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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 - [할인행사]
최호 감독, 조승우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언젠가 비디오로 빌려왔다가 차일피일 미루다 보지 못하고 반납한 영화 <후아유>를 다시 빌려와서 보았다. 한마디로 안 봤으면 큰일날뻔했다. 오래전에 보고 기절할 뻔했던 <세 친구>만큼이나 좋았다. 더구나 주인공 이나영의 친구로 영화 <눈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조은지가, 조승우의 친구로는 <세 친구>의 삼겹 이장원이 나와 이 영화에 더 큰 재미와 리얼리티를 보태어 주었다.
서인주(이나영)는 전직 국가대표 수영선수, 지금은 청각을 잃어 보청기에 의지한 채 63빌딩 수족관에서 일한다. 매일 30층까지 계단을 뛰어서 오르는데 체력 훈련도 몸매 관리도 아닌 것이 그냥 먹먹한 기분으로 무작정 뛰는 것 같은 표정(자기 자신을 반쯤 죽여놓은 것 같은)이다.
같은 건물의 게임 개발 사무실에서 먹고자고 하는 지형태(조승우)는 거대한 수족관 속을 인어공주 복장으로 유영하는 서인주를 만나고 돌아와서 그녀가 바로 자신이 만든 게임 '후아유'에 별이라는 닉네임으로 가끔 나타나는 그녀임을 알게 된다. '멜로'라는 닉네임으로 게임 속 가상공간에서 별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며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는데......
무겁다면 무겁고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영화를 도리어 산뜻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건 전적으로 여주인공 이나영의 일견 맹한 듯 투명하기 짝이 없는 그 페이스(이건 꼭 영어로 써줘야 할 것 같은 기분)와 구멍 뻥뻥 뚫린 그물 사이로 새어나가는 듯한 그 묘한 말투에 기인하는 바 크다.
조승우는 또 어떤가. 게임 개발하는 젊은이답게 영악하고 현실적인 요즘 젊은이의 얼굴 속에 적당한 피로와 허무가 언뜻언뜻 보여 그게 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한 매력을 풍긴다. 한마디로 현실 속에 살아있는 캐릭터의 완성이다. 회의 도중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는다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투덜대자 그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월급에 목매지 말고 자신이 만드는 상품의 가치에 목을 매라구!"
'후아유'라는 영화 속 게임 같은 가상공간이 있다면 나도 가끔 그곳에 가서 노닐고 싶다. 그곳에서 별이와 멜로가 나누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괜찮을까? 조심해 친구, 인생은 사고야.(별)
--여어, 투명인간 친구. 언제나 네 옆에는 내가 있어. (멜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별이는 점점 게임 속 멜로에게 빠져들게 된다. 별이가 꿈에도 그리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호수라는 티티카카호수를 말이 떨어지자 말자 척 대령해 주고 모든 인생의 문제는 앞으로 그가 다 해결해 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투명하고 싶은데 현실 속에선 입을 꽉 다물고 도망만 가게 되는 그녀로서는 멜로의 등장이 꿈만 같고 반갑다.
그런데 가끔 꼬질꼬질한 몰골로 냄새를 풍기며 짠하고 엘리베이터 앞 같은데서 마주치는 지형태라는 남자는 별이의 꿈에 초를 친다. "모니터 뒤에 숨어서 만나는 친구들 다 변태야!" 하면서......형태는 별이가 목을 매는 멜로에게(그게 바로 자신인데) 맹렬한 질투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또 스스로 큰 혼란에 빠져 있다. 언제 어떻게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그 투명인간 친구라고, 멜로라고 고백해야 하는지......고백하는 순간 그녀를 잃게 되는 건 아닌지......
멜로가 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라이브 스피커 켜!" 라고 명령하고 기타를 가져와 고래고래 노래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제일 통쾌하고 가슴 설레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 음악 선곡도 참 좋다. 크라잉넛의 '밤이 깊었네'는 평소 내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데 겨울밤 거리에서 달리는 청춘의 백뮤직으로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내 모든 게 다 달라졌어요. 그댈 만난 후로 난 새 사람이 됐어요......" 조승우가 고래고래 직접 부르는 그 노래도 감미롭기 짝이 없다.
조승우가 이나영에게 자신이 멜로임을 밝히며 고백하는 대사도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 않아서 가슴에 와 꽂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해봤어. 그게 너야. (너는 자꾸 숨고 도망가지만) 넌 멋져. 최고로 멋진 친구야!"
게임방에서 진을 치고 아무 생각없이 개구장이 같은 모습으로 건들건들 살아가는 듯 보이는 청춘이라도 가슴속엔 저 혼자 아는 상처와 절망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감을 잃는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이제 모니터 앞으로 나와 진짜 사랑을 한다. 지지고볶고 때로 냄새나는 그 사랑을. 입김이 모락모락 나는 겨울 거리의 건널목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며 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