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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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원치 않아요."
"이 사람들은 먹고 살아갈 쌀만 넉넉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말했다. "그들은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 않아요. 하루하루 무사히 지내기만을 원한다고요." (P210~211)

보통 한국인이 인식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기간은 1964년의 한국의 베트남 후방 지원, 1965년 본격적인 군사 지원 이후이다. 그러나 전쟁 기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었다. 1955년 11월 1일부터 시작된 전쟁은 1975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으니 말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찌민이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가 이에 불복하여(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소유하고 있었다)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패배, 베트남이 분단된 것까지 베트남 전쟁의 배경이라 따진다면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영향권에 있는 셈이다.

조용한 미국인은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기 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을 배경으로 한다. 때문에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레 향후 베트남의 암울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이후의 결과를 원치도 않았을 것이고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쟁사를 읽다 보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결단하지만 그 피해는 대중이 원치 않게 받는다. 일상은 대중에게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지만 전쟁은 살아갈 기반 자체를 모조리 파괴할 수 있고 후폭풍(언제 또 나를 공격할 지 모른다는 의심과 불신, 그로 인한 피해 망상의 발생)을 낳게 한다는 의미에서 결단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데도 경제적인 이득과 국가적 이익을 위해 전쟁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인간들을 생각하면 기시감과 혐오감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 이라는 제목에서 꽤나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미국은 20세기 전쟁사에서 많은 족적을 남긴 국가인데 '조용한 미국인이라니?' 미국인을 통칭해서 하는 말일까 궁금했다.


주요 등장인물인 파울러와 파일의 성향은 정 반대라 할 수 있겠다.
파울러는 종군 기자로 왔으나 기자정신이 없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건조해보이고 적당히 현실에 타협한 채 진지함이 없는 듯하며 무엇보다 심각한 일에는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난 그런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고요." 인간적인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라면 남들이 싸우건 말건 내버려 두고, 사랑을 하건 말건 내버려 두고, 하물며 살인을 저질러도 가만 내버려 둔 채 나는 끼어들지 말아야 했다. 나는 내가 본 사실들을 그저 글로 적어 보내기만 한다.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견해 또한 일종의 행동이므로(P68~69). 전쟁이 일어난 국가에 와서 2년을 지내다 보니 모든 게 시큰둥해진 것일까. 하긴 전쟁이 벌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니까. 하지만 후엉이라는 현지 여성을 만나 살면서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이 곳에서 어떤 사건이든 개입하지 않고 외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시니컬한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파일은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며 사회와 세계를 진단하고 분석한다. 그는 어느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대륙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말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P47). 파일의 대의는 지나치리만큼 거창하지만 그것이 옳은 대의라 해도 어떤 방법을 쓰는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과연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까.


당시 내가 베트남에 살아가고 있던 시민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았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군인을 구분할 수 없다.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이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해야한다니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믿을 수 없는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그래서 결국 신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무슨 종교를 믿든 이곳에서라면 안전하리라고 믿었다. "여기선 중립을 지켜야 해요. 이곳은 하느님의 영역이니까요."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길 잃고 가난한 백성이 춥고, 굶주리고 겁에 질린 채로 살아가는구나.' 신부가 말을 이었다. "위대한 왕이 이곳에 임한다면 이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 거라고 당신은 생각하겠죠." 하지만 나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디를 가든 다 마찬가지여서 - 가장 강력한 지배자의 백성인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진 않겠지.(P113~114)' 파울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왕국에서는 전쟁의 포화도 막을 수 있나? 보이는 인간도 믿을 수 없는 마당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신론자로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중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질문이 남는다. 한국전쟁에서도 이념이라는 허울 하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지금까지 앙금이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은 지나친 이상이 아닐까.
내 세상에서는 죽음이 유일한 절대 가치였다. 인간은 목숨을 잃으면 아무것도 영원히 잃지 않게 된다(P105).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고 무섭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불안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면 죽음이 슬프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 둘 잃어가는데 죽고 나면 더 이상 잃을 일이 없는 것 아닌가 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잘 알고, 내가 얼마나 속속들이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분명히 안다. (내 가장 큰 소망은 마음 편한 삶이며)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감촉으로 느낄 때면 나는 그저 불안하고 속이 몹시 메스꺼워져서 견디기가 어렵다. 때때로 순진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박애주의 정신이라고 착각하지만, 내 행동은-가령 내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일보다 소년병을 먼저 챙긴 선택은 기껏해야 훨씬 더 큰 어떤 선을 위해 작은 선 하나를 희생했던 데에 불과했으니, 오직 나 자신만을 생각해야 할 때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행한 선심의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P254). 적나라한 인간성의 묘사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내 마음이 편하기를 원할 뿐 타인에 대한 박애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한다. 인간은 결코 인류애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기적인 본성을 소유하되 이런 조그마한 선심성 행동들로 스스로를 덜 이기적이라고 위안을 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류는 결코 평화로워질 수 없는 것 같다.


