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 - 다석사상전집 1
박영호 지음 / 두레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제나(自我)'와 '얼나(靈我)'라는 단어가 있다. 
이 책에서 처음 보았다.

--깨달음이란 제나가 거짓인 줄 알고 얼나가 참나임을 아는 것이다.
알았다고 해서 몸뚱이의 제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영육(靈肉)을 분리시켜 줄 때까지 짐승인 제나를 최소한의 예우로 길러야 한다.(상권 257쪽)

'짐승인 제나를 최소한의 예우로 길러야 한다'는 표현에 무릎을 친다. 최소한의 예우.
다석 류영모는 자신의 육신에 정말 최소한의 예우만 하였으니,
일평생을 무명옷(저고리와 한복바지)을 입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다.
그리고 소년시절부터 세운 자신의 뜻을 좇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상을 마치고
농사를 직접 지어 양식을 얻었다.
쉰 살부터는 또 한 가지의 욕망을 끊었으니,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로만 지냈다.
물 한 사발 가져오라는 심부름도 남에게 시키지 않았으며, 말이나 글로 지식을 팔아먹고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하권 중간쯤에 나온 '겨우겨우 살아가야 한다'라는 소제목을 보고, 이 제목에 기대어 짧은 리뷰를 쓰기로 했다.
상하권 합해서 8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이지만 열흘 정도에 걸쳐 아껴가며 읽었다.
쌓아둔 소설들을 먼저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고 유익한 독서경험.

이승을 떠났을 때 신문에 부음 한 줄 나지 않은, 초야의 사상가 다석 류영모.
김교신과의 교유나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이름을 몇 번 접했을까, 그의 제자 박영호 선생이 쓴
평전으로 만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생각과 말과 글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남의 책이나 글을 인용하지 않으면 할 말이 하나 없는 학자나 교육가연然하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이런 사람, 이런 삶이 있었다니!
'진리' 가 그의 일생 화두였다.
젊은 날 마하트마 간디와 톨스토이의 삶에 경도되었지만, 그의 생각과 발언은 특정 종교나 사상에
갇히지 않았다.
종교와 인생에 대한 너무 독창적인 견해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에 저항이나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데, 나로서는 모든 말과 행동을 받아적고 따라하고  싶을 정도였다.
딱 하나(4.19와 관련된)만 빼고......

근대라는 시대 풍경과 그 시대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너무 인상 깊었다.
사람들의 교제는 또한 얼마나 진지하고 다정하던지......
공부와 교제와 나눔에 힘쓰는 모습들이 가슴 뭉클했다.

다음은 다석 류영모의 통찰이랄까, 독창적인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류영모는 결별의 기도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오소서"(요한 17:1 개역성경)의 영화롭게를 뚜렷하게로 옮겼다.
헬라어로 '도크사'인데 영어로 글로리(glory)이다. '영광'을 순 우리말로 '뚜렷'이라 옮겼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인간 저희끼리 주고받는 헛된 영광이 너무도 많아
영광이란 말을 그대로 쓰기가 싫어 뚜렷으로 옮긴다고 말하였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뚜렷하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옵소서"(요한 17 :1)

'인간 저희끼리 주고받는 헛된 영광'을 나는 한마디로 '수작'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두어 달 전 이 '영광'에 대하여 진지한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있었는데,
다석 류영모를 먼저 읽은 분이었다.  반가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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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4-25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비로그인 2006-04-2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책을 읽고 이렇게 온전히 공감하고 받아들이실 수 있는 로드무비님이 참 부럽습니다..^^

국경을넘어 2006-04-25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올리셨군요. 저는 헌책방에서 어럽게 절판된 책들 구해 놓고 제사만 지내고 있는데... 잘 읽었습니다.^^

푸하 2006-04-2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 한 사발 가져오라는 심부름도 남에게 시키지 않았으며'이 문장 정말 멋진 분의 풍모가 보여요.... 멋진게 위대한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 정말로 멋진 일이에요..... 자신의 수고로움을 누구에게 미루지 않는 그러한 마음으로 살면 좋겠어요...

mong 2006-04-2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없이 추천만....^^

플레져 2006-04-2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얕은 인간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싶네요. 한편으론 그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 로드무비님의 독서 편력을 본받고싶어요. 흑.

