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유 - [할인행사]
최호 감독, 조승우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언젠가 비디오로 빌려왔다가 차일피일 미루다 보지 못하고 반납한 영화 <후아유>를 다시 빌려와서 보았다. 한마디로 안 봤으면 큰일날뻔했다. 오래전에 보고 기절할 뻔했던 <세 친구>만큼이나 좋았다. 더구나 주인공 이나영의 친구로 영화 <눈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조은지가, 조승우의 친구로는 <세 친구>의 삼겹 이장원이 나와 이 영화에 더 큰 재미와 리얼리티를 보태어 주었다.

서인주(이나영)는 전직 국가대표 수영선수, 지금은 청각을 잃어 보청기에 의지한 채 63빌딩 수족관에서 일한다. 매일 30층까지 계단을 뛰어서 오르는데 체력 훈련도 몸매 관리도 아닌 것이 그냥 먹먹한 기분으로 무작정 뛰는 것 같은 표정(자기 자신을 반쯤 죽여놓은 것 같은)이다.

같은 건물의 게임 개발 사무실에서 먹고자고 하는 지형태(조승우)는 거대한 수족관 속을 인어공주 복장으로 유영하는 서인주를 만나고 돌아와서 그녀가 바로 자신이 만든 게임 '후아유'에 별이라는 닉네임으로 가끔 나타나는 그녀임을 알게 된다. '멜로'라는 닉네임으로 게임 속 가상공간에서 별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며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는데......

무겁다면 무겁고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영화를 도리어 산뜻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건 전적으로 여주인공 이나영의 일견 맹한 듯 투명하기 짝이 없는 그 페이스(이건 꼭 영어로 써줘야 할 것 같은 기분)와 구멍 뻥뻥 뚫린 그물 사이로 새어나가는 듯한 그 묘한 말투에 기인하는 바 크다.

조승우는 또 어떤가. 게임 개발하는 젊은이답게 영악하고 현실적인 요즘 젊은이의 얼굴 속에 적당한 피로와 허무가 언뜻언뜻 보여 그게 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한 매력을 풍긴다. 한마디로 현실 속에 살아있는 캐릭터의 완성이다. 회의 도중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는다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투덜대자 그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월급에 목매지 말고 자신이 만드는 상품의 가치에 목을 매라구!"

'후아유'라는 영화 속 게임 같은 가상공간이 있다면 나도 가끔 그곳에 가서 노닐고 싶다. 그곳에서 별이와 멜로가 나누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괜찮을까? 조심해 친구, 인생은 사고야.(별)

--여어, 투명인간 친구. 언제나 네 옆에는 내가 있어. (멜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별이는 점점 게임 속 멜로에게 빠져들게 된다. 별이가 꿈에도 그리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호수라는 티티카카호수를 말이 떨어지자 말자 척 대령해 주고 모든 인생의 문제는 앞으로 그가 다  해결해 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투명하고 싶은데 현실 속에선 입을 꽉 다물고 도망만 가게 되는 그녀로서는 멜로의 등장이 꿈만 같고 반갑다.

그런데 가끔 꼬질꼬질한 몰골로 냄새를 풍기며 짠하고 엘리베이터 앞 같은데서 마주치는 지형태라는 남자는 별이의 꿈에 초를 친다. "모니터 뒤에 숨어서 만나는 친구들 다 변태야!" 하면서......형태는 별이가 목을 매는 멜로에게(그게 바로 자신인데)  맹렬한 질투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또 스스로 큰 혼란에 빠져 있다. 언제 어떻게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그 투명인간 친구라고, 멜로라고 고백해야 하는지......고백하는 순간 그녀를 잃게 되는 건 아닌지......

멜로가 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라이브 스피커 켜!" 라고 명령하고 기타를 가져와 고래고래 노래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제일 통쾌하고 가슴 설레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 음악 선곡도 참 좋다. 크라잉넛의 '밤이 깊었네'는 평소 내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데 겨울밤 거리에서 달리는 청춘의 백뮤직으로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내 모든 게 다 달라졌어요. 그댈 만난 후로 난 새 사람이 됐어요......" 조승우가 고래고래 직접 부르는 그 노래도 감미롭기 짝이 없다.

