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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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원치 않아요."
"이 사람들은 먹고 살아갈 쌀만 넉넉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말했다. "그들은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 않아요. 하루하루 무사히 지내기만을 원한다고요." (P210~211)

보통 한국인이 인식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기간은 1964년의 한국의 베트남 후방 지원, 1965년 본격적인 군사 지원 이후이다. 그러나 전쟁 기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었다. 1955년 11월 1일부터 시작된 전쟁은 1975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으니 말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찌민이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가 이에 불복하여(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소유하고 있었다)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패배, 베트남이 분단된 것까지 베트남 전쟁의 배경이라 따진다면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영향권에 있는 셈이다.

조용한 미국인은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기 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을 배경으로 한다. 때문에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레 향후 베트남의 암울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이후의 결과를 원치도 않았을 것이고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쟁사를 읽다 보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결단하지만 그 피해는 대중이 원치 않게 받는다. 일상은 대중에게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지만 전쟁은 살아갈 기반 자체를 모조리 파괴할 수 있고 후폭풍(언제 또 나를 공격할 지 모른다는 의심과 불신, 그로 인한 피해 망상의 발생)을 낳게 한다는 의미에서 결단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데도 경제적인 이득과 국가적 이익을 위해 전쟁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인간들을 생각하면 기시감과 혐오감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 이라는 제목에서 꽤나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미국은 20세기 전쟁사에서 많은 족적을 남긴 국가인데 '조용한 미국인이라니?' 미국인을 통칭해서 하는 말일까 궁금했다.


주요 등장인물인 파울러와 파일의 성향은 정 반대라 할 수 있겠다.
파울러는 종군 기자로 왔으나 기자정신이 없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건조해보이고 적당히 현실에 타협한 채 진지함이 없는 듯하며 무엇보다 심각한 일에는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난 그런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고요." 인간적인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라면 남들이 싸우건 말건 내버려 두고, 사랑을 하건 말건 내버려 두고, 하물며 살인을 저질러도 가만 내버려 둔 채 나는 끼어들지 말아야 했다. 나는 내가 본 사실들을 그저 글로 적어 보내기만 한다.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견해 또한 일종의 행동이므로(P68~69). 전쟁이 일어난 국가에 와서 2년을 지내다 보니 모든 게 시큰둥해진 것일까. 하긴 전쟁이 벌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니까. 하지만 후엉이라는 현지 여성을 만나 살면서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이 곳에서 어떤 사건이든 개입하지 않고 외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시니컬한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파일은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며 사회와 세계를 진단하고 분석한다. 그는 어느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대륙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말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P47). 파일의 대의는 지나치리만큼 거창하지만 그것이 옳은 대의라 해도 어떤 방법을 쓰는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과연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까.


당시 내가 베트남에 살아가고 있던 시민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았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군인을 구분할 수 없다.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이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해야한다니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믿을 수 없는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그래서 결국 신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무슨 종교를 믿든 이곳에서라면 안전하리라고 믿었다. "여기선 중립을 지켜야 해요. 이곳은 하느님의 영역이니까요."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길 잃고 가난한 백성이 춥고, 굶주리고 겁에 질린 채로 살아가는구나.' 신부가 말을 이었다. "위대한 왕이 이곳에 임한다면 이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 거라고 당신은 생각하겠죠." 하지만 나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디를 가든 다 마찬가지여서 - 가장 강력한 지배자의 백성인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진 않겠지.(P113~114)' 파울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왕국에서는 전쟁의 포화도 막을 수 있나? 보이는 인간도 믿을 수 없는 마당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신론자로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중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질문이 남는다. 한국전쟁에서도 이념이라는 허울 하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지금까지 앙금이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은 지나친 이상이 아닐까.
내 세상에서는 죽음이 유일한 절대 가치였다. 인간은 목숨을 잃으면 아무것도 영원히 잃지 않게 된다(P105).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고 무섭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불안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면 죽음이 슬프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 둘 잃어가는데 죽고 나면 더 이상 잃을 일이 없는 것 아닌가 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잘 알고, 내가 얼마나 속속들이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분명히 안다. (내 가장 큰 소망은 마음 편한 삶이며)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감촉으로 느낄 때면 나는 그저 불안하고 속이 몹시 메스꺼워져서 견디기가 어렵다. 때때로 순진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박애주의 정신이라고 착각하지만, 내 행동은-가령 내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일보다 소년병을 먼저 챙긴 선택은 기껏해야 훨씬 더 큰 어떤 선을 위해 작은 선 하나를 희생했던 데에 불과했으니, 오직 나 자신만을 생각해야 할 때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행한 선심의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P254). 적나라한 인간성의 묘사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내 마음이 편하기를 원할 뿐 타인에 대한 박애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한다. 인간은 결코 인류애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기적인 본성을 소유하되 이런 조그마한 선심성 행동들로 스스로를 덜 이기적이라고 위안을 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류는 결코 평화로워질 수 없는 것 같다.


