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제도

그 시대의 대부분의 이론은 ‘유럽 중심적’이었지만 최소한 메인, 뒤르켐, 베버의 이론에는 비유럽 지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비유럽 문명세계의 후발민족은 피부색과 신앙에 관계없이 사회진보의 보편적 모형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 P1991

초기의 상황이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등급에서 계급으로’의 모형은 유럽사회의 변화를 불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등급’은 모든 유럽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주요 구분원칙은 아니었다. 1800년 무렵 ‘등급사회’는 세계 기타 지역에서는 흔치 않았다. - P1993

족내혼, 기생계층, 정결금기를 기반으로 한 힌두교 카스트제도는 전 현대사회의 인도에서의 등급 구분에서 유럽의 전통적 계층사회와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 규칙을 식민주의가 자기목적에 맞게 강화했다. - P1994

19세기의 세계사회사는 대부분 이민사와 중복되며 디아스포라와 그 결과로서 형성된 새로운 프런티어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1995

가톨릭 고위 성직자나 유대인 거물 금융가를 제외한다면 19세기의 귀족은 유럽사회에서 가장 국제화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고, 서로의 등급을 평가할 수 있었다. 행동규범과 문화적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혼인시장에 참여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재산이 많았고 국제적인 교제 네트워크에 접촉하는 면도 넓었다. - P1999

빅토리아시대에 궁정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몇 사회영역에서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사람들의 감사와 복종을 누렸다. - P2003

벵골과 인도의 기타 지역에서 20세기 초에 농촌의 주도 계층이 된 집단은 자민다르가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중간 규모의 농민이었다. - P2007

1869년 이후 일본은 단계적으로 사무라이 신분을 폐지했다. 가장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은 연봉제도의 폐지였고 가장 심각한 신분적 굴욕은 1876년에 시행된 칼을 찰 수 있는 특권의 폐지였다. 이제 사무라이는 개별적으로 활로를 찾아나서야 했다. - P2009

신사는 통치자와의 접근성, 국가를 유지하는 역할, 고전에 통달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귀족과 유사했다. 이 밖에도 두 가지 공통요소는 토지에 대한 통제권과 육체노동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여러 면에서 신사의 기능은 유럽 귀족과 대응했다. - P2014

‘부르주아계층’이란 개념의 기만성은 부르주아계층의 생활방식에서 나왔다. 부르주아는 (계층)’상승’을 추구하면서 그 반대의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귀족은 몰락해도 귀족이지만 몰락한 부르주아는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낙오자일 뿐이다. - P2018

프티 부르주아는 19세기에 예외적으로 지역화된 존재였다. 그들의 경제활동 반경은 상시 접촉하는 이웃의 범위를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 P2022

진정한 부르주아는 프티 부르주아보다 사고의 지평이 넓고 자본을 소유하고 있으며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 P2024

농업과 전원생활과 정통문화보다는 상업이나 비정통적 지식과 관련된, 나아가 시야가 ‘교회의 첨탑’을 넘어서는 직업과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지난 어떤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중요해졌다. 이런 직업, 생활방식, 사고방식의 주체는 흔히 전통을 버린 새로운 형태의 사회세력, 준 부르주아였다. - P2029

유럽과의 상업적 접촉이 시작되면서부터 비유럽 준 부르주아는 중간에서 거래를 알선해주는 ‘매판’의 기능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현지 교역 네트워크와 접촉하는 경험을 넓히고 이 네트워크를 세계경제와 연결시켰다. - P2032

세계 어디에서나 ‘중산계급’은 현대적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19세기 말에 드러난 현대성은 아시아의 준 부르주아 계급 엘리트에게는 양날의 칼과 같은 선물이었다. 현대성은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문화 중립적이고 초국가적이어야 했다. - P2036

캐나다와 뉴질랜드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유럽사회는 식민지에서 파편화되고 균열된 상태로 복제되었다. - P2041

19세기의 새로운 사건은 새로운 코스모폴리탄 부르주아계급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방의 부유한 국가에서 원거리 자본이익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실패한 유토피아가 등장했다. - P20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터 프랭클 - 어느 책에도 쓴 적 없는 삶에 대한 마지막 대답
빅터 프랭클 지음, 박상미 옮김 / 특별한서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 속을 두드린 것은 두 가지 질문이었다.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버라이어티할 수가 있지?'