조승우가 이나영에게 자신이 멜로임을 밝히며 고백하는 대사도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 않아서 가슴에 와 꽂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해봤어. 그게 너야. (너는 자꾸 숨고 도망가지만) 넌 멋져. 최고로 멋진 친구야!"

게임방에서 진을 치고 아무 생각없이 개구장이 같은 모습으로 건들건들 살아가는 듯 보이는 청춘이라도 가슴속엔 저 혼자 아는 상처와 절망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감을 잃는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이제 모니터 앞으로 나와 진짜 사랑을 한다. 지지고볶고 때로 냄새나는 그 사랑을. 입김이 모락모락 나는 겨울 거리의 건널목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며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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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9-2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승우의 저 고래고래 노래부르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죠. 그 장면에서 말예요, 노래를 못 해도 전혀 상관없는 장면인데 노래를 너무 잘해버렸죠.. 어찌나 잘 부르던지, 감동감동..^^


2004-09-2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9-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그죠?
조경수 아들이라더니 정말 노래 잘하던데요.
이 영화 음악 선곡 참 잘했어요.^^

로드무비 2004-09-2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까지......매번......^^;;;

urblue 2004-09-24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실 케이블 TV로 왔다갔다하면서 보다 말다 했거든요. 조승우의 매력도 영화의 매력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네요. 님의 리뷰가 더 매력적이네요. 안그래도 조승우에게 푹 빠져서 이 영화 다시 보려고 했는데. 추천!

선인장 2004-09-24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형태, 나의 이상형... 클래식에서처럼 눈 먼 사랑을 하지도 않고, 와니와 준하 속에 나오는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캐릭터도 아니고,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깐죽거리고, 적당히 느글대는, 그 녀석...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이 영화를 보고, 완전히 조승우에게 꽂혔더랬죠. 그리고 장국영이 죽던 날, 일 년 만에 재상영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더랬죠. 지금도 가끔 우울한 날이면, 전 이 영화를 봐요. 63빌딩 아찔한 그 높이를 실감하면서요....

로드무비 2004-09-2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저는 겨울 거리에 두꺼운 스웨터 입고 나오는 풍경이 그렇게 좋아요.
조승우에게 관심도 없었는데 이 영화 보고 눈을 크게 떴다오.^^
선인장님, 맞아요. 적당히 지저분하고 깐죽거리고 느글대는 역할이었죠.
이거 테이프 하나 사야겠다 생각했어요. 저도.
가끔 조승우 노래 듣게......^^

바람구두 2004-09-2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한 번 봐야겠네요. 로드무비님의 취향을 확인해보는 차원에서라도...
어케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로드무비님 서재에 오면 제일 즐거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 고르게 포진해 있다는 거죠. 물론, 로드무비님을 포함해서....

바람구두 2004-09-2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추천... 흐흐.

내가없는 이 안 2004-09-24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생각지 않았던 영화인데 또 기억해둡니다. ^^
그런데 딴소리 좀 하면요, 어젯밤 로드무비님 말씀하시던 아일랜드를 그렇게도 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조금 봤거든요. 이나영도 이나영이지만 김민정의 대사는 왜 그렇게 떨리게 다가올까요? 또 이나영의 눈에서 눈물이 어슷하게 흐르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얼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김민정의 충혈된 눈에서 검은 눈물이 떨어지는 것도 감동이더군요. 웬 삼천포인지... ^^ 아무튼 조만간 조승우의 하류인생도 보려고 찜해두고 있는 터였는데 후아유까지... 스케줄이 꽉 찼습니다. 하하.

