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다섯 시에   컴퓨터 앞에 앉아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일을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약속을 사흘째 지키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나인데 그런 상황에 막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이러고 있어야 해?' 아니 누가 그러랬나? 지나가는 멍멍이가 웃을 일이다. 가해자의 뻔뻔한 자기연민.

어제는 정말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은 부산의 어느 대학병원 수술실에 가 있었다. 밤 열 시,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되었다. 마우스를 아무리 움직여도 화면은 요지부동. 마음 한구석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섬찟했다. '요 며칠 내가 한 일 다 날아가버리면 좋겠다. 그래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으면......'  뭔지 헝클어져버린 일들. 하고 있던 그 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까나. 내가 망쳐버린 일들, 관계들.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이런 느낌은 살다가 또 처음이었다.

자정 무렵 돌아온 남편이 안타깝게도(?) 컴퓨터를 고쳐놓았다. 바탕화면에 깔려 있던 일감은 멀쩡했고 그러니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무리를 해서 오늘 아침 담당자에게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새벽 다섯 시에 나는 또 항복을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사과 메일을 쓰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아침부터 참치깡통을 들고 온 네 살짜리가 뚜껑을 열어달라고 하도 졸라서 뚜껑을 따다가 손을 베었다. 대단치 않은 상처였지만 손가락을 베이던 순간의 서늘한 느낌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일밴드를 붙이고 앉아 이 글을 쓰는데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된다. 어젯밤엔, 아니 오늘 새벽엔  정말 죽을 것만 같더니! 나에게 만정이 떨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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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5-01-2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아주 힘드시군요.
'禍不單行'
어려운 일이 닥칠 때는 왜 그런지 이 사자성어가 꼭 들어맞아서 더 우리를 지치게 하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을 해보니 힘든 일을 쭉 이어놓는다면 더 고통스러울 것이니 한꺼번에 치르고 일어나라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로드무비님 힘내시라고 니르바나가 응원합니다.

비로그인 2005-01-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고, 로드무비님. 거 많이 아프실텐데..작은 상처가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이거덩요. 생활도 많이 불편해지고. 힘 내십쇼..화이륑!

숨은아이 2005-01-2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의 어느 대학병원 수술실... 누가 아프신가요? 시간에 쫓겨 일할 땐 팔 다리 어깨 허리 얼굴 근육까지 안 아픈 데가 없고,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을 비롯해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에 다 화가 나고... 저 그럴 때 있어요. 그럴 때 차라리 한숨 자고 스트레칭이라도 한판 하면서 산소 공급도 하고 그러면 해결책이 보이던데... 일, 며칠 늦어진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거 아니잖아요.

비로그인 2005-01-2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래요??? 힘내요.

반딧불,, 2005-01-2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으세요??
무슨 일인지 뫼르지만, 빨리 해결되었으면..^^

어룸 2005-01-2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치캔이 미안하대요, 반성의 여행을 하고 오겠답니다^^
그래, 참치캔! 넌 반성좀 해야됏!!


릴케 현상 2005-01-2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힘내세요" 주하가 노래불러 주던가요^^

플레져 2005-01-2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치캔에 베이고 나서의 로드무비님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서늘...해요. 산다는 게...

깍두기 2005-01-2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자신이 싫어지는 거, 그거 진짜 힘든데. 남 탓 할 수도 없고 말이에요. 걱정되는 일도 있으신가 보네. 뭔 일들은 꼭 겹친다니까요. 빨리 해결되고 한 숨 돌리시길...

starrysky 2005-01-2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감이 연이어 펑크날 꼬라지에 처해 있는데도 이렇게 알라딘을 기웃거리고 쓰잘데기 없는 게임을 하고 하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화가 나 죽겠습니다. 아호, 이걸 확 패줄 수도 없고 어쩌죠? (패면 아푸니까 시려.. ㅠㅠ)
사랑하는 로드무비님, 빨리 일 마무리하시고 요즘 로드무비님을 뒤덮고 있는 우울함도 확 날려버리시고 주하와 즐겁게 까르르~ 웃으며 하루하루 보내시어요. 아자아자!! ^-^

2005-01-27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발~* 2005-01-2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말 할 것 없이 한잔 하입시더!

비발~* 2005-01-2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질나서 안되겠네요. 일루 갑시다!


로드무비 2005-01-29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발~*님, 투풀님 사진 너무 웃겨요.ㅎㅎ
오늘 꼼짝없이 일했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집중이 되네요.
어제 여동생이 꽤 큰 수술을 받았거든요.
오늘 전화로나마 짱짱한 목소리도 확인하고 하니 한결 낫네요.
머리가 너무 아프고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이러다 뇌출혈?
혹은 심장마비? 하는 걱정까지 하다보니 그만......
어제, 오늘 새벽은 정말 지랄맞았습니다.
함께 걱정해주시고 따뜻한 말씀 남겨주신 분들 고마워요.
오늘은 작정하고 신세타령을 해보자, 하고 한 거거든요.^^
그 정도로 괴롭긴 정말 괴로웠답니다.
사는 건 정말 장난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것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kleinsusun 2005-01-2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많은 분들이 로드무비님을 걱정하고 또 사랑해요. 힘내세요!
만약 내일 또 힘드시면( 내일은 기분 좋으시길 바라지만), 만약 그러시면 또 쓰세요.사방에서 에너지를 보내 드릴껍니다. 제 장풍은 쫌 약하지만서도...ㅋㅋ

2005-01-28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5-01-28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동생분, 짱짱한 목소리라니...제가 다 반갑습니다. 로드무비님, 참치캔에 베인 손만큼이나 동생분도 빨리 완쾌하시길 바랍니다.

hanicare 2005-01-2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일상에 잠복하고 있는 투명한 덫.뭐라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엉크러진 실타래,산발한 마음, 못마땅한 자기자신이 연주하는 불협화음. 그냥 그대로 이불 속에 쏙 들어가 만사 잊고 자고 나면 우렁각시가 나타나 깨끗이 정리해주면 좋을텐데요.후훗.어른이란 건 결국 자기가 해결해야한다는 것의 동의어인듯.어른에게도 방학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soulkitchen 2005-01-2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분 목소리가 괜찮으시다니 수술도 잘 되신 걸 꺼라 생각하고 안심합니다. 요샌 저도 웬 일인지 제 모든 일을 깽판쳐 버리고 싶어요. 아예 바닥을 쳐버리면 다시 훅~솟아오를 것 같은 그런 기분 있잖아요. 컴퓨터가 다시 고쳐졌을 때의 안타까움, 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흐흣..

숨은아이 2005-01-2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분이 얼른 쾌유되시기를... 그리고 때로는, 엄청 고민스럽던 일도 한숨 자고 나니 별거 아니더라구요. 그럴 때는 "잠"이 바로 우렁각시이겠지요?

기다림으로 2005-01-2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걱정해야 하는 순간은, 머리의 복잡함보다는 가슴의 답답함이 더 크지요. 아마, 그 사람을 위해 가슴 한 구석을 내어줘야 하기 때문인가봅니다. 동생분의 쾌유를 바라는 이 착한 분들의 마음씀씀이로 로드무비님을 좀 달래드리면 안될까요..? ^^ 힘내세요.

2005-01-29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1-29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은 경과가 좋아 다음주 퇴원한답니다.
저는 어제 하던 일 마무리해서 일단 넘겼고요.
걱정해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제가 너무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죄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