순진함은 무모함과 결합하면 돌발적이고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순진한 사람이란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판단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실행하는 사람이라 무모하고 두려운 법이 아닐까. 하지만 의문도 동시에 들었다. 인간은 불완전한 법이라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고 오류가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한다면 이 세상에 남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제노사이드라는 끔찍한 단어가 떠올랐다.

'순진한 사람은 항상 죄가 없으니 순진함을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람들을 저지하려면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길 말고는 대책이 없다. 순진함은 일종의 광기다.'(P363)

"La liberté, qu'est-ce que la liberté ?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요?" -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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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20 16: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추카추카 ㅎ <토지>보다 오래 걸리신 거 아닌가효 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7-20 17:01   좋아요 1 | URL
유독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토지는 그나마 배경을 더 잘 이해하고 있어서 좀 더 빨리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3-07-20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엣남 전쟁에 대해 어려서부터 관심
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우리 세상을 만든 100대 소설이라는
문구가 눈길이 확 가네요.

1955년 작품이라고 하니, 미국이
개입하기 전 식민종주국 프랑스
와 맞짱을 뜬 시절의 이야기인가
보네요. 호기심 발동...

거리의화가 2023-07-20 17:05   좋아요 1 | URL
1952년 즈음으로 본격적인 냉전이 들어설 무렵이라 냉전 배경 소설이라고 익히 알려져 있더군요. 매냐님도 흥미롭게 읽으실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3-07-20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잠자냥님 리뷰로도 봤지만 참 표지가 안 어울리는 책이 아닌지..ㅎㅎ 인간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뇌가 담긴 작품일 것 같습니다. 화가님 완독 추카요~~^^

거리의화가 2023-07-21 10:03   좋아요 1 | URL
표지만 봐서는 책의 내용이 연상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의 숲과 밀림이 배경인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책의 주요 내용은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죠^^; 괭님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7-21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좋아하시는 화가님과 잘 맞는 소설인거 같습니다~! 저도 얼마전에 그레이엄 그린 단편집 구매했는데 이런 우연이! 역설적인 제목이군요 ^^

거리의화가 2023-07-21 10:06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읽은 것도 있어요. 저는 역사적 배경이 있지 않은 소설은 난해해서 읽기 어렵더라구요. 그린 단편집 새파랑님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나중에 공유 부탁드려요!^^

희선 2023-07-22 0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이 꽤 길었군요 전쟁이라는 건 알아도 그걸 자세하게 모르기도 하네요 제트남 남과 북이 통일을 하려던 전쟁이었다는 말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미국이나 한국은 미국 때문에 가야 했고... 남의 나라 전쟁으로 돈을 벌기도 하는 건 참 안 좋기도 하네요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사람이라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끔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나지만...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2 19:51   좋아요 1 | URL
네. 베트남 전쟁 순수 기간만 따져도 20년 동안입니다. 한국전쟁도 그 짧은 시간 안에 피해가 컸는데 베트남은 오죽할까 싶더군요. 책에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몇 차례 언급되어 놀라기도 했습니다.
 
토지 19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9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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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데서 인심 나더라고 밥 한술, 술 한잔 나누어 먹을 것이 없게 된 세상,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의지할 남정네 없는 젊은 아낙들 아이들, 이슬같이 서글픈 명줄이나마 잇기 위해 식량배급에만 매달려 있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원시세계로 돌아간 듯 일체를 생략하고 살았으며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례하는 것이 예사요, 장례식인들 무슨 수로 조문객 대접을 하겠는가. 징용 나가는 아들 남편을 위해 주먹밥이라도 몇 개 뭉치고 나면 식구들 죽그릇에서 푸성귀만 돌아야 했다. 극도로 이기적인가 하면 극도로 외로워하고 거리에서 직장에서 혹은 집 마당에서 기둥 뽑아 가듯 젊은이들을 잡아가지만 그것도 거의 일상화되어 울음소리 한숨 소리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배급을 받아 절반은 팔아서 다음 배급 탈 돈을 마련해놓고 배급의 절반으로 연명하는 기막힌 처지도 있었고 생산량이 날로 줄어만 가는 양조장의 술 찌꺼기, 두부공장의 비지조차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식량 배급소의 유세는 대단했으며 배급계 관리들은 살림이 윤택하여 태평성세였다. - P42

인간이란 의식주가 모름지기 중요한 법이다. 그 중에서도 먹는 행위가 가장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먹을 것을 뺏긴다? 먹고 살 길이 없어진다? 막막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먹을 수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 내 것을 뺏기지 않으려면 최소한 지키거나 남의 것을 뺏어야 하니 인심은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하층 계급의 이야기고 상층 계급은 없는 사람들을 더 착취하고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년도는 안 나와서 알 수 없지만 전시 체제 막바지임이 느껴진다. 아마도 1944년 무렵이 아닐까 싶다. 학병제는 진작 시작되었고 조선인 징용제가 시작된 것을 보면 말이다.