2004-09-24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량 2004-09-25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 개봉 다 지나고 누군가가 추천해서 뒤늦게 보게 되었던 영화였어요..
좋았어요..많이. ^^ (더 멋지게 말하지는 못하나..ㅜ.ㅡ)

로드무비 2004-09-2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제 취향이 궁금하세요?
이미 밑천을 다 드러낸 걸로 알고 있는데......
님이 며칠 안 나오셔서 저도 궁금했어요.
추천 고맙습니다.^^
이 안님, 저도 김민정 대사가 좋아요.
그 되라진 얼굴 뒤의 고독도......^^
불량유전자님, 그렇죠,뭐 좋다는 말밖에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속삭여주신 님,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DJ뽀스 2005-05-1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보고 극장문을 나설때 여자셋이서 얼마나 열광발광을 했던지..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 한마디로 조승우 열혈팬이 되어버렸죠. 마지막 부분에 좀 허전하긴 했지만 참 좋았던 영화입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책이 없어서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석간신문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 생각난다. 집에는 책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다 읽어치워버렸다. 열네다섯 살 무렵의 방학이었고 나는 읽을 것이 필요했다. 오죽하면 한자가 많아 읽기도 쉽지 않은 신문이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겠는가.

뉴욕에 사는 가난한 여성작가 헬렌은 1949년 영국 채링크로스 84번지의 헌책방에 이런저런 책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편지를 보낸다. 마크스 앤 Co. 중고서적은 희귀 고서들을 잘 찾아내는 걸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책을 부탁하는 입장에 있는 헬렌의 말투가 건방지고 너무 재미있다.

'프랭크 도엘 씨,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봄날도 다 가고 해서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키츠나 셀리는 사양이고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당신이 직접 판단해 주었으면 해요.'(1950년 3월 25일)

'그는 6달러에 뉴먼의 대학 초판을 구해놓고 능청맞게 묻는도다. 관심이 있느냐고.'(1950년 9월 25일)

헬렌은 입은 좀 거칠었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한 여성이었다. 2차대전 후 영국 서민들의 식량이 보급으로 근근이 유지되는 걸 알고 서너 번의 편지와 책이 오간 후일 뿐인데 햄덩어리를 사서 소포로 보낸다. 서점 식구들 나눠먹으라고. 그 후에도 헬렌은 달걀꾸러미니 혓바닥고기 통조림이니 바리바리 싸서 보낸다. 자신의 형편도 그리 넉넉지 않으면서......

'친애하는 한프 양, 프랭크한테는 제가 이 편지를 썼다는 걸 모르게 해주세요. 당신 편지나 소포가 자기 앞으로 오기 때문에 당신에게 편지하는 일은 자기만의 몫이라고 여기는 듯해요. 하지만 저도 꼭 한 번 직접 편지를 드리고 싶었어요.'(1950년 4월 7일 서점의 다른 직원 세실리의 편지)

소포로 온 음식물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나누면서 헬렌의 편지를 거의 독점하는(오죽하면 그 몰래 직원들이 헬렌에게 다투어 편지를 보내겠는가) 프랭크는 평소 점잖고 말수 적은 30대 후반의 사내.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프랭크의 아내 노라도 헬렌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점 직원들이 돈을 모아 선물한 리넨 식탁보에 수를 직접 놓은 이웃의 팔순 할머니까지 헬렌의 친구가 된다.

'친애하는 한프 양, 먹을 것으로 가득한 멋진 소포가 오늘 도착했구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원......난 생전 소포라고는 보내본 적도 없다오.'(1952년 3월 24일 식탁보에 수를 놓아 팔았던  팔순 할머니 메리 볼턴이 헬렌의 편지와 소포를 받고 감격하여 쓴 편지)

이 책을 읽어나가며 나는 헬렌이 서점 직원들에게 보내는 음식물 보따리와 헌책방에서 그녀에게 보내오는 책보따리가 나의 것인양 흐뭇하여 연신 입이 벌어졌다. 그들이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닌가.

헬렌의 책 취향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어차피 블레이크는 좋아하지 않아요. 걸핏하면 황홀경에 빠져들잖아요. 제가 말하는 건 존 던이에요.'

나 또한 평소 툭하면 황홀경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물끄러미 쳐다보는 유형의 인간인지라 헬렌 한프가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주 오금이 저렸다. 주문한 책이 도착했는데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다르자 "여기저기서 쓸데없는 것만 발췌해놓은 그 중뿔난 편집자들이라니!" 하면서 욕을 퍼붓는데 가슴이 뜨금했다. 나 역시 교정교열을 보면서 순전히 내멋대로 발췌하는 형식으로 일을 할 때도 없지 않았으니까.

'프랭키, 당신은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죽을 권리도 없다는 사실, 명심하세요!'

