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샘터만화세상 4
마정원 지음 / 샘터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오늘 오후 나는 이희재, 박흥용 등 리얼리즘 만화의 계보를 잇는 무서운 신인이 나타났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른한 오후>를 읽고나서이다.

얄팍한 만화책 한 권이 무려  8000원. 비싼 책값 때문에 주문을 잠시 망설였지만 조금 전 배달되어온 <나른한 오후>를 나는 기분좋게 30여 분 만에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이걸 리뷰로 쓸까, 짤막한 페이퍼로 쓸까 잠시 망설이다가 리뷰로 쓰기로 한다. 이 책이 준 진한 감동과 여운을 한 장의 엽서로 처리해 버리기엔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 것이다.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만화 부문 초대 당선자인 마정원은 1979년생. 이 책 맨 앞장 작가의 말을 보니 말수가 적고 차분하고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든다.

"우리 가족 네 명 모두가 막노동을 하러 나간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출근길, 새벽 일찍 일어나 허겁지겁 입속에 우겨넣던 토스트의 맛, 그리고 점심때면 밥대신 술이 힘이 난다며 식권으로 막걸리를 받아 마셔버리고는 취기에 의지해서 일하시던 아저씨......"

책 맨 앞의 '나른한 오후'라는 단편은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년에게 누나를 잘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며 자장면값으로는 꽤 두툼한 지폐를 건네주나 했더니 막노동꾼으로 보이는 그 아버지 바로 열려 있는 창문으로 몸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자식들 눈앞에서...... 창밖은 바로 청계천 고가 부근. 개발이니 뭐니하여 하루아침에 철거가 이루어져 그 일대의 주민들이 생계의 터전을 잃은 바로 그곳이다.

이희재의 만화 주인공 악동이가 좀 터프하게 자란 것 같은 인상의 소년은 이제 내일 모레면 철거될 낡은 아파트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누나를 돌보아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 소년이 알바를 나간 동안 같은 아파트의 못돼먹은 녀석들은 그 누나를 데리고 나쁜 장난이나 하고......어느 날 등에 칼을 맞은 노인 사체가 발견되는데......

두번째 이야기 '과꽃'은 바로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이다. 벌이도 신통치 않은 주제에 맨날 술만 퍼는 남편......학교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일어나라고 아침마다 아이 방 앞에서 고함을 치는 엄마, 그런데 그것이 모두 그녀의 환상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이를 잠시라도 잃어본 엄마라면 그 심정을 알 것이다. 우리 딸아이가 세 살 때 일이다.  어느 날 외출을 했는데 우리 부부가 한눈을 파는 사이(서로 아이를 데리고 있겠지 믿었던 것) 거짓말처럼 아이가 없어졌다. 시간상으로는 약 40여 분. 나는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20분 전쯤에 아이가 앞만 보고 뛰어가더라는 가게 아저씨의 말을 듣고 목이 터져라 아이 이름을 부르며 달리노라니 순식간에 아래위 입술이 하얗게 말라붙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경찰차가 아이를 태워 데리고 있었고 40여 분 만에 우리 모녀는 감격적인 상봉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아이를 찾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바로 <과꽃> 속의 미진이 엄마처럼 되지 않았을까?

앞의 두 작품에 비해 그래도 약간의 온기를 전해주는 것이 '첫눈 내리던 날'이다. 조그만 트럭을 끌고 다니며 적당한 장소만 보면 보따리를 풀고 만 원짜리 옷을 파는 한 노점상 아저씨,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를 미워하고 그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딸 송이와 그녀의 유일한 친구 미령이......아주 스토리를 절망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듯하더니 고맙게도 이 작가 조그만 주머니난로 하나를 우리 독자들에게 내미는데.....

이 책의 맨 뒤에는 '우리 이웃 사람들'이라고 하여 작은 갤러리의 문이 열려 있다. 각양각색으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들과 함께 청계천에서 커피 파는 아줌마, 장사가 안되니 낮부터 취해 있는 행상, 까치둥우리 머리의 노숙자 등의 사실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속'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아저씨도 이렇게 개인적으로 앉아있으니 얼마나 인자하고 푸근한 모습인지......나는 대한민국 청계천이란 곳을 소재로 하여 이토록 무겁고 어두운 작품을 들고 나타난 이 패기 만만한 젊은 작가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난로 정도의 그 온기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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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걸프렌즈> 빌려드릴 때 함께 내놓겠습니다.
좋은 책 나누기 차원임돠.^^

2004-09-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먼저 찜합니다. 찜~!! 오늘 하루 종일 왜 이러십니까..증말루, 무셔워요ㅡ.ㅡ;:

깍두기 2004-09-1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 오늘 대여점 갈 때 알아봤는데요 걸프렌즈 없대요. 그러니까 빌려줘요~^^

마냐 2004-09-19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그죠, 마지막 작품이 약간의 온기를 주는게 고맙죠....두번째까지 하두 가슴이 무거워서...

내가없는 이 안 2004-09-20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빌려주신다고 해서 추천하는 건 아닙니다. ^^

로드무비 2004-09-20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깍두기님...헤헤헤
마냐님, 덕분에 좋은 만화 읽었습니다.
님의 리뷰 아니었으면 언제까지 보관함에 처박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깐요.^^
이 안님, 추천 고마워요.^^

아영엄마 2004-09-2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 (저 역시 공원에 갔다가 아이를 두시간 가까이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답니다.)

로드무비 2004-09-2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큰애요, 작은애요?
몇 살에 잃어버리셨는데?
어떻게 찾았어요?

아영엄마 2004-09-2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신 것도 많으셔라.. 답글 달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니 조만간 페이퍼에 써서 올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