상부층은 협력을 해야만 조선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 논리를 리코딩하여 되풀이 되풀이하여 판을 돌리고 있었다. 열혈의 조선 청소년들이여! 국가 위난을 보고만 있을 쏜가,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라! 대군(大君)의 신금을 우리는 보위해야 하느니, 펜을 버리고 총을 들라! 오오 감읍(感泣)의 극(極)이로소이다. 폐하의 적자로 조선 백성을 안으신 그 크나큰 성은을 어찌 우리가 잊을 쏜가! 저 하늘의 태양이 영구불멸이듯 우리의 인군 또한 그 영광이 무궁하리, 오오 조선의 청소년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라! - P63

이광수가 每新에 새해 첫 날 발표한 시로 조선인들이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일장 연설해놓았다. 한문 해석하면서도 부들부들했다. 대체 그 좋은 머리 갖다 무얼 했는가. 그러면서도 나중에 본인은 억울하다, 해방이 될 줄 몰랐다 세례라니. 1940년 이후의 신문 기사를 찾고 싶었으나 이 무렵은 이미 조선, 동아일보 폐간으로 기사 자체가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광수를 비롯한 친일 지식인들은 연설회나 강연, 논문 등을 통해 친일 행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학병들을 동원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찬다.

<새해>(1944년 1월 1일 『每新』)
새해가 왔네.
地球(지구)가 처음 보는 偉大(위대)한 새해
貪慾(탐욕)의 地獄(지옥) 舊世界(구세계)가 무너지고
仁義(인의)와 禮(예)의 새 世界(세계)의 터를 닦는 새해.
太平洋(태평양)의 물결에 잔잔함이 돌아오고
亞細亞(아세아)의 天地(천지)에 復興(부흥)의 萬歲(만세)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날 새해.
기뻐라. 나는 이 새해를 보았어라
開闢 以來(개벽 이래)에 처음오는 偉大(위대)한 새해를
노래하는 나의 幸運(제군)이어
그러나 一億(일억)의 同胞(동포)여
이 해 새해는 또 땀을 많이 흘려야할 해.
農夫(농부)는 논밭을 갈기에 가꾸기에 일구기에 鑛夫(광부)는 땅속에서 파기에 깨뜨리기에 저내이기에
工夫(공부)는 공장에서 갈기에 두들기기에 漁夫(어부)는 바다에서 그물치기에 낚기 끌기에 男,女,老,少, 一億一心(남,녀,노,소,일억일심) 쉬일새없이 흘리는 땀이 日本의 國土를 흠씬 적실 때에- 오직 그 때에만야
榮光(영광)의 勝利(승리)는 오는 것이다.
이를 일러 一億 戰鬪配置 戰力增强(일억 전투배치 전력증강) 빛나는 새해 偉大(위대)한 새해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銃(총)을 메고
戰場(전장)으로 나가고
어여뿐 우리 딸들은 몸빼를 입고
工場(공장)으로 農場(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느들이 아닌가
千年和平 道義世界(천년화평 도의세계)를 세우랍신 우리 임금님의 命(명)을 받자와 ‘예’ ‘예’하고 집에서 뛰어 나오는 무리 이 날 설날에 半島三千里(반도삼천리)도 기쁨의 日章旗(일장기) 바다.
無限(무한)한 榮光(영광)과 希望(희망)의 偉大(위대)한 새해여! ;

징용은 처음에는 모집 방식이었으나 반응이 없자(시, 도에서 인원을 배분받았을텐데 인원 충족수에 거의 미달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강제 차출 방식이 되었다. 길에 가다가도 눈에 띄면 끌려가는 형편이었는데 이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을 원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어린 나이에 강제로 시집을 가는 경우도 빈번했다.

"조선인들 징용에 비하면 일본인 징용은 천국입니다. 조선인 노동자는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계지요. 일본은 언젠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도시락 싸들고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젊은 여자들, 그들이 불만에 차서 못 견디겠다, 못 견디겠다 하고 있을 때 전선에서는 마구 무차별로 끌고 온 조선 처녀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 심할 때는 오십 명 이상의 군인 놈들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유키코 얼굴에 피가 모여들었다. 수치와 분노였다. - P152~153

유키코의 수치와 분노, 오가타의 분노를 넘어선 절망 어린 반응을 보면서 이것은 식민지인 조선의 상황을 떠나 인권, 인류애로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졸지에 가해자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씁쓸함과 참담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말이야 차차 지 맘 내킬 때 하것지마는 지가 걱정하는 것은 핵교를 그만두는 일보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도 큰일이기는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 만치로 정신대에 뽑혀가지 않을까 그기이 걱정입니다." 정신대라 했을 때 남희는 강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어쩌면 그는 정신대 내막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대라 카믄 여자 보국대 말가."
"예, 수을찮이 처녀 아이들이 뽑히 나간 모앵인데, 이 동네서도 더러 나갔을 걸요?" - P35