아아, 저런 식의 우정 표현이라니!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대사를 한 번만 하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리고 한 번만 들어봤으면......

'친애하는 헬렌, 네, 우린 아직 여기 있습니다. 갈수록 나이가 들고 바빠지지만  더 부자가 되지는 않는군요.' (1965년 11월 13일)라고 답장을 쓰던 성실한 서점 직원 프랭크는 어느 날 헬렌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저세상으로 가버린다. 헬렌에게 편지를 보내온 건 그의 아내 노라였다. 사실 그녀는 헬렌을 조금 질투하기도 했다고 그제서야 털어놓는다.

프랭크의 아내 노라의 편지도 참으로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편지친구가 여자라면 나 또한 그렇게 선선하게 웃으며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다'이다. 

헬렌과 프랭크는 20년 동안 그렇게 따뜻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살아서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다. 채링크로스의 책방에 갈 경비를 모으다 보면 헬렌이 치과에 가 뭉텅이 돈을 갖다바칠 일이 생기고 또 무슨무슨 일이 생기곤 했던 것이다. 헬렌은 가난뱅이였다. 늘 좀이 슨 스웨터에 모직바지를 껴입고 난방이 잘 되지 않는 낡은 아파트에서 책을 읽고 대본을 집필했다. 이 서간집을 발간한 이후 그녀의 이름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헬렌 한프에게서 저를 떠올렸다는 어느 예쁜 분이 어제 이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잘봐주셔서 너무 고맙구요,  저의 리뷰가 마음에 흡족한 답장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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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9-2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리뷰보고 저도 불현듯 로드무비님을 떠올렸답니다. 이 책 살까말까 계속 망설였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겠군요.

깍두기 2004-09-2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백, 베이베~
님은 잘 쉬셨는지 모르나 우리는 많이 기다렸다우.
리뷰를 읽으며 '이 여자, 로드무비님이잖아' 하다 보니 맨 밑에 보라색 글씨가 있네요. 나도 예리해^^

깍두기 2004-09-23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마디 더.
우린 님이 필요해요. 그러니 빈둥대지 마시라구요.
그리고 님은 제가 말하기 전에는 죽을 권리도.......(으하하)

superfrog 2004-09-23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 2004-09-23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기 전에 코멘트부터. 님, 보고싶었어요. 흑.

내가없는 이 안 2004-09-2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 책 출간됐네요. 굉장히 얇은 책 맞죠? 번역되기 전 이 책에 대한 정보 보고서 무척 흥미로웠는데... 읽다보니 정말 로드무비님이시네... ^^

로드무비 2004-09-2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이삼 일 서재를 좀 끊어보자 했더니 그게 글쎄 하루를 넘기기가 얼마나 힘든지......
채링크로스 읽고 나니 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하니케어님, 깍두기님, 금붕어님, 블루님, 이 안님 고맙습니다.^^

2004-10-01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0-0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잘하셨어요.
그런데 내가 정말 헬렌과 닮았다니!
기분좋아요.^^

icaru 2004-12-2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가난뱅이, 책, 거친 입, 낡은 아파트...



보관함으로 슈웅~~~
 

금요일엔 전영경 시인의 시(아, 황량)를 오래 된 수첩에 올리다가 코멘트가 어째 술 이야기로 빠져버렸다. 대구뽈탕에 뽈찜에 당장이라도 종로 뒷골목에서 모일 것처럼 수다를 떠는데 세상에, 우리의 수암님까지 가세하시는 게 아닌가! 그 골목 빈대떡이 뭐 어떠시대나!

그날은 마침 술마시기 딱 좋은 날, 금요일 저녁이었다. 한달에 두 번은 꼭 가는 동네 꼼장어집에서 퇴근한 동생 부부랑 남편이랑 꼼장어구이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술이 엄청나게 달았다. 움직이기도 귀찮고 그냥 그집에서 전어구이를 시켜 술을 계속 마셨다. 숯불에 구운 전어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세살짜리 조카녀석이 제 엄마 품에서 자길래 집으로 데려다주고 우리는 딸아이까지 데리고 포장마차에 갔다. 즉석에서 회를 쳐주는 집인데 우리는 소금구이 새우를 세번째 안주로 골랐다.