'대체 무엇이 그의 삶을 지탱하게 했을까?'


이 책은 빅터 프랭클의 일대기가 오롯이 담긴 자서전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집필한 책이 전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해주었다면

이 책에서는 그동안 그가 말하지 않았던 내밀한 이야기들을 전해 주고 있다.


빅터 프랭클은 부모님을 참 많이 사랑했구나 생각했다.

인자한 어머니, 엄격하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이 강했던 아버지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는 아이. 정말 행복한 것이다.)


그는 아이디어를 잘 만들어냈다고 한다. 

나는 아이디어가 정말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쾌감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데 부러웠다. 

또 재치 있는 말과 유머로 사람을 웃겨서 강연 때 청중들을 모조리 내 편으로 만든다고 한다. 

나는 말도 재미 없게 하고 글도 딱딱한 편이라 정말 부러웠다. 그런 재주를 가졌다면 문화해설사를 도전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정한 원칙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화가 나기도 하고 원칙을 지키지 못할 때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는 면은 나와 정말 비슷했다.

지금은 좀 내려놓으려고 하는 편인데 예전엔 무자르듯 기준이 칼 같아서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했다.

진한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도 똑같다. 나는 카페인을 복용하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 해도 그는 천재가 분명하다.

남을 치료해주는 능력도 가지고 있고 강연도 하고 암벽 등반을 80세 때까지 했고 작곡도 즐기고. 이리도 많은 재주를 가졌다니~ 


세살 때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청소년 때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평생 철학자로 살고 싶었다고 한다.

의사는 결국 이루었고 소설가는 아니지만 글을 써서 집필했고 로고테라피로 심리 이론을 세우고 평생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며 살았으니 철학자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태어난 집 건너편엔 아들러가 살고 있었다고 하고 의과대학생 시절 프로이트를 만나기도 했다.

아들러가 만든 국제 개인심리학회지에 프랭클의 논문이 실리기도 했지만 아들러가 개인심리학회 탈퇴를 요구하여 탈퇴하게 된다. 거기서 나와 의료심리학회를 창립하고 본인의 이론인 로고테라피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37년 정신병원을 개업했지만 1년 뒤 3월 히틀러 군대가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수용소에 가서 그와 마주한 가족의 이야기는 슬프다고 하기에도 그 크기가 너무 큰 그런 것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입국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부모님을 남겨두고 가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 남는 결정을 했을 때.

수용소에 가기 전 아내를 만났고 결혼했지만 그것이 결국 나치가 허가하는 마지막 유대인 커플이 되었을 때.

그마저도 짧은 9개월의 결혼 생활 중 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아내가 따라왔을 때. 그마저도 며칠 있다가 프랭클이 카우페링 제3수용소로 가게 되어 헤어지게 되었을 때.

마지막 수용소로 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호흡곤란이 찾아와서 죽음을 각오하고 막사를 탈출했을 때.

시간이 지나 1945년 4월 27일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아내가 죽고 어머니와 형이 수용소에서 모두 숨을 거둔 걸 알게 되엇을 때.


역자도 말미에 이야기하는데 눈물 없인 이 이야기를 옮기기가 참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나도 그랬을 것 같다. 아무리 메마른 사람이라도 억장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수용소만 생각하면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집필 의지가 있었고 삶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졌기에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과 의지를 전해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초월의 가치가 선한 영향력이 된 경우가 아닐까.


그리고 두 번째 아내를 만난 것도 그의 안정감에 한 버팀목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남은 생이 더 즐겁고 편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한다.