국민징용령은 저항을 우려한 ‘모집’형식 노무동원이었는데 직업소개령에서는 이를 구체화시켜 6개의 관영직업소개소를 설치하고 보다 대대적인 노동력 동원을 강행하였다. 이때 조선인 노동자들은 「종업자이동방지령」「국민노무수첩법」등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39년부터 조선노무협회가 만들어지는 1941년 6월 이전까지의 강제동원은 명목상 ‘모집’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 모집에는 시종일관 국가권력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가해졌다. 즉 조선총독부, 경찰당국, 직업소개소 등의 긴밀한 연계와 계획 아래 사실상의 연행이 실시된 것이다.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행선지도 모르고 연행되었으며 연행된 후에는 강제적 노무관리에 의해 육체와 정신까지 구속되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때의 모집지역은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7개도였다. 1942년 3월 이후, 종래의 연행형식은 모집에서 이른바 관알선(官斡旋)으로 바뀌었다. 본부는 총독부에 있었고 지부는 각 도청에, 분회를 부·군·도에 둔 조선노무협회는 관청과 경찰, 일본 사업주가 파견한 노무지도원 등과 협력하여 강제연행을 수행하였다. 관알선은 44년 9월, 징용령이 적용되어 명실공히 강제연행이 시작되기까지 시행되었고 이 시기의 대상지역에는 ‘모집’시기의 7개도에다 강원도와 황해도가 추가되었다. 연행된 노무자들의 생활은 비참한 것이었다. 일본의 탄광노동조건을 예로 보면, 일본의 노동자들이 비교적 조건이 좋은 군수공장으로 이동하자 일제는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고 조선인 노동자의 도입, 여자 및 연소광부의 갱내 사용허가, 심야작업 금지의 완화, 광부의 취업시간 제한의 완화에 의하여 재생산을 꾀했기 때문에 그 악조건은 이입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대로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이 조선인 강제연행은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 또는 인하시키는 정책으로 이용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토지관리란 명목하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갖가지 훈련이 가해졌다. 그것은 조선현지훈련, 취로지 도착훈련, 황민훈련, 일본어 훈련, 작업훈련, 생활훈련, 체력훈련, 취로 후의 재훈련, 불량자 특별훈련 등 9가지 종류가 있었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10~12시간이었으며 아침밥을 먹은 후 갱내에 들어가면서 점심을 먹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을 때 “감독님, 죽여주십시오 일어설 수가 없어요”하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주(九州:큐우슈우 도요스)탄광의 한국인 합숙소 벽에 남아 있는 한글 낙서 중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는 절규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독립운동사 중 3)강제연행 中)

報道特別挺身隊(보도특별정신대)의 結成式(결성식)이 朝鮮神宮(조선신궁)에서 거행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침략 한국 36년 사 13권 매일신보 1944.2.1 기사 中)

"국민을 제물로 삼으려는 의도가 뭡니까?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본능 아니겠어요? 그 본능 때문에 눈이 어두워 이미 사리판단을 못하고 있어요. 만일 자신들이 죽겠다 한다면 국민은 살릴 수 있겠지요. 군부나 황실이나."
어쨌든 이들은 좋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다. (...) 침략과 약탈 덕분에, 저변의 그 많은 생명들이 남의 산하에 뼈를 묻어준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좋은 시절, 그렇다고 본다면 이들 역시 나라의 은공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숱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들 아닌가, 미묘한 심리적 딜레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를 성토하고 비난할 것인가. - P162~163

요시에이와 오가타의 대화는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졸지에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국민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은 자국을 욕하면서도 국가가 전쟁과 약탈에 힘을 쏟아 얻은 이익으로 특수를 누렸기 때문에 제 얼굴에 침뱉기라는 것을 느낀다. 내가 두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나라면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어서 술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오가타는 쇼지의 반쪽이 이 나라, 가난하고 핍박받는 조선의, 그 민족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 내 아들아! 너의 어머니는 바로 저 불쌍한 동족을 위하여 북만주, 네가 보고 싶어하는 황량한 벌판에서 지금 싸우고 있단다. 가해자로서 괴로워하고 있는 일본인, 나를 언제인가 아버지로 네가 받아들이듯 동족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의 여성도 언젠가는 네가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민족과 민족의 투쟁이 없어지고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투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지상에는 식민지라는 존재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 어머니와 나의 슬픈 사랑, 비극도 없어질 것이다.' - P192~193

오가타는 아들인 쇼지와 여행을 하면서 인실을 떠올린다. 어디선가 조국을 위해 독립 운동을 하고 있을 인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부군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경심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인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 마지막 권에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고통스럽고 힘든 세월이지만 이 때 인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조선의 민중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정면대결 해보아야 뭐 나오는 것 있어? 피장파장인데, 갈 때가 되면 가는 거고, 올 때가 되면 오는 거고, 팔다리에서 힘을 빼버리고, 바다 위에 떠다니는 해파리같이 사는 거지 뭐. (...) 온갖 잡신들이 한낮에 한길을 활보하는 세상, 평범하게 저속하게 진담 반 농담 반 그렇게, 아암 그렇게 살아야지." - P110