남동생이 내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 봤다고 했다. 제 누이가 밥먹다가도 슬그머니 나가서 컴퓨터 앞에 앉고 하는 꼴을 몇 번 보더니 조금 궁금했던 모양이다. 녀석과 지 마누라  흉 안 보기를 잘했지.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책장수님에, 부산 사는 여동생에, 이제 남동생까지......나는 알라딘에서 빼도박도 할 수 없다. 아, 방을 하나 새로 만들어야 하나?

맥주를 사들고 와 집에서 계속 마셨다. 모처럼 아주 뽕을 뺐다. 몇 년 전 나와 어쩌다 헤어진 친구가 있는데 며칠 전 일 관계로 연락을 했더니 내 남편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다짜고짜 울더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울었다. 남편이 연락할 마음이 없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냐고......우는 건 우는 거고 상관하지 말라고......

이 나이쯤 되면 사람 관계 맺히고 닫히는 일 없이 잘 풀려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똑같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만들면 안되겠다. 나는 사람 때문에 우는 게 낭패스럽고 민망하다.

토요일은 숙취로 하루종일 엎드려 있다가 오후에서야 꼼지락거릴 수 있었다. 오래 전 읽었던 윤태호의 <로망스>가 눈에 띄길래  꺼내어 읽고 30분 만에 리뷰를 하나 써제꼈다. 뿌듯했다. 공친 하루가 아닌 것이...... 그리고 어제 아침엔 신경림 시인의 산문집 리뷰를, 또 오후엔 알라딘에 주문한 책이 도착하여 <나른한 오후>를 읽자마자 흥이 올라서 또 리뷰를 썼다. 맹세컨대 리뷰를 쓰려고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서재순위 30이나 적립금 5000원이 머리속에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늘 아침 서재순위를 확인하니 아홉 번짼가 열 번째다. 별로 무리한 것도 아니었는데 사실은 무리였던 것일까?  왠지 자기 자신에게  질리는 기분이 든다. 머리도 무겁고 코도 맹맹하고.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겠다. 책을 읽고 별 흥이 없는데도 리뷰를 쓰겠다고 낑낑대지는 않겠다. 이것이 오늘 아침 나의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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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9-20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아... 암튼 서재 순위에 올라가시는 분들 보면 그냥 대단하단 생각뿐입니다. 로드무비님 어제 올리신 리뷰 다 멋있었어요. 그런데 저도 뭔가 경험을 하나 하고 나면 서재에 글을 써야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요. ^^ (물구나무선 당나귀, 아이 이쁘다.)

▶◀소굼 2004-09-20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요르녀석..푸우에서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
리뷰쓰려고 책읽는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전;;둘다 못하고 있다는- .-;;
다행히 전 가족들한테는 알라딘은 아직 모르는 곳이라;;홈페이지 쪽은 다 알아버려서 자멸상태-_-;

로드무비 2004-09-20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소굼님, 저도 이요르 제일 좋아해요.
좀 멍청하게 생긴 아해들이 좋은 건 동병상련의 뜻이랄까.

2004-09-2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술빨이었어~~^^:;; 리뷰를 쓰려고 책을 읽으면 스트레스죠..즐거움이 아니라..책을 즐겁게 읽어도 리뷰가 안써질 때가 있고 책을 그냥저냥 읽었는데도 리뷰가 술술 나올 때는 허걱 이 구라를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고민하게 되죠..음 암튼 가을 전어 냄새가 여기까지 풍겼다는 사실만 알아 주십쇼..오늘 날씨 구리구리하네요..폭 쉬세요.