나의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이는 나 밖에 없고 글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3년 동안 나는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트, 제3카우페링 수용소, 튀르크하임 수용소, 네 군데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 P122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해. 탈출했어야 해. 미국으로 망명했더라면 내 평생의 과업을 다 이룰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 강제수용소는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시험대였다는 것을. 내가 자주 강조하듯이 자기 초월과 자기 상대화에 있어서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지,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제수용소에서 확인했죠. - P125

나는 연대책임에 반대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불행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 P131

"9,000달러로 살 수 없는 게 시간이에요. 저에게 사고 싶은 게 있는지 묻는다면 시간입니다.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요. 9,000달러를 줘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주어도 제 시간을 팔고 싶지 않아요." - P153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책임감! 우리는 내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로고테라피 치료의 원칙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이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P15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02-04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빅터 프랭클 인간적으로 너무 멋진 사람, 세기의 천재 , 진정으로 환자를 위해 쉼 없이 연구하고 진료 했던 의사
전 이분이 쓴 로고테라피 읽고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도 받고 제 자신의 상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ㅎㅎ

재치 있는 말과 유머로 사람을 웃겨서 만나면 모두 내편으로 만들지만
전, 차마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습니다....

화가님의 자서전 쓰기
응원 합니다 ^ㅅ^

거리의화가 2022-02-05 06:55   좋아요 2 | URL
빅터 프랭클 인간적으로 참 멋진 사람이다 생각했어요.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살아남은 그의 이야기가 울림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주변에 그를 아끼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한몫 한 것 같구요.
저는 자서전 쓰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 자서전 글감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만 어떻게 잘 풀어내는지가 문제일 것 같네요.

mini74 2022-02-04 23: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제로 낙태 수술 하는 내용 너무 슬펐어요 ㅠㅠ 유대인들의 힘이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잊지않고 여유로움울 가지는 거란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대단한 분 !

거리의화가 2022-02-05 06:57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저도 그 부분 펑펑 울었어요. 차마 못할 짓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비관하지 말고 좀 더 밝게 보자 라는 생각도 했구요.
 

존재의 허무함이 존재의 의미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겪은 모든 시간과 경험은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안전하게 보관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무엇도 그것을 훼손하거나 없앨 수 없습니다. - P18

철학적인 사색보다 환경이 중요하죠. 다섯 살 무렵, 피서지 하인펠트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해요. 눈부신 아침이었는데,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거릴 때 나는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나를 행복하고 안전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잠든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 P19

수용소에서는 틈만 나면 한 줄이라도 책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니까요. 일분일초를 아껴서 의미 있게 쓰는 법을 그 시절에 몸에 익혔습니다. - P24

나는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도 빨리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낙천적이고 삶을 즐기는 기질을 타고 난 것 같기도 해요. - P27

미래를 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를 의미 있게 기억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 P28

나는 정신과 의사, 심리치료사로서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도 가치 있는 업적으로 바꾸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로고테라피는 바로 이런 확신의 토대 위에서 체계화된 이론입니다. - P53

사람들이 ‘비정상이다, 미쳤다, 바보다’라고 규정하는 그들의 말을 잘 들어보면 진실인 경우가 많아요. 나는 이것을 ‘로고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로고테라피는 모든 것을 병리학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맞서서 환자의 편에 설 것을 선포합니다. - P84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면서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 P9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 순간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 땅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어야겠다고. - P100

프랭클의 아내로서 잘할 것 같은 여자가 아니라, ‘틸리’라는 존재 자체가 참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휴는 왜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지.

그래도 많이 읽고 놀았다고 위안을 삼아본다.


주말엔 개인 시간을 보냈고

월요일에는 시댁 사촌동생이 집에 놀러와서 점심을 먹었다.

집은 어제 가려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건너뛰고 낮에 해떴길래 다녀왔다.

쉬는 동안 많이 먹어서 며칠은 좀 덜 먹고 움직여야겠다 생각했다.



1월 북 결산을 올려본다.


총 9권을 읽었다.

대체적으로 읽은 책들이 좋았어서 기분이 좋다.


1. 그 중 가장 재미났던 책은?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버치 중위를 통해 해방 후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미군정의 또 다른 시선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2. 도움이 된 책은? 남성됨과 정치

어려웠지만 얼마 남지 않은 대선 때문인지 시의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커지길 바란다.

















이번 달은 대변혁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대한계년사 7권과

지난 달에 구매해둔 책들을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p.s) 

민음사 일력을 샀는데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유해본다.

