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협은 고노 담화가 발표되자 곧바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잠시 일본 집에 돌아와 있던 터라 성명 작성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나, 성명문을 팩스로 받아일본어로 번역해 관련 단체에 송신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의 내용을 읽고 충격에 빠졌다. "위안부는 당시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국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서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성 노예였고, 일본인 위안부는 "돈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했고, 계약이 끝나면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수 있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성명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겪은강제성을 강조한 나머지, 공창(매춘부) 출신이 많았던 일본인 ‘위안부‘들과 비교해 그들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명에서 드러난 사실 인식은 잘못된 것일뿐더러, 위 표현은 일본인 ‘위안부‘가 매춘부 출신이므로 ‘위안부‘ 제도하의 성 노예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 P72
국민기금 정책은 일본 정부와 국민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에서 진행되었으나, 정대협은 처음부터 여기에 반대했다. 국민기금에서 피해자들에게 지불하는 것은 ‘위로금‘에 지나지 않는 바, 이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 단체들이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것은 타당할 수 있으나, 국민기금을 수령할지 말지는 피해자 스스로가 정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동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P76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에 있지 않다.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encière)는 끔찍한 일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 즉 인간성이 부정되는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한 표현을 다른표현으로 대체함으로써 ‘본래의‘ 말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사건의 감각적 직조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형상이다. 따라서 형상화된 것은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현존‘일 수없다. 그러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가시적인 것을 분 - P108
배하는 방식 내에 희생자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장치(apparatus of visuality)에 속한다. 이미지로 재현된 신체의 지위와 그 신체가 받아야 하는 주의) 유형은 그것을 규제하는 가시성의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 P109
영화감독 장뤼크고다르(Jean-Luc Godard)는 "트래킹 (tracking)은 모럴"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우리가 자리를 잡아서는 안 되고 타자대신에 결코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때역사 과정 속에서 멈춰야 할 지점을 인정하는 정직함이 필요하다. 두려움과 떨림의 태도 속에서 접근해야만 할 대상이 있으며, 성폭력이라는 주제 또한 분명 그러하다. - P121
<귀향>은 시각화 과정에서특정한 이미지 기호의 선택과 배제, 표백과 과잉 현존을 통해 ‘민족적 수난‘과 ‘순결한 소녀‘라는 의미망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 P137
일본군 ‘위안부‘ 운동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거나 후원 물품을 구매하는 데에는 ‘돕는다‘는 술어가 사용된다. 사회적 약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금전적·정서적 지원을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선한 의도‘는 소녀상을방문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굿즈를 구매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작은 일상적 행동이 ‘우리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민됨과 주체성을 확인하는 데 따른 효용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단체가 생활 지원 외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든가1993년 일본군 ‘위안부‘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생활 지원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보다, ‘우리 할머니‘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한다. - P168
국제정치학자 세라 버트런드에 따르면 안보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침묵에는첫 번째, 서발턴의 발화 행위를 억제하는 강제된 침묵, 두 번째, 서발턴을 위해 타인이 대신 발화하는 데서 생겨나는 침묵이 있다. 첫 번째 침묵은 다시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서발턴의 발화 자체가 억제되는, 발화 행위에서의 침 - P239
묵. 둘째, 서발턴의 발화 후 이를 들을 수 있는 청중이 없는 발화수반 행위의 좌절. 셋째, 서발턴의 발화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발화 수반 행위의 불능. 중요한 것은 이 중 두 가지형태의 침묵이 서로 결합해 효과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즉, 서발턴의 침묵이 강제됨에 따라 그것을 대신하는 발화가 나타나며, 이들을 대신하는 발화가 있기 때문에 서발턴은 스스로 발화 행위를 끝맺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 P240
배봉기는 전후 오키나와에서 살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야만 했던 순간 이전에는 전쟁 전과 전쟁 후의 삶에 대해 발화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령이었다가 전후 미국의 통치를 받은 오키나와에 ‘제국 신민‘으로 들어왔다가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던 배봉기의 역정은 결코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드러낸 이후 오키나와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청중이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그러한 청중이 형성될 수 없었다. 미국이 주도한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하 - P264