아키타이프 2004-09-2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고 제일 난감했던게 <리뷰>에 대한 압박이었습니다.
책을 읽을때는 : 집중해서 얽고 리뷰 적어야지(헉-_-;;), 라는 머리속에 꼬릿표가 붙어서 책읽다가도 내가 좋아서 읽는건지, 리뷰를 적기 위해서 읽는건지 혼란스러워서, 그 혼란이 더 마음을 어지럽혀서 진작 저만의 글읽기가 안되고 있다지요.
알라딘를 좀 등한시 하는 경향이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좀 귀여운 변명 아닌가요(헤~)

_ 2004-09-2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는 10편당 5천원때문에 썼다가, 그러다가, 이주의마이리뷰를 노렸다가, 다음에는 구 명예의 전당을 노리면서 리뷰를 써나간거 같아요. 그러다가, 한계점에 다다러서, 푸웅~하고 가라앉아버렸고, 저도 이제는 책을 보고, 뭔가 기억에 남는 책만 남기고 있습니다. 목적의식을 버렸지요. 서재를 잠시 떠나 있는동안 있었던 개인적인 일들을 그냥 책과 연관시켜 적어내고(다수에게 공개하는 리뷰로는 분명히 부적절함을 알지만;) 있었는데, 이제 그것도 바닥이 나나 봅니다. 크흐,

바람구두 2004-09-2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나는 왜 쓰는 거지? 흐흐. 노리는 게 뭘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superfrog 2004-09-2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밑으로 툭, 떨어지고 나니 홀가분해요..^^
이제 숙취는 다 사라진 거죠? 비오는 오후가 스산하기만 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로드무비 2004-09-2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맞아요. 술빨로 주말에 리뷰 세 편 썼어요. 그런데 님은 뭔빨로 그렇게
많이 쓰셨대요? 흥=3 잘 쉬고 있어요. 저녁에 전어 사서 드세요.
가하님, 리뷰 쓰기 거시기하면 페이퍼 쓰심 되잖아요.
알라딘에서 님이 틀어주는 음악과 얘기 더 많이 듣고 싶어요.^^
바람구두님, 자기만족이든 뭐든 사람들마다 노리는 게 있으니까 긁적이는 거겠죠.
그런데 님은 글 안 쓰시면 안 될 분 같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릴게요.
(부탁 받고 글쓰면 저는 기분좋던데......)
금붕어님, 술...그거 괴로워요.
감기가 옴팡지게 걸렸습니다.
자업자득이죠, 뭐.
금붕어님도 쾌적한 오후 보내세요.^^
 
나른한 오후 샘터만화세상 4
마정원 지음 / 샘터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오늘 오후 나는 이희재, 박흥용 등 리얼리즘 만화의 계보를 잇는 무서운 신인이 나타났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른한 오후>를 읽고나서이다.

얄팍한 만화책 한 권이 무려  8000원. 비싼 책값 때문에 주문을 잠시 망설였지만 조금 전 배달되어온 <나른한 오후>를 나는 기분좋게 30여 분 만에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이걸 리뷰로 쓸까, 짤막한 페이퍼로 쓸까 잠시 망설이다가 리뷰로 쓰기로 한다. 이 책이 준 진한 감동과 여운을 한 장의 엽서로 처리해 버리기엔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 것이다.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만화 부문 초대 당선자인 마정원은 1979년생. 이 책 맨 앞장 작가의 말을 보니 말수가 적고 차분하고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든다.

"우리 가족 네 명 모두가 막노동을 하러 나간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출근길, 새벽 일찍 일어나 허겁지겁 입속에 우겨넣던 토스트의 맛, 그리고 점심때면 밥대신 술이 힘이 난다며 식권으로 막걸리를 받아 마셔버리고는 취기에 의지해서 일하시던 아저씨......"

책 맨 앞의 '나른한 오후'라는 단편은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년에게 누나를 잘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며 자장면값으로는 꽤 두툼한 지폐를 건네주나 했더니 막노동꾼으로 보이는 그 아버지 바로 열려 있는 창문으로 몸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자식들 눈앞에서...... 창밖은 바로 청계천 고가 부근. 개발이니 뭐니하여 하루아침에 철거가 이루어져 그 일대의 주민들이 생계의 터전을 잃은 바로 그곳이다.

이희재의 만화 주인공 악동이가 좀 터프하게 자란 것 같은 인상의 소년은 이제 내일 모레면 철거될 낡은 아파트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누나를 돌보아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 소년이 알바를 나간 동안 같은 아파트의 못돼먹은 녀석들은 그 누나를 데리고 나쁜 장난이나 하고......어느 날 등에 칼을 맞은 노인 사체가 발견되는데......

