밀게 된다. 화석 ‘루시’를 발견한 장본인이었던 요한슨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인맥 중 손보기 박사는 저자가 고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데 중요 역할을 했던 스승인 점에서 특히나 인상 깊었다. 


손보기 박사는 석장리 유적을 발굴한 장본인으로 고고학계의 거물이자 방선주의 스승이었던 사람이다. 윤동주, 최현배 등과 친분 관계가 있었던 만큼 우리말 사랑에 남달랐다고. 고고학계 용어를 한글로 풀어 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문이어서 후일 연세대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아산 부역 혐의 민간인 학살 피해 사건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듯 성재산 A4-5다. 유해 발굴 현장에서 붙여진 식별 번호라고 한다. 나이는 18~22세, 키 165cm 남성으로 추정된다. 1950년 10월 아산 성재산에서 산을 등진 방향으로 쪼그려 앉아 두 손을 삐삐선으로 감긴 채 발견되었다. 이를 비롯해 성재산에서는 A5-4, A17,A18,A19가 나왔다. 


A5-4는 뭉크의 절규가 떠오르는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25~~29세로 추정되며 머리뼈에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A17, A18, A19는 16~~20세 나이로 교복 단추가 발견된 것으로 짐작컨대 천안농업중학생들로 추정된다. 


성재산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황골 마을에도 희생자들이 있었다. 새지기 사건으로 1950년 추석 기간 3~4일 사이 80여명이 희생되었다. 얼마 전 타계한 홍세화도 가족, 친지들이 희생을 입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당시 불과 3살의 나이였다고. 살아 남은 아이는 부역자의 가족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분노가 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이성의 빛을 품고 있는가.’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멈춰 있었다.


설화산 은비녀로 명명되는 유해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사망한 경우다. 1.4 후퇴 때 부역 혐의 가족 딱지를 붙여 살해된 경우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 무겁다.


이처럼 당시 충남 아산에서는 부역 혐의로 몰려 희생된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사건은 1950년 9.28 수복 이후 1951년 1.4 후퇴 때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가 씌워졌고 당사자는 물론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및 각 지서 경찰과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같은 각종 치안 단체가 가담하여 감금되었다가 성재산, 설화산, 황골 새지기 공동묘지 등에 끌려가 집단학살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하면 신원 확인이 된 희생자(77명) 연령 중 10세 미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신원 확인이 안 된 희생자는 최소 8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피해자 중 여성과 노인, 갓난아이와 어린아이까지 일가족 전체가 몰살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그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원한 관계에 의한 계급 갈등이 씨앗이 된 경우도 있지만 나중에 가면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인간 사냥 형식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부역자 재판을 맡았던 유병직 판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당시 인민 재판은 마구잡이 처형 식으로 이루어졌다. 검사는 사형 구형을 남발했는데 그는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가 가진 판사로서의 철학에 숭고함이 일었다.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맥락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해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야 소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부역자 처리는 보통 고민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민족의 근본 문제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역범을 처벌하려고 만든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특조령)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민족을 해치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단독판사, 단심제에 단시간 내 처리라니.

이런 분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반면 충남 온양 신창 지서 주임이었던 유해진은 가해자의 면모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잡아들였고 죽였다. 당시 주민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에 대한 소식은 알고 있었는데 글로 다시 보니 분노가 더 치밀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하필 진실화해위원장이 되다니. 이런 식의 논리라면 학살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지 곱씹을수록 화가 난다.

내가 ‘학살’이라 쓰면 당신은 ‘평화’라 읽는다. 2023년 6월 9일의 어느 강연장에서 당신은 나와 같은 이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였다"고. 새로운 관점이다. 나는 전쟁 상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불가피한 피해를 입은 셈이다.


중후반 이후에는 방선주 박사가 참여한 여러 유해 발굴 사건을 다룬다. 그는 1997년부터 2015년까지 홋카이도 현장에서 강제징용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국군 전사자 발굴을 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와 함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으며 장준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한 일을 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각종 시민단체나 진실화해위원회와 함께 민간인 희생자 발굴 현장을 누볐다고. 특히 선감 학원, 세월호 인양 발굴, 안중근 유해 발굴에도 참여하셨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뼈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이끄는 힘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아니었다.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탐구 정신이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든, 적 군인과 교전을 치른 국군 전사자든,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탐정의 태도로 임했다. 매번 발굴을 통해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는 젊은 학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선주가 강조하는 개념은 ‘모던 미스’였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다더라" 하면 절대 곧이곧대로 믿기 보다는 문헌과 증언을 비롯한 갖가지 기록과 직접 땅을 파보고 유해를 뒤져본 뒤의 결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려고 했다. 모던 미스를 넘어서려는 신조는 그가 작성한 모든 유해 발굴 보고서 맨 끝에 이런 표현으로 적혀 있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을 새기며…."


책의 화자가 1인칭 시점이라 타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다큐멘터리나 르포 같기도 하다. 책을 읽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사건을 밝히기를 두려워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괜한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유해와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진심이 와 닿아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에는 뭉클한 감정이 인다. 대한민국의 영토에는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유골이 남아 있다. 모쪼록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서 유해를 찾고 가려진 진실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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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5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잘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거리의화가 2024-06-25 15:3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님^^

은하수 2024-06-25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저도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주셔서 제가 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6-26 07:45   좋아요 0 | URL
공들여 읽어주셔서 저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희선 2024-06-28 0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다 아는 건 아니군요 민간인 학살이 있기도 했다니,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있겠네요 그런 일을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땅에 묻히고 잊힌 사람이 많겠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