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좀 전 벨이 울려 나가 보니 스티로폼 상자를 든 택배맨이다.
홈쇼핑에서 온 수산가공품.
주문한 게 없는데...하면서 사인을 해주고 상자를 열어보니 굴비 한 두름과
모짜렐라치즈돈가스 한 팩, 사골육수  큰 걸로 한 팩, 오삼불고기 한 팩.
그제서야 생각났다.
일전에 부산 부모님께 베니건스의 립을 주문해 보내드리고 난 뒤 홈쇼핑의 전화를 받았다.
추첨에 뽑혔으니 보름 뒤에 사은품을 보내주겠다는......

내가 사들이는 거라야 책과 싸구려 장난감 등속이지만 그게 잦다보니 택배맨이 자주 벨을 누른다.
며칠 전 '겨우겨우 살아가야 한다'라는 리뷰를 올리고 여러 님들이 추천을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신 걸 확인하고,  내가 꼭 사기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계속 나는 나의 사치와 쾌락의 길을 가겠다'고,
어느 님의 댓글에 뻔뻔한 댓글을 달았다.

냉동실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넣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앞집에, 실직하고 빚에 몰리는  가운데 쌀독까지 바닥난 청년 혹은 가장이 살고 있다.
이틀 걸러 택배맨이 벨을 울려대는 앞집의 피둥피둥한 여인을 보고 
어느 날 갑자기 살의를 느끼진 않을까?

휴~~  다행히 우리 앞집엔 형편이 괜찮아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

2.

노란 끈으로 한 마리 한 마리 꽁꽁 묶인 굴비를 어떻게 나누어서 잘 보관할 것인가?

너무 야무지게 묶인 굴비를 풀어헤쳐 각각의 봉지에 담는 일이 엄청나게 큰일로 여겨졌는데
가위로 중간을 한 번 잘라주니 거짓말처럼 쉽게 풀어진다.
내 인생에 뭔가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 같고, 나는 그 중 한 가지도 해결할 의욕이나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굴비들이 가위질 한 번에 그렇게 쉽게 떨어지는 걸 보니
혹시나 하는 희망이 솟는다.

어쩌면 일들은  아직 그리 잘못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란 인간도.....
그런데 어디를 딱 한 번 가위질해 주어야 하는 거지?



.......................................

 '어쩌면 일들은  아직 그리 잘못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이성복 시인의 詩句 인 듯.
써놓고 보니...... 아닌가?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04-2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앞집의 피둥피둥한 여인네는 제 이야기 같아요. ㅠㅠ 그래두 홈쇼핑서 사면 싸잖아요. 저도 자주 애용하는데^^ 전 간고등어에 갈치에 ~~

반딧불,, 2006-04-27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딱 한번 어디를 가위질해야 할지...?

플레져 2006-04-27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께 맛난 선물 보낸 효녀 로드무비에게 굴비님들이 도착하셨군요 ^^
가위질은... 자주 하시는 거 같은데요? =3

mong 2006-04-2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계속 나는 나의 사치와 쾌락의 길을 가겠다'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

sooninara 2006-04-2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뉴스보면 정말 무섭더군요. 무차별적인 보복(?) 양극화의 부작용인지..
저도 요즘은 하루가 멀다하고 택배맨이 오시는데..다 책이랍니다.ㅋㅋ
제가 산책,선물 받은 책, 서평단 도서..오늘도 두개나 왔어요.
남들이 보면 홈쇼핑 중독인줄 알겠어요. 하루에 두번씩 택배맨 오는 집이라고..ㅋㅋ

merryticket 2006-04-27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국 홈쇼핑,,,그거 넘 부러운데요..

인생에서 가위질 한 번...정말 어쩔 땐 끊고, 풀어주고, 열고,,,이런 작업들이
필요한것 같아요.

kleinsusun 2006-04-27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쌀독까지 바닥난 청년이 산다..까지 읽고
로드무비님이 굴비랑 돈까스,오삼 불고기 등 소포를 통째로 그 청년에게 줬다...는 말인지 알았어요.ㅎㅎㅎㅎㅎ
언제나...님의 글은 넘 재미있어요. 로드무비님 쵝~오!^^

날개 2006-04-2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집집마다 택배들이 엄청 오니까 걱정 안하셔도 될 듯...^^
(그니까.. 울 집 뿐만이 아니더라구요~ㅎㅎ)

nada 2006-04-2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이런 '뻔뻔함'이 너무 좋아요. (솔직함이라고만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하여 실례 무릅쓰고 이 단어를 씁니다.^^ 솔직함이 심플한 캘빈 클라인 속옷이라면 뻔뻔함은 쌍방울 빤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너무 개인적인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로이카 2006-04-2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보면 사소한 삶의 한순간 한순간들이 다 의미를 갖게 되는 로드무비님의 일상을 엿보며, 웃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네요. 사은품은 부모님께 대한 효심에 대한 상인 것 같네요. 좋은 일 하시고, 좋은 일 생기고, 그것 때문에 또 좋은 일 하시고, 또 좋은 일 생기고... 계속 그렇게만 되었으면 좋겠네요.

blowup 2006-04-2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의 '땡중(삶은 삶이고 깨달음은 깨달음인)' 같은 댓글을 읽고 나니, 제가 참 답답하게 여겨지더군요. 아슬아슬 피해간다고, 내게 도착해야 할 죄책감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눈 가리고 아웅이지요. 언제나. 아는데 모르는 척하거나 어설픈 깨달음으로 힘들어하는 게 저의 자가당착이에요. 오늘 페이퍼 너무 좋아요.