두번째 이야기 '과꽃'은 바로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이다. 벌이도 신통치 않은 주제에 맨날 술만 퍼는 남편......학교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일어나라고 아침마다 아이 방 앞에서 고함을 치는 엄마, 그런데 그것이 모두 그녀의 환상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이를 잠시라도 잃어본 엄마라면 그 심정을 알 것이다. 우리 딸아이가 세 살 때 일이다.  어느 날 외출을 했는데 우리 부부가 한눈을 파는 사이(서로 아이를 데리고 있겠지 믿었던 것) 거짓말처럼 아이가 없어졌다. 시간상으로는 약 40여 분. 나는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20분 전쯤에 아이가 앞만 보고 뛰어가더라는 가게 아저씨의 말을 듣고 목이 터져라 아이 이름을 부르며 달리노라니 순식간에 아래위 입술이 하얗게 말라붙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경찰차가 아이를 태워 데리고 있었고 40여 분 만에 우리 모녀는 감격적인 상봉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아이를 찾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바로 <과꽃> 속의 미진이 엄마처럼 되지 않았을까?

앞의 두 작품에 비해 그래도 약간의 온기를 전해주는 것이 '첫눈 내리던 날'이다. 조그만 트럭을 끌고 다니며 적당한 장소만 보면 보따리를 풀고 만 원짜리 옷을 파는 한 노점상 아저씨,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를 미워하고 그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딸 송이와 그녀의 유일한 친구 미령이......아주 스토리를 절망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듯하더니 고맙게도 이 작가 조그만 주머니난로 하나를 우리 독자들에게 내미는데.....

이 책의 맨 뒤에는 '우리 이웃 사람들'이라고 하여 작은 갤러리의 문이 열려 있다. 각양각색으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들과 함께 청계천에서 커피 파는 아줌마, 장사가 안되니 낮부터 취해 있는 행상, 까치둥우리 머리의 노숙자 등의 사실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속'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아저씨도 이렇게 개인적으로 앉아있으니 얼마나 인자하고 푸근한 모습인지......나는 대한민국 청계천이란 곳을 소재로 하여 이토록 무겁고 어두운 작품을 들고 나타난 이 패기 만만한 젊은 작가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난로 정도의 그 온기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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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걸프렌즈> 빌려드릴 때 함께 내놓겠습니다.
좋은 책 나누기 차원임돠.^^

2004-09-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먼저 찜합니다. 찜~!! 오늘 하루 종일 왜 이러십니까..증말루, 무셔워요ㅡ.ㅡ;:

깍두기 2004-09-1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 오늘 대여점 갈 때 알아봤는데요 걸프렌즈 없대요. 그러니까 빌려줘요~^^

마냐 2004-09-19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그죠, 마지막 작품이 약간의 온기를 주는게 고맙죠....두번째까지 하두 가슴이 무거워서...

내가없는 이 안 2004-09-20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빌려주신다고 해서 추천하는 건 아닙니다. ^^

로드무비 2004-09-20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깍두기님...헤헤헤
마냐님, 덕분에 좋은 만화 읽었습니다.
님의 리뷰 아니었으면 언제까지 보관함에 처박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깐요.^^
이 안님, 추천 고마워요.^^

아영엄마 2004-09-2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 (저 역시 공원에 갔다가 아이를 두시간 가까이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답니다.)

로드무비 2004-09-2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큰애요, 작은애요?
몇 살에 잃어버리셨는데?
어떻게 찾았어요?

아영엄마 2004-09-2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신 것도 많으셔라.. 답글 달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니 조만간 페이퍼에 써서 올립지요..
 
바람의 풍경
신경림 지음 / 문이당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의 풍경>은 신경림 시인의 첫 자전적 에세이집이다. 자기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쓴 글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무조건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십몇 년전 그의 산문집<한밤중에 눈을 뜨면>을 누워서 읽다가 후다닥 일어나 앉은뱅이 책상 앞으로 다가가 정색을 하고 읽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이 책을 읽었다. 신경림 시인의 글들은 항상 나를 소스라쳐 일어나게 만든다. 서정과 생활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까. 그러한 시를 쓰신 더 오래 전 시인으론 백석 시인이 있다.

