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다섯 시에 컴퓨터 앞에 앉아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일을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약속을 사흘째 지키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나인데 그런 상황에 막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이러고 있어야 해?' 아니 누가 그러랬나? 지나가는 멍멍이가 웃을 일이다. 가해자의 뻔뻔한 자기연민.
어제는 정말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은 부산의 어느 대학병원 수술실에 가 있었다. 밤 열 시,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되었다. 마우스를 아무리 움직여도 화면은 요지부동. 마음 한구석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섬찟했다. '요 며칠 내가 한 일 다 날아가버리면 좋겠다. 그래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으면......' 뭔지 헝클어져버린 일들. 하고 있던 그 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까나. 내가 망쳐버린 일들, 관계들.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이런 느낌은 살다가 또 처음이었다.
자정 무렵 돌아온 남편이 안타깝게도(?) 컴퓨터를 고쳐놓았다. 바탕화면에 깔려 있던 일감은 멀쩡했고 그러니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무리를 해서 오늘 아침 담당자에게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새벽 다섯 시에 나는 또 항복을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사과 메일을 쓰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아침부터 참치깡통을 들고 온 네 살짜리가 뚜껑을 열어달라고 하도 졸라서 뚜껑을 따다가 손을 베었다. 대단치 않은 상처였지만 손가락을 베이던 순간의 서늘한 느낌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일밴드를 붙이고 앉아 이 글을 쓰는데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된다. 어젯밤엔, 아니 오늘 새벽엔 정말 죽을 것만 같더니! 나에게 만정이 떨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