Mephistopheles 2006-04-2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점심 먹을려고 바닥에 깔아논 면이 하필 부음란 이였죠...
손바닥 반만한 기사가 난 분도 계셨고 세줄로 끝을 맺는 분도 있더라구요..
그나마 손바닥 반만한 기사가 나는 분들은 유명한 분이다 라고 생각해봤지만..
죽으면 뭐 다 끝이다..란 생각만 들더라는...^^

마태우스 2006-04-25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석 류영모라... 처음 들어보네요. 제가 모르는 훌륭한 분들이 참 많군요. 전 순전 저만을 위해 사는데....

nada 2006-04-2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쉰 살부터는 상대적으로 좀 쉬워보이는데..ㅋㅋ(괜한 딴지구요) 영광에 대한 이야기 정말 인상적입니다. 이런 분의 존함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waits 2006-04-2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 온 소제목도 로드무비님 분위기가 나요, 겨우겨우 살아가야 한다... 찌릿.

혜덕화 2006-04-2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겨우 살아가야 한다를 보니 <실컷>이라는 말에 대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실컷>이라는 말을 쓰면서 살아가서는 안된다시며 열변을 토하시던 말씀 속에서 그분 삶의 모습을 짐작해 보았지만 이 글을 보니 더욱 훌륭하신 분임이 느껴지네요.

푸하 2006-04-25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강연에서 신영복 님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한마디 하신게 기억나네요. " 견디며 살아가는게 중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맥락을 물론 말씀하셨지만 조금 갸웃하게하는 말씀이셨는데. 이어지는 의미같아요.

sandcat 2006-04-25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권정생 님의 '근근히 산다'가 생각는군요. 이 말씀 역시 신영복 선생의 말과 통하는 데가 있는 듯. 지난 주 한겨레에 현암사 판 <다석강의>기사가 났던데요.

urblue 2006-04-25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겨우, 견디며, 근근히, 그렇게들 살아가시는 거군요, 그분들은. 음.

oldhand 2006-04-25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분을 또 이렇게 좋은 리뷰를 통해 조금이라도 접하게 되는군요. 좋은 책은 좋은 리뷰를 낳습니다.

blowup 2006-04-26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쯤엔가 읽어보려다가, 저 생경한 말투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몇 장 읽다가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어요. 실은 저런 깨달음이 부담스러워서 핑계를 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로드무비 님 덕분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생겼답니다.

로드무비 2006-04-2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생경한 말투가 제겐 시어처럼 들리니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그리고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저는 저의 사치와 낭비의 길을
계속 가려고요.ㅎㅎㅎㅎㅎ

올드핸드님, 아이고, 따신 말씀 고맙습니다.
미처 모르고 있는, 귀한 것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블루님, 저, 저도 그렇답니다. 겨우겨우.=3=3=3

샌드캣님, 권정생님, 맞아요.
제가 아주 오래전 권정생 선생 댁에 가서
식모(무급으로)를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뜨신 밥을 좀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다석강의> 한겨레에 실렸다고요?^^

푸하님, 맞아요. 이어지는 의미같은데요?
강연을 직접 들으셨나봐요.
안 그래도 이 책에 YMCA 연경반이라고 하여
공부하는 청년들 모임이 나오는데 요즘으로 치면
푸하님 같은 분들이겠죠?^^

혜덕화님, '실컷' 해보고 나면 또 질려서 어떤 의미로 자유로워지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좋은 의미로 이해하면...)
겨우겨우와 실컷을 대비시켜 주셨군요.^^

나어릴때님, 님의 댓글 보니 저도 찌릿.~~







로드무비 2006-04-26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저도 저 문제는 쉰 살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ㅎㅎ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사용하던 말들에 대한 고찰,
새롭고 독특하고 유효적절한 해석, 창조성.....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

마태우스님, 어쩜 그리 겸손하신지.
저도 그런걸요, 뭐.;;

메피스토님, 죽고나서 신문에 몇 줄 나고 안 나고는
그의 명예와는 상관없고
남은 가족들을 그나마 위로하는 절차 중 하나?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플레져님, 모처럼 묵직한 책 한 권 읽었습니다.
독서편력이라면 님만한 분도 드물지 싶습니다만.
얕은 인간의 껍질은 정말 양파 껍데기와 똑같은 것 같아요.^^;

mong님, 추천 고맙습니다.^^

푸하님, 제가 제일 존경스러웠던 게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교수든 사장이든 예술가든 자신이 획득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타인을 깔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으로 뭐든 된다 생각하고 하기 싫은 일은 당당히 시키고요.
사실 저도 찔리는 부분이 많은데 가장 기본적인 사람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폐인촌님, 저도 제사만 지내다가 드디어 읽었습니다.
일단 페이지부터 펼치세요. 금방 읽게 되실걸요?!^^

사야님, 에이, 님은 뭐 안 그러세요?
읽고 있는 책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 그 쾌락을 사랑합니다.
단, 깨닫고 받아들인 것을 생활 속에 그대로 옮기는 힘이 부족하네요.^^;;

에로이카님, ^^*


2006-04-28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4-2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맹님의 칭찬 고맙습니다.
님도 힘내시고요.^^

2006-04-30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