인사동 술집 평화만들기에서 신경림 시인을 뵌 적이 있다. 그 술집에는 조그만 방이 하나 따로 비밀서랍처럼 달려 있는데 시인은 벽에 기대어 발가족족한 얼굴로 지인들과 흥겹게 어울리는 중이었다. 노랫소리도 흘러나왔다. 신경림 시인이 술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또 한번은 당주동 민예총 사무실에 원고를 직접 받으러 간 일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흠모하던 시인이라 나는 바보같이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원고만 받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신경림 시인은 35년생인데 신기하게도 소년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작가의 말)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린 후 일단 책장을 덮었다가 두 편의 산문을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제목은 '내 이십대의 끝'과 '서울 속 시골에서의 한철'이며 각각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십대는 실의와 좌절의 나날이었다."

"서른에 결혼을 했다."

신경림 시인의 젊은 시절 하면  혹독한 가난과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로 정리된다. 하기야 요즘 젊은이들도 앞이 보이지 않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지독한 가난과 방황을 이상하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읽게 된다는 데 신경림표 글의 묘미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시엔 가난에도 어떤 분위기와 격조가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시인 지망생들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그들은 밥을 굶을망정 세상에 대고 호기를 부릴 줄 알았다. "이까짓 게 뭐라구!"하면서 마지막 남은 지폐를 찢어 난로 속에 불쏘시개로 집어넣질 않나,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며 단벌외투도 서슴없이 번어던져 버리는 등. 그런 친구들을 보며 소심한 청년 신경림은 가죽장갑을 잃어버리고 며칠째 남몰래 애태우고 있는 자신의 옹졸함을 부끄러워 한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1956 <文學藝術 >발표. 시 '갈대' 전문)

나는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소심한 시인의 자기 고백이 오히려 미덥고 좋다. 생활이 묻어나서 더 좋다. 그토록 용감무쌍하고 무모하기까지 하더니만 시인은커녕 거지로 삶을 마감했다는 '이현우'라는 기인 친구도 가슴 떨리도록 좋다. 그야말로 예술가였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언제까지나.

<바람의 풍경>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자주 가던 시금털털한 막걸리집과 시장통 국밥집과 도라무깡 난로가 있던 대학 강의실과 석탄 캐는 막장의 어두운 통로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것은 꼭 보고 싶고 맡고 싶던 삶의 풍경이며 그리운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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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9-1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애정어린 서평이네요^^

에레혼 2004-09-1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야말로 아침부터 왜 이러세요?
하기는 요즘 시가 읽히더군요, 입맛 돌듯이 자꾸 땡겨서 저도 시집이 있는 책장 앞을 자주 서성거립니다.
신경림 시인, 저도 두 번쯤 뵌 적 있는데, 장식이나 허영이 없는 정갈하고 담백한 분이지요.
시인의 산문집... 읽어보고 싶네요. 좋습니다......

2004-09-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정신 차리셔요~ 네~! 일요일 새벽부터 왠 일이시랍니까...시인의 자전적 에세이라니, 읽을 책이 늘어만 가네요. 님들 모두 미워욧! 전 가을에 놀러 댕겨야 한단 말여요..앙앙

내가없는 이 안 2004-09-20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우물쭈물하고 소심한 시인의 자기고백이 더 미덥다는 말, 저도 동감합니다. 호기있는 목소리는 어쩌면 자신없음을 감추고 있는 편이 많지요. 로드무비님, 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시 속의 사람도 함께 사랑하는 분 같아요...

로드무비 2004-09-20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산책님도 신경림 시인 좋아하시는가봐요?
반갑습니다.^^
라일락와인님, 어제 오전에 한 개 오후에 한 개 리뷰 써서 올렸더니
모두들 왜 그러느냐고... 게으름뱅이 로드무비로 다시 돌아가야겠어요.
참나님, 누가 놀러다니지 말래요? 아무도 안 붙잡습니다.^^
이 안님은 사람을 참 기분좋게 해주시는 분이에요.
저는 뭐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인간인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잉크냄새 2004-11-15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잘 쓰셨네요. 옆에서 조근조근 신경림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듯한 기분입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아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