유인배는 나일성(송영광)에게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힘을 빼고 생활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광이 양현과의 관계에서 갖는 아픔만이 아니라 전선에 있는 위문 공연을 가서 웃으며 연주를 해야 하는 고뇌까지 적용되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더 나아가서 조선 민중들에게 건네는 메시지로도 읽혔다. 어느 편이든 극단은 살기 힘들었을 시기가 아니었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쥐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미친 것처럼 모든 것에 일희일비하고 목숨을 걸기에는 36년이란 세월은 참 녹록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곱씹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토지 19권은 큰 사건들이 있으나 모두 스포가 될 만한 사건이라 거론하기에는 그렇다. 대부분은 무거운 사건이었지만 스파이가 암살되기도 하고 동네를 쥐새끼처럼 훼방 놓던 놈은 쫓겨나는 일처럼 빛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 얼마나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그 둘도 죽어도 싸다, 맞아도 싸다 하기에는 찝찝함이 남는다. 어쨌든 그들이 해방 후까지 살아 남았다면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늘어놓는 이야기와 비슷한 변명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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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루쉰의 유물이다 - 주안전
차오리화 지음, 김민정 옮김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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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루쉰이 '문학가∙사상가∙혁명가'로 규정되면서 주안의 지위가 어정쩡해졌다. 루쉰은 문학혁명의 선구이자, 외치는 자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였지만, 그의 혼인이 중매결혼이었던 것이다. 루쉰 세대에게 중매결혼은 보편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루쉰이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1949년 이후 루쉰 연구가 전례 없이 중시되며 연구자들이 자료 발굴과 정리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유독 주안만큼은 배제되어 관심을 끌지 못했다. 특히 극'좌'의 시대에 루쉰이 신단(神壇)에 오르며 우상으로 봉해지자 주안은 더욱 기피 대상이 되어 루쉰 연구의 금기(禁忌)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루쉰 전기에서 주안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 P36

최근 들어서야 주안의 이름은 알려졌을 뿐 그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은 잊힌 존재였다. 루쉰의 문학, 사상적 위치 때문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녀는 왜 그동안 잊힌 존재여야 했을까.


중국 다섯 개 왕조의 옛 도읍이었던 베이핑(北平)도 떠들썩해서 고관대작이 구름처럼 모여 있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 곳곳에 널려있다. 하지만 베이핑 궁먼커우(宮門口) 시쌴타오(西三條) 골목은 떠들썩한 세상의 적막한 구석이다. 이곳은 연탄을 실어 나르는 차가 오가는 푸청먼(阜成門) 성벽 부근에 있으며 인력거꾼과 장인, 빈민이 뒤섞여 사는 곳이었다. 이 시싼탸오 21호의 작은 사합원(四合院)에 한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몸집이 왜소하고 얼굴이 좁고 길었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전족(纏足)을 하고 있어서 걸을 때 조금씩 비틀비틀헸다. 그녀는 명목상의 남편과 각방을 썼고 하루에 거의 세 마디만 나누었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부르면 '응'하고 대답하고, 자기 전에 북쪽 방 통로의 중문을 닫을지 말지 물으면 '닫아라' 또는 '닫지 말아라'로 대답했다. 간혹 생활비를 요구하면 '얼마나 필요한가?' 하고 묻고는 달라는 대로 주었다. 되도록 불필요한 말을 줄이기 위해 명목상의 남편은 갈아입을 옷을 버들고리의 뚜껑 위에 놓고 자신의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하인을 시켜 깨끗이 세탁한 후 버들고리 안에 잘 개어놓고 위에 흰 천을 덮어 자신의 침실 문 옆에 두었다. 이 여성은 바로 루쉰(魯迅)의 본처 주안(朱安)이다. - P6


주안의 주변의 사람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바느질과 자수에 능숙했으며, 예법을 잘 지켜 부모가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사랑했다." 주안 집안의 여자아이들은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는 것이 권장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규훈(조선 시대 '가훈' 같은)을 조금 읽을 뿐이었다. 1916년, 주안의 처가가 있던 사오싱에 간 쑨중산(孫中山)은 "사오싱에는 세 가지가 많다"라고 개탄했는데, 석패방(관아에서 절부와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많고 무덤이 많으며 분뇨통이 많다고 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주안이 살던 사오싱에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루쉰은 친한 친구인 쉬서우창에게만 다음과 같이 침통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어머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네. 나는 그를 잘 부양할 뿐 사랑 따위는 모르는 일이네."
가문과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루쉰은 주안과 결혼했지만 그는 며칠도 되지 않아 둘째 동생 저우쭤런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고 주안은 독수공방 처지가 된다.