늘 슬픔을 참았던 경우가 많았어서 지나칠 수 없는 문구였다.


슬픈데도 슬퍼할 줄 모르면서

능히 도모하고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다.


정인보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픈 시」



그리고 검정치마의 Everything. 멜로디도 분위기도 좋아서 가끔 듣곤 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02-02 21: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읽으신 책들은 다 어려워 보이지만 재미있을거 같아요~!! 책들이 좋아서 기분이 좋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검정치마 저도 완전 좋아하는데, 전 Hollywood를 젤 좋아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02-03 08:11   좋아요 3 | URL
네 다 좋았던 책이에요. 책을 고를 때 여러 번 읽어도 괜찮을 책들을 사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가볍게 읽을 용도는 이북으로 읽구요.
검정치마 노래들이 다 좋아요. 저도 할리우드 좋아합니다^^

얄라알라 2022-02-03 07: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력이 지난지 4~5일 되는 경우가 자주있는 저로서는, 이렇게 일력의 문구까지 공유해주시는 부지런함에 리스펙트를~~. 거리의 화가님, 1월에 읽으신 9권 중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책은 없어보이는데 1월에 무려 9권이라니 독서 스타트가 좋으시네요^^

거리의화가 2022-02-03 08:42   좋아요 3 | URL
ㅎㅎ 일력 사놓고 1월 중 쌓인 경우가 많아요ㅠ 그래서 공유하는 겸 저도 챙겨보자 생각해서 올렸답니다.
소프트아이스크림. 찰떡 비유에 빙그레 미소가~ㅎㅎ 1월은 제가 생각해도 많이 읽은 달입니다. 제 기준에서 4~5권 정도 읽어야 정상인데 부지런히 읽고 쓴 것 같습니다. 이달은 짧은 달이라 어떨지 걱정이 되네요. 계획한 책들 읽으려면 헛둘헛둘해야할 것 같습니다. 북사랑님도 2월 독서 화이팅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2-03 1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차에서 검정치마 투데이즈 찾아 들으려다가 에브리씽 들었어요^^
오호~~음악적 교감이 하나 통했습니다ㅋㅋ
2월의 읽을 책들도 심오하군요!
암튼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2-03 13:02   좋아요 3 | URL
ㅎㅎ 검정치마 좋아하시는 분이 많네요.
저는 음색하고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의 멜로디가 좋아서 종종 듣곤 합니다.
투데이즈는 몰랐던 곡인데 들어보겠습니다^^ㅎㅎ
읽을 책이 좀 딱딱한 게 많지요. 그래도 이번달은 제 기준에선 말랑말랑한 책들을 넣는다고 넣었지만...ㅋㅋ
나무님이야말로 아이들 밥 해먹이고 교육시키고 쉬운 게 아니잖아요. 시간 쪼개서 책을 읽으시는건데 정말 대단하신거죠! 2월도 힘내서. 화이팅!

mini74 2022-02-03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거리의 화가님 리뷰 재미있게 봤어요. 좀 참았다 사야합니다 ㅎㅎㅎ 남성됨과 정치도 다들 평이 좋으신데 어려울 거 같아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2-03 22:16   좋아요 1 | URL
ㅎㅎ 북플에는 책사랑 지기님들이 많아서 구매력들이 다들 월등하시죠. 저도 지난달 너무 많은 구매로 이번달은 아직 자제중입니다…ㅋㅋ 남성됨과 정치는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그동안 배제된 여성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실 기회가 될 겁니다.
 