위 파트너로서 남한은 조총련과 관계 맺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금기시했다. 또한 배봉기의 죽음은 민단과 조총련 간 경쟁적인 ‘대신 말하기‘의 정치를 활성화했고, 이는 배봉기라는존재의 복합성과 귀향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복잡다단한감정을 단순화했다. - P265
램지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약이라는 합리적 경제행위에 참여한다는 주장을 게임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게임이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표방하고 있을 뿐, 논문에서 어떤 수학적 계산도 내놓지 않는다. 그가 표방하는 게임이론은 업소와 여성 간 "신뢰할 수 있는 약 - P286
속(credible commitment)"에 기반한 게임적 상황을 전제하는도구로 소환된다. 이러한 경제 논리는 게임의 규칙과 질서를지정하고 공유한 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존하고 있다.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모형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분석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이 생산될뿐 아니라, 지배적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기존의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주지의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동질화하고 일반화하려는 본질주의적 보편주의에 근거해 사람들 간의 차이를 배제와 차별의 이유로 자연화하고 정당화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 P287
리지웨이에따르면, 성에 대한 공통된 문화적 믿음으로서의 성별 고정관념은 사회에서 성별 관계의 물질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암묵적인 문화적 규칙, 다시 말해 공유 지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 지식이 다시금 사회적 관계와 게임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원리로 작동하면서 성별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이클 최에 따르면, "공유 지식은 집단적 조정을 도울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적 정체성, ‘상상된 공동체(imaginedcommunity)‘를 창출할 수도 있다." 램지어 논문의 주장은일본 우익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역사수정주의 집단과 결합하고 강화"되어 자신들의 입장을 집단화하고 있다. - P296
1991년 이전 ‘위안부‘ 담론은 당사자가 드러나지 않은채 주로 재현/표상(re-presentation)으로만 존재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재현/표상은 어떤 실재를 다시 (re, 再) 앞에 존재하게(presentation, 現)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표상은 문체, 수사적 표현법, 설명의 기교, 관습, 제도 등 역사적·사회적 여러 조건에 기반을 둔 표상 체계를 통해 생산되고 인식 주체의위치성과 이데올로기에 연루되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그대 - P388
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변형된 것‘으로서의 표상이 실재하는 대상을배제하고 표상 기술에 의존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야말로 표상이 존재를 대체한 가장 명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참전 군인의 회고 속에 등장한 ‘위안부‘나 이를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번역한 ‘위안부‘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재현 주체의 욕망과 당대사회의 성차별적 표상 체계에 연루된 것이며, 그러한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 · 증식되어 왔다. - P389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한 상황은 현재 한계에 다다랐다. 우선 신고와 등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승인받는 권위적일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형식이다. 국민기금부터 근래의 정의기억연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법적 등록이 ‘위안부‘ 피해 생 - P418
존자들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표현을 억누르고 단일한 대응을 강제하는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을 부인할수 없다." 또한 이는 ‘위안부‘ 운동의 대중화를 자극했던 문학/영화 텍스트의 서사 양식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꼭 정부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국적이라는 경계를 부여해 고통과 의미의 경중을 달리하는 인식의 형성에 부지중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419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피해국 위안부들의 상황은 한국의 여성운동의 성과로 드러나고 여러 나라가 활발하게 연대했지만,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증언과 가시화, 연구는최근의 일이다. 군 위안부 정책 전반에 대해 일본 정부가 ‘정부관여 부인‘을 ‘정부 관여‘로 바꾸게 만든 요시미 요시아키(吉見明)의 관련 자료 중에는 일본 정부가 자국 여성의 모집을 포함해 위안소를 통제하고 감독했음을 증명하는 문서가있다. 1938년 3월 4일자 ‘군 위안부 종업부(軍 慰安 從業婦)등에 관한 모집에 관한 건‘이 바로 그것이다. - P447
윤금이 투쟁은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NL) 계열 대학생들의 동원력과 열정에 힘입은 바 크다. 당시 공식적인 윤금이살해사건공동대책위원회(윤금이공대위)는 모두 20대 남녀 활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미군의 불의에 항거하고 미군 철수와 미군 범죄 근절을 외쳤다. - P451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의 인식이다. 기지촌 여성의피해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고, 피해 여성이 성산업 종사자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윤금이가 미군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가장민중‘인 기지촌 여성은 미 제국주의의 억압과 피해를 상징했다. ‘양공주 하나로 미군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진 이들조차 군 위안부와 기지촌 피해를 ‘혈맹‘에 따라오는 결과라고 주장했지, 강제와 자발로 구분하지 않았다. - P452
민족주의와 젠더가 맺는 관계는 상황적이다. 그것은로컬의 역사적 맥락과 해당 공동체 구성원의 행위성에 따라크게 달라진다.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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