루쉰의 어머니인 루 부인은 그들 사이에 정이 없고 부부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들이 왜 며느리를 탐탁치 않아 하는지 궁금해 했다. 루쉰은 "그 사람과는 대화가 안 통합니다"라고 말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가치를 지닌 환경에서 살아온 주안과 일본 유학을 하는 등 당시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혁과 진보를 외치던 루쉰은 맞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주안 입장에서는 외부의 잘 모르는 이야기만 하는 루쉰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을 테고 열등감은 커지지 않았을까.


루쉰은 일기에서 단 두 차례 주안을 직접 언급했는데(앞서는 1914년 11월 26일자 일기) 모두 그녀를 '부인[婦]'이라 지칭했다. '婦'의 본래 의미는 '결혼한 여자'로, '아내', '며느리' 등을 지칭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여성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婦'는 복종의 뜻을 지닌다. '婦'에도 아내라는 뜻이 있지만, '妻'가 가리키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다. 루쉰은 편지나 글에서 주안을 언급하며 '우처[賤內](천한 안사람)', '안사람[內子]', '부인[太太]', '큰마님[大太太]' 등의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제3자에게 주안을 언급할 수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자조적인 말투였다. - P185


루쉰은 초기 소설에 '신여성'에 대해 별로 쓰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이런 부류의 여성과 교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베이징은 신문화의 발원지로서 수많은 지식인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중에는 각지에서 배우기 위해 베이징으로 온 여학생들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는 5∙4신문화 운동 초기보다 '자유연애', 남녀의 사교에 대한 사회적 포용이 더 커졌다. 이때의 루쉰은 더 많은 여성과 접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루쉰이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의 강사를 맡은 후에는 여학생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녀들은 주안과는 사뭇 다른 신여성들이었다. 이 중 루쉰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게" 한 여성은 쉬광핑이었다. 그는 1926년 8월 26일 베이징을 그렇게 떠나 쉬광핑과 동거를 시작했다.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쉬광핑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남녀가 함께 살면서 당사자 외에는 그 어떤 부분도 구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의기투합해서 동지처럼 대하며, 서로 친밀하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를 신뢰한다면 어떤 상투적인 격식도 필요 없다. 우리는 일체의 봉건 예교를 타파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 자신은 항상 자립해서 먹고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니, 함께 살 필요가 없어진다면 곧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주안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아파했고 주변 사람이 그녀에게 앞으로 어떡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그분 뜻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좋아질 날이 올 줄 알았단다. 나는 담장 밑에서 조금씩 조금씩 위로 기어 오르는 달팽이처럼, 느리긴 해도 언젠가는 담장 위로 오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구나. 더 이상 기어오를 힘이 없어." - P233


루쉰은 상하이에서 쉬광핑과 10여년 간 동거한 끝에 1936년 10월 19일 사망한다. 루쉰의 장례식은 상하이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사망 당일 오후 만국(萬國) 장례식장으로 이송되어 빈소가 마련되었다. 각계 인사들이 루쉰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으며, 22일 오후 수천수만 명으로 구성된 장례 행렬이 그의 영구가 만국공묘로 운구되어 천천히 매장되는 것을 목송했다. 베이핑 집에도 20일부터 빈소를 마련해 조문 온 친지와 친구들을 맞이했다. 주안은 소복을 입고 향을 피우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 속에서 남편의 영혼을 추모했다. - P269


루쉰이 세상을 떠난 후 쉬광핑은 루쉰 전집의 출판과 편집에 전력을 다하여 그의 작품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이를 위해서 루쉰 전집을 출판하기 위한 저작권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부탁했고 루 부인은 동의했다. 주안은 쉬광핑이 저작권 수입의 일부를 부쳐 자신의 생계를 부양하는 것에 고마워했으며, 문제가 생기면 그녀를 찾아 상의하는 등 가족으로 여겼던 것 같다. 쉬광핑도 전쟁 막바지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모든 사람의 형편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방법을 강구해 생활비를 부쳐 그녀의 생활을 보장했다. 두 여성은 다른 삶을 살았으나 루쉰에 대한 애정만큼은 공통적이었다.


1947년 6월 29일 주안은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유언으로 남편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시즈먼 밖의 보복사에 임시 묘소에 묻혔다. 쉬광핑은 "노부인의 묘소 옆에 땅을 사서" 그녀를 루쉰의 어머니와 함께 반징촌에 있는 묘지에 매장하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 곁에도, 시어머니 곁에도 묻히지 못한 그녀의 묘는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의 '사구(四舊)'(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타파 운동 때 훼손되었다. 죽어서도 이런 취급을 받다니 참 너무한다 싶다.


주안은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우 선생은 나한테 결코 나빴다고 할 수 없어요. 서로 다투지도 않았고 각자의 삶을 살았을 뿐이죠. 저는 선생을 이해해야 해요." 그녀는 쉬광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쉬 선생은 제게 정말 잘해주었어요. 제 생각을 이해하고, 저를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부쳐주었죠. 그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주안이 루쉰과 차라리 붙들고 싸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둘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억지로 맺어진 연인지 모르겠다. 집안의 명에 따라 결혼을 한 주안은 평생을 시부모를 봉양하며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루쉰은 형식적으로만 그녀를 대했을 뿐 애당초 그를 부인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까운 그녀의 운명에 가슴이 쓰라린다. 이런 여성들이 당시에 얼마나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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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1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안의 삶이 역시나 처연합니다. 봉건적인 결혼제도는 참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것 같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쉬광핑 저 여자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군요.