19세기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
철도, 선박부터 전보, 금융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중반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60년 동안은 전례없는 네트워크 형성의 시기였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1차 대전 중에 많은 네트워크가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수십년 동안 자기중심주의의 힘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덮는 네트워크의 형성을 ‘세계화‘라고 부른다면(화려한 색깔의 모호한정의이긴 하지만) 1860-1914년은 세계화가 뚜렷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우리는 두 가지 사례 - 대륙 사이의 인구이동과 식민제국의장——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 있다. - P1910

식민지 인도와 반(半)식민지 중국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나라는 자체적인 역량으로는 (민영이든 국영이든) 원양선단을 건설할 수 없었다. 이 방면에서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 아프리카의 특수한 예외였다. 아무리 늦어도 1918년 이전에 일본의 군용과 민용 조선업은 다 같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일본은 상업해운과 해상군사력에서 세계의 선도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민족 성공의 표지이자 동시에 성공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 P1916

교통의 역사에서 세계화로 나아가는 강한 흐름은 2차 대전 이후, 특히 비행기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 더 이상 정치인, 기업가, 부호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20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었다. 이런 발전의 기술적 기초는 항공 여객운송에 적용된 분사식 추진력이었다. 1958년 보잉 707 모델이 취항하면서 우리는 제트여객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19세기의 가장 대담한 환상으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한실이 되었다. - P1919

철도의 건설과 운행에는 강철기술, 기계제조, 채광, 통신, 지질, 교량건설, 터널건설, 기차역 설계, 공사현장 조직관리, 자금조달, 인사관리,
운행시간 조정 등 대량의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특히 철도사업이 아직 과학으로 자리 잡지 못한 초기에는 임시변통으로 해결책을 찾아내야 했다. 기술문제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해도 토지를 징발하고 보상해야 하는 법률문제가 동시에 등장했다. 이 밖에도 철도는 항상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는 정치적 화제였다. - P1921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은 소기업에게 특히 유리한 환경변화였다. - P1931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네트워크 접근권을 세밀하게 규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갖게 되었다. 이 매체가 처음으로 사용된 크리미아전쟁에서 영국과프랑스의 지휘관들은 군사지식이 별로 없는 민간정치가들이 함부로보내오는 모순된 내용의 전보더미에 파묻혔다. 전보는 공정한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계층질서를 만들어 냈고 고위 관료들만 그것에접근할 수 있었다. 국외에서의 협상은 당연히 수도의 본부로부터접 내려오는 지시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전권을 부여받은 노련한 외교관이 큰 틀의 외교를 연출하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P1932

노동력으로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유럽화된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이들은 상인으로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않고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더 힘든 일은 공업과 금융업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오직 일본만 이 분야에서성공했다. 일본의 공업은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미국에 맞서 점차로경쟁력을 갖추었고 일본의 무역과 해운회사는 일본열도를 벗어나먼 곳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 P194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 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 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P1951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세계에서 영국이 유일하게 이런 통화체계를 채택하고 있었다. 영국에 대응하는 라틴화폐동맹이란 통화체계가 얼마가지 않아요절하자 금·은복본위제는 사라지고 유럽 각 국가는 앞다퉈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독일은 1873년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같은 해에, 노르웨이는 2년 뒤에, 프랑스와 기타 라틴화폐동맹 가입국은 80년대에금본위제를 실시했다. - P1955

금본위제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가 같은 정도로 경제 메커니즘의 철칙‘에 굴복한 자본과 노동의 손을 잡은 경제질서의 규칙이자 상징이었다. - P1960

본질적으로 자본수출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신이었다. 1820년무렵, 해외 직접투자는 아주 소액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장악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필요한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차입국과 대출국 모두에서특수한 금융기구가 세워졌고, 신흥 중산층의 저축이 축적되었고, 해외투자 기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유동자산과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역사에 유례가 없는 혼합체가 사람들이 런던금융가라고 부르는 곳에 등장했다. - P1961

절대규모를 보면 지금은 백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지리적 분포는 넓어지지 않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세계의 자본네트워크는 무역네트워크나(1950년 이후의) 항공운수 네트워크처럼 고르게 두터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상당히 높은 정도로, 아프리카는 거의 완전히 자본의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 이에 반해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1913년에는 세계 금융체계의 주변부였던 지역(아랍산유국, 중국)으로부터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중심도시로 유입되고 있다.
20세기는 국제금융의 탈세계화를 목격했다. 가난한 국가는 1차 대전 전과 비교해서 외국자본 도입 경로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식민주의가 몰락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외국자본이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경제발전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P1967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채권자는 돈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금융제국주의가 국제금융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 P19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