순진함은 무모함과 결합하면 돌발적이고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순진한 사람이란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판단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실행하는 사람이라 무모하고 두려운 법이 아닐까. 하지만 의문도 동시에 들었다. 인간은 불완전한 법이라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고 오류가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한다면 이 세상에 남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제노사이드라는 끔찍한 단어가 떠올랐다.

'순진한 사람은 항상 죄가 없으니 순진함을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람들을 저지하려면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길 말고는 대책이 없다. 순진함은 일종의 광기다.'(P363)

"La liberté, qu'est-ce que la liberté ?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요?" -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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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20 16: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추카추카 ㅎ <토지>보다 오래 걸리신 거 아닌가효 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7-20 17:01   좋아요 1 | URL
유독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토지는 그나마 배경을 더 잘 이해하고 있어서 좀 더 빨리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3-07-20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엣남 전쟁에 대해 어려서부터 관심
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우리 세상을 만든 100대 소설이라는
문구가 눈길이 확 가네요.

1955년 작품이라고 하니, 미국이
개입하기 전 식민종주국 프랑스
와 맞짱을 뜬 시절의 이야기인가
보네요. 호기심 발동...

거리의화가 2023-07-20 17:05   좋아요 1 | URL
1952년 즈음으로 본격적인 냉전이 들어설 무렵이라 냉전 배경 소설이라고 익히 알려져 있더군요. 매냐님도 흥미롭게 읽으실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3-07-20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잠자냥님 리뷰로도 봤지만 참 표지가 안 어울리는 책이 아닌지..ㅎㅎ 인간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뇌가 담긴 작품일 것 같습니다. 화가님 완독 추카요~~^^

거리의화가 2023-07-21 10:03   좋아요 1 | URL
표지만 봐서는 책의 내용이 연상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의 숲과 밀림이 배경인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책의 주요 내용은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죠^^; 괭님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7-21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좋아하시는 화가님과 잘 맞는 소설인거 같습니다~! 저도 얼마전에 그레이엄 그린 단편집 구매했는데 이런 우연이! 역설적인 제목이군요 ^^

거리의화가 2023-07-21 10:06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읽은 것도 있어요. 저는 역사적 배경이 있지 않은 소설은 난해해서 읽기 어렵더라구요. 그린 단편집 새파랑님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나중에 공유 부탁드려요!^^

희선 2023-07-22 0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이 꽤 길었군요 전쟁이라는 건 알아도 그걸 자세하게 모르기도 하네요 제트남 남과 북이 통일을 하려던 전쟁이었다는 말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미국이나 한국은 미국 때문에 가야 했고... 남의 나라 전쟁으로 돈을 벌기도 하는 건 참 안 좋기도 하네요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사람이라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끔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나지만...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2 19:51   좋아요 1 | URL
네. 베트남 전쟁 순수 기간만 따져도 20년 동안입니다. 한국전쟁도 그 짧은 시간 안에 피해가 컸는데 베트남은 오죽할까 싶더군요. 책에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몇 차례 언급되어 놀라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