거리의화가 2023-07-17 17:24   좋아요 2 | URL
저희 부모님도 중매결혼이셨어요. 몇 십년전만 해도 중매결혼이 흔했던 걸 보면 그 당시 분들은 참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 보고 자란 경험 때문인지 꽤 오랜동안 독신을 꿈꿨답니다.

미미 2023-07-17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의 변증법>에서 ‘사랑‘에 대한 대목을 읽다가 이 글을 보니 화도 좀 나고 마음이 복잡하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7 17:26   좋아요 1 | URL
이 책 읽는 동안 저도 좀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구요. 같은 여성으로서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어쨌든 이 책 덕분에 루쉰의 주변 인물들과 가정사 등에 대해서 알게 되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7-18 0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도 다르지 않았겠습니다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도, 공부한다면서 다른 데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 많았겠죠 남성은 그렇게 하는 건 비난하지 않아도 여성이 그러면 비난했겠네요 이런 건 지금도 아주 달라지지 않았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8 13:35   좋아요 0 | URL
네.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이 꿈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 너무 길었네요.
 
중국의 역사 : 송대 중국의 역사
스도 요시유키 외 지음, 이석현 외 옮김 / 혜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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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 시기의 역사를 훓어 읽다가 당, 송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확인해보니 번역되어 나와 있는 책들 중 마땅한 것이 없었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나 <신당서>, 송나라의 역사인 <송사>는 당시 쓰인 한문이나 오늘날의 중국어 번역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지만 차마 도전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당나라의 태종과 고종은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한데 고구려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서 엿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이번에 당나라의 문학 주요 장르였던 당시를 잠시나마 엿보았던 것은 수확이었다.
하지만 송나라의 역사는 뭐 하나 짚히는 것이 없이 두루뭉술했다. 그래서 찾아보다 만난 것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스도 요시유키와 나카지마 사토시다. 스도 요시유키는 1907년 생으로 동경대 문학부 교수를 거쳐 동양대 교수를 역임했다. 나카지마 사토시도 1907년 생으로 동경교육대 교수를 거쳐 대동문화대 교수를 역임했다. 둘 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연이 닿은 것인지 같은 책을 썼다는 게 공교롭게 느껴졌다. 일본 저자가 쓴 책이라 끌리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이 책은 2004년도에 현지에서 출간되었으나 번역은 2018년에 되었다. 2004년 한국을 생각해봐도 책에 고어나 한문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쉽게 쓰여진 책을 찾는 것이 드물던 시기다. 이 책도 그 무렵 편찬이 되었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 용어들이 해석되어 있지 않고 한문 그대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아 읽기가 까다롭다. 그래도 한글 옆에 한문이 있으니 원문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는 있다.


송나라의 역사를 생각 이상으로 세세히 다루고 있어 만족스러웠는데 특히 경제 파트가 그렇다. 송이 성립하고 남송 정권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다양한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중 압권은 지방 지주층들의 토지 점유 과정, 화폐 경제의 구조에 대한 설명,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개혁 내용이다. 기존에 읽었던 책들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지도와 표, 이미지 등을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 별점 3을 생각하다가 4를 준 이유)


송은 문인관료체제였다. 문인관료는 주로 과거시험을 통해서 발탁된 자들로 응시자는 지주층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황제의 권력 기반이었으므로 황제는 그들의 바람에 따라 (굳이 필요하지 않은) 관료들의 숫자를 늘렸고 다른 때보다도 관료에게 주는 대우가 후한 편이어서 국가 재정에 문제를 일으켰다. 문관 중심의 정치로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요와 서하, 뒤이은 금과 원까지 대응하는 동안 병사 수가 급증하여 국가 재정에 심한 압박을 가하게 된다.


