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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책이 없어서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석간신문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 생각난다. 집에는 책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다 읽어치워버렸다. 열네다섯 살 무렵의 방학이었고 나는 읽을 것이 필요했다. 오죽하면 한자가 많아 읽기도 쉽지 않은 신문이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겠는가.
뉴욕에 사는 가난한 여성작가 헬렌은 1949년 영국 채링크로스 84번지의 헌책방에 이런저런 책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편지를 보낸다. 마크스 앤 Co. 중고서적은 희귀 고서들을 잘 찾아내는 걸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책을 부탁하는 입장에 있는 헬렌의 말투가 건방지고 너무 재미있다.
'프랭크 도엘 씨,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봄날도 다 가고 해서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키츠나 셀리는 사양이고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당신이 직접 판단해 주었으면 해요.'(1950년 3월 25일)
'그는 6달러에 뉴먼의 대학 초판을 구해놓고 능청맞게 묻는도다. 관심이 있느냐고.'(1950년 9월 25일)
헬렌은 입은 좀 거칠었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한 여성이었다. 2차대전 후 영국 서민들의 식량이 보급으로 근근이 유지되는 걸 알고 서너 번의 편지와 책이 오간 후일 뿐인데 햄덩어리를 사서 소포로 보낸다. 서점 식구들 나눠먹으라고. 그 후에도 헬렌은 달걀꾸러미니 혓바닥고기 통조림이니 바리바리 싸서 보낸다. 자신의 형편도 그리 넉넉지 않으면서......
'친애하는 한프 양, 프랭크한테는 제가 이 편지를 썼다는 걸 모르게 해주세요. 당신 편지나 소포가 자기 앞으로 오기 때문에 당신에게 편지하는 일은 자기만의 몫이라고 여기는 듯해요. 하지만 저도 꼭 한 번 직접 편지를 드리고 싶었어요.'(1950년 4월 7일 서점의 다른 직원 세실리의 편지)
소포로 온 음식물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나누면서 헬렌의 편지를 거의 독점하는(오죽하면 그 몰래 직원들이 헬렌에게 다투어 편지를 보내겠는가) 프랭크는 평소 점잖고 말수 적은 30대 후반의 사내.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프랭크의 아내 노라도 헬렌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점 직원들이 돈을 모아 선물한 리넨 식탁보에 수를 직접 놓은 이웃의 팔순 할머니까지 헬렌의 친구가 된다.
'친애하는 한프 양, 먹을 것으로 가득한 멋진 소포가 오늘 도착했구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원......난 생전 소포라고는 보내본 적도 없다오.'(1952년 3월 24일 식탁보에 수를 놓아 팔았던 팔순 할머니 메리 볼턴이 헬렌의 편지와 소포를 받고 감격하여 쓴 편지)
이 책을 읽어나가며 나는 헬렌이 서점 직원들에게 보내는 음식물 보따리와 헌책방에서 그녀에게 보내오는 책보따리가 나의 것인양 흐뭇하여 연신 입이 벌어졌다. 그들이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닌가.
헬렌의 책 취향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어차피 블레이크는 좋아하지 않아요. 걸핏하면 황홀경에 빠져들잖아요. 제가 말하는 건 존 던이에요.'
나 또한 평소 툭하면 황홀경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물끄러미 쳐다보는 유형의 인간인지라 헬렌 한프가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주 오금이 저렸다. 주문한 책이 도착했는데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다르자 "여기저기서 쓸데없는 것만 발췌해놓은 그 중뿔난 편집자들이라니!" 하면서 욕을 퍼붓는데 가슴이 뜨금했다. 나 역시 교정교열을 보면서 순전히 내멋대로 발췌하는 형식으로 일을 할 때도 없지 않았으니까.
'프랭키, 당신은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죽을 권리도 없다는 사실, 명심하세요!'
아아, 저런 식의 우정 표현이라니!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대사를 한 번만 하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리고 한 번만 들어봤으면......
'친애하는 헬렌, 네, 우린 아직 여기 있습니다. 갈수록 나이가 들고 바빠지지만 더 부자가 되지는 않는군요.' (1965년 11월 13일)라고 답장을 쓰던 성실한 서점 직원 프랭크는 어느 날 헬렌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저세상으로 가버린다. 헬렌에게 편지를 보내온 건 그의 아내 노라였다. 사실 그녀는 헬렌을 조금 질투하기도 했다고 그제서야 털어놓는다.
프랭크의 아내 노라의 편지도 참으로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편지친구가 여자라면 나 또한 그렇게 선선하게 웃으며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다'이다.
헬렌과 프랭크는 20년 동안 그렇게 따뜻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살아서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다. 채링크로스의 책방에 갈 경비를 모으다 보면 헬렌이 치과에 가 뭉텅이 돈을 갖다바칠 일이 생기고 또 무슨무슨 일이 생기곤 했던 것이다. 헬렌은 가난뱅이였다. 늘 좀이 슨 스웨터에 모직바지를 껴입고 난방이 잘 되지 않는 낡은 아파트에서 책을 읽고 대본을 집필했다. 이 서간집을 발간한 이후 그녀의 이름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헬렌 한프에게서 저를 떠올렸다는 어느 예쁜 분이 어제 이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잘봐주셔서 너무 고맙구요, 저의 리뷰가 마음에 흡족한 답장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