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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풍경
신경림 지음 / 문이당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의 풍경>은 신경림 시인의 첫 자전적 에세이집이다. 자기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쓴 글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무조건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십몇 년전 그의 산문집<한밤중에 눈을 뜨면>을 누워서 읽다가 후다닥 일어나 앉은뱅이 책상 앞으로 다가가 정색을 하고 읽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이 책을 읽었다. 신경림 시인의 글들은 항상 나를 소스라쳐 일어나게 만든다. 서정과 생활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까. 그러한 시를 쓰신 더 오래 전 시인으론 백석 시인이 있다.
인사동 술집 평화만들기에서 신경림 시인을 뵌 적이 있다. 그 술집에는 조그만 방이 하나 따로 비밀서랍처럼 달려 있는데 시인은 벽에 기대어 발가족족한 얼굴로 지인들과 흥겹게 어울리는 중이었다. 노랫소리도 흘러나왔다. 신경림 시인이 술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또 한번은 당주동 민예총 사무실에 원고를 직접 받으러 간 일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흠모하던 시인이라 나는 바보같이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원고만 받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신경림 시인은 35년생인데 신기하게도 소년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작가의 말)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린 후 일단 책장을 덮었다가 두 편의 산문을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제목은 '내 이십대의 끝'과 '서울 속 시골에서의 한철'이며 각각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십대는 실의와 좌절의 나날이었다."
"서른에 결혼을 했다."
신경림 시인의 젊은 시절 하면 혹독한 가난과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로 정리된다. 하기야 요즘 젊은이들도 앞이 보이지 않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지독한 가난과 방황을 이상하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읽게 된다는 데 신경림표 글의 묘미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시엔 가난에도 어떤 분위기와 격조가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시인 지망생들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그들은 밥을 굶을망정 세상에 대고 호기를 부릴 줄 알았다. "이까짓 게 뭐라구!"하면서 마지막 남은 지폐를 찢어 난로 속에 불쏘시개로 집어넣질 않나,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며 단벌외투도 서슴없이 번어던져 버리는 등. 그런 친구들을 보며 소심한 청년 신경림은 가죽장갑을 잃어버리고 며칠째 남몰래 애태우고 있는 자신의 옹졸함을 부끄러워 한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1956 <文學藝術 >발표. 시 '갈대' 전문)
나는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소심한 시인의 자기 고백이 오히려 미덥고 좋다. 생활이 묻어나서 더 좋다. 그토록 용감무쌍하고 무모하기까지 하더니만 시인은커녕 거지로 삶을 마감했다는 '이현우'라는 기인 친구도 가슴 떨리도록 좋다. 그야말로 예술가였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언제까지나.
<바람의 풍경>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자주 가던 시금털털한 막걸리집과 시장통 국밥집과 도라무깡 난로가 있던 대학 강의실과 석탄 캐는 막장의 어두운 통로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것은 꼭 보고 싶고 맡고 싶던 삶의 풍경이며 그리운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