신종 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은 생산력을 증진하고 재정난을 타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시행되었다. 신법은 주례 정신으로의 복귀를 표방하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사회진보의 방향과 합치되는 것들이 많았고 고위 관료와 결탁한 대지주, 대상인의 힘을 억제하고 군주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왕안석은 우선 청묘법을 시행하여 농민과 소작인에게 낮은 이자로 청묘전을 빌려주어 보릿고개 기간 동안 농민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지주의 고리대적 수탈을 방지하였다. 다음으로 면역법을 실시하여 차역의 무거운 부담으로 농민이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면역전을 징수하여 차역 담당자를 모집하고 지주들로부터도 조역전을 징수하여 겸병을 억제하고자 했다. 또 보갑법을 시행하여 농촌에서 보갑을 조직하고 도적을 잡아 농촌의 치안을 유지하고, 중요 지역에서는 교련을 실시하여 향병으로 활용했다. 보마법을 실시하여 말을 사육하여 군마로 이용했다. 조세 불평등에 대해서는 방전균세법을 시행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그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과세함으로써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했다. 또 농전수리법으로 강남에서 수리전을 대규모로 개발하고 제방을 축조하여 농업생산의 증대를 꾀했다. 북방에서는 어전법을 시행하여 많은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꾸었다. 균수법은 대상인이 상품값을 조작해서 이익을 챙기는 일을 막고 운수비를 줄여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실시된 시역법에서는 상인에게 낮은 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방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채경의 악정은 금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다. 송의 황족은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갔고 포로 신세를 면한 강왕이 송의 부흥을 지향하는 이들을 이끌고 남송을 세운다. 남송의 중심 세력들은 구법당 정치가들이었다.
남송시대가 되면 금과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주전파와 주화파 간에 의견 대립이 정치 주요 의제가 된다. 송은 종래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오랑캐라 천시했던 여러 국가들에게 압박을 당하고 여러 차례 화해를 해야 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한쪽에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이들, 다른 한쪽에서는 민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들로 나뉘게 된다. 서하, 금이 망하고 몽골이 등장하면서 남송도 멸망한다.


송대는 중국 사상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유교는 전통유학에서 새로운 유학인 신유학(송학)이 생겨났다. 송학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또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인쇄술이 발달하고, 나침반을 항해술에 사용하였으며, 화약을 병기로 사용하는 등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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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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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내 품사를 재배치하고 더 오늘날에 맞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지금의 독자가 읽기에는 더 수월해졌으나 길이가 다소 길어졌다는 느낌도 받는다. 노래하는 맛을 살린다면 이전 번역이 나을 듯도 보이는데 이는 독자의 선택이 될 것같다. 역자의 고민과 노고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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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1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844쪽 의 책을 읽으셨네요! 거리의화가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1 09:53   좋아요 1 | URL
ㅋㅋ 다락방님 오해십니다. 펀딩책이라 오늘까지 100자평 남겨야 해서 부랴부랴. 다 못 읽었어요 걱정마십쇼!ㅋㅋ

페넬로페 2023-07-1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어떨지 넘 궁금해요^^

거리의화가 2023-07-11 10:14   좋아요 1 | URL
기존 천병희 선생님이 하신 번역과 한 단락 정도 비교해봤는데요. 단어를 ‘분노->노여움‘ 이런 식으로 바꾸고 문장 내 배치를 더 이해하기 쉽게 변경한 듯 보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해는 더 잘 되는 것 같았어요. 물론 책을 전체를 다 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책읽는나무 2023-07-11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다 읽으신 줄 알았어요^^
지금 읽고 있는 <갈대 속의 영원>에 일리아스랑 오디세이아랑 뻑하면 제목이 나와요.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을 붙잡았을 때 장식장의 값비싼 보물과 독특한 보물상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보물상자에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를 보관하라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나도 언젠간 일리아스를 꼭 읽어 보리라! 생각만...^^;;;

거리의화가 2023-07-11 10:29   좋아요 1 | URL
ㅋㅋㅋ 펀딩 적립금 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3주 내 읽고 100자평을 써야 하는데 애시당초 불가능한 책인데다가 지금 다른 책 읽고 있어서 언제 읽을지 기약이 없었답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두 권 모두 예전에 천병희 선생님 역으로 완독했었어요.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또 멋진 문장들이 많답니다. 언젠가 나무님도 접해보셔요!

책읽는나무 2023-07-11 11:13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저도 북펀딩했던 책 100자평 썼어야 했는데....아!!!!!
날짜 지났나 봅니다.
6월말 경에 받았던 알림은 이미 지나가버려 찾을 수가 없군요!ㅜㅜ
저도 오늘이라도 얼른 써서 올려야겠어요^^
이젠 북펀딩 100자 평도 다 놓치고 있네요.^^;;

전 일리아스 예전 천병희 샘꺼 가지고 있어요.
옛날에 좀 읽다가 너무 등장인물이 많아서 헷갈려서 중간 포기했었네요.ㅜㅜ
다시 재도전 할 수 있을지 좀 두렵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1 11:23   좋아요 1 | URL
펀딩한 책 3주 내 못 읽을 거면 책 받은 즉시 올리는 게 좋겠더라구요. 잊어버리면 적립금 날아가는 사태가ㅠㅠ
일리아스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것 이미 가지고 계셨네요. 등장인물이 많기는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좀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판본은 좀 더 현대적으로 번역된 느낌이었어요. 나무님이 읽기에 좀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2023-07-12 0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사람이 읽기에 좋게 번역한 거군요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는 읽어봐야겠다 생각한 적이 없네요 가장 오래된 책, 이야기니 읽어보면 좋을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2 11:02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원전은 역자에 따라 늬앙스가 다르게 번역되어서 보는 맛이 있습니다. 저도 전문을 다 읽은 것은 아니여서 어떨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