푸하 2006-04-28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걱.....^^:

로드무비 2006-04-28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앗, 제가 단 뻔뻔한 댓글 내용에 실망하셨고나!
우짭니까.^^;

namu님, 제가 좀 껄렁껄렁하지요.
'올바른' 쪽보다는 전 아직 '마음 가는 쪽'을 선택합니다.
"제가 오늘 많이 취했습니다. 괜찮죠, 하나님?"하고
기도하던 어느 날이 생각나는군요.ㅎㅎ
어쩌면 우리는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나봐요.
남이든 나든 '가책 받은 얼굴'에 대한 약간의 짜증도......

에로이카님, 효심과는 정말 거리가 멀어요.
아무튼 부모님께 맛난 건 사드리고 싶어요.
'의미 부여'의 끈은 놓고 살지만, 어느 순간 마음의 움직임을
이렇게 짧게 끄적여 보는 건 즐겁네요.
님들의 댓글을 읽는 재미에......^^

꽃양배추님, 아니 정말 어디서 나타나신 당돌한 소녀십니까?
쌍방울 빤쓰라니, 어떻게 그런 기막힌 비유를!!
아무튼 님이 좋다하시니 신나서 덩실덩실.^^

날개님, 님의 댁은 우리집보다 좀 더 벨이 자주 울릴 것 같아요.=3=3=3
(물귀신작전)

수선님, 설마 제가 그럴 리가!?ㅎㅎ
이런 글도 재밌다고 해주시니 수선님이야말로 쵝오!^^

올리브님, 홈쇼핑은 아예 방송을 보지 않아야 해요.
보고 앉았으면 '안 사는 게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다니까요. 무신 조화속인지 몰라도....
가위질에 대해 말한다면, 무지 어렵게 생각하는데
의외로 쉽게 풀리는 일들이 있어요. 그죠?^^

수니나라님, 슬그머니 신경이 안 미칠 수가 없습니다.
전 '어느 순간 팍 돌아버리는' 그 상황을 너무 잘 알 것 같거든요.
아무튼 좀 자제해야죠.
전 과다한 책 주문을 욕심 쪽보다는 방황의 일종으로 보고 있답니다.^^

mong님, 저 말이 마음에 드신다니 안심.^^

플레져님, 그, 그렇죠.
그런데 가위를 들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
엉뚱한 곳을 잘라서 멀쩡한 천을 못 쓰게 만드는
그런 기분도 듭니다.;;

반딧불님, 찾으시면 좀 알려주세요.^^

하늘바람님, 고등어 그날 먹을 것 한두 마리 사는 걸로
낙착을 본 지 꽤 됩니다.
그게 편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젠가 헬스 자전거 위에 올라타신 모습 사진 보니 날씬하시더만.^^


Mephistopheles 2006-04-2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 가위질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모두들 그 가위질을 주저하는 건 아닐까요..^^

로드무비 2006-04-28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러게요.
그러다 애먼 곳에 하기도 하고......^^

푸하 2006-04-2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댓글 보지 않았는데....^^; 내용만 봤어요(지금도 그럼) 넘 피곤하지만 성찰적인 내용이라.... 나중에 댓글 볼께요(현재 안 본 상태)
많은 종류의 글이 목적하는 것 중 중요한 부분의 한 가지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답을 얻는 것보단 성찰이 중요한 것 같아요.

숨은아이 2006-04-2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는 다음날 어떻게 할지 실컷 괴로웠는데, 막상 그날이 닥치면 뭐 그런 대로 술술 잘 되어가기도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2006-04-28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4-2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괜한 걱정을 다......
지금 재밌게 읽고 있답니다.
어쩜 그리 깔끔하게 분위기있게 책이 예쁘게 나왔는지!

그리고 간밤의 고민과 불면이 무색해지는 그런 경험 더러 있죠?^^*

푸하님, 어제 아침 100분토론에 대해 쓰신 것 읽고 메모 못 남겼어요.
각론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죠? 동감합니다.
그리고 댓글까지 전부 읽을 시간이 있나요?
그런 건 기대한 적도 없고, 제 말은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나는 사치와 쾌락의 길을 가겠다'는 저의 댓글이 너무 뻔뻔해서
푸하님이 헤걱;; 하신 줄 알고 한 말이었어요.
도둑이 제 발 저린 격.ㅎㅎ

2006-04-29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5-01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ㅎㅎ 저도 어제 베니건스 립 쪽쪽 빨았습니다. 맛나더군요. ㅎㅎㅎ 저는 폐지수집하는 아는분 모아 드리려고 폐지에 홈쇼핑 박스가 잔뜩입니다. 현관앞이 낯 간지럽습니다.

2006-05-01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