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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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좋아했다. 하루 종일, 하루치 삶을 살아내느라 힘들었던 몸을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흐르는 방안에 부려놓으면, 몸은 고단을 잠시 잊고 마음은 우울을 잠시 잊었었다.

 

춤곡이지만 어딘가 무겁고 어두운 이 곡을 우리는 아주 사랑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무심코 콧노래로 흥얼거리면, 다른 하나가 따라 부르다 결국 CD를 플레이어 위에 얹고, 각자의 일을 하던 그 밤들. 그 밤들이 눈물겹게 그립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 -우리 존재의 음악- 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삼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p.181

 

시대의 소음을 견디게 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어둠의 시간을 지나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기까지 그의 삶의 궤적을 나는 한번도 더듬어 본 적이 없었다. 러시아의 작곡가라고만 알고 있어서 문화적으로 풍성했던 러시아, 그러니까 톨스토이나 도스트옙스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은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p.105)

“1932년 당이 독립 조직들을 해산하고 모든 문화적 문제를 맡게 되면서..

모든 작곡가는 국가에 고용되었으므로..

작곡가는 탄광 광부처럼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고..

관료들은 다른 범주의 생산량을 평가하듯 음악 생산량을 평가했다.“ (p.42~43 부분)

 

이런 ‘낙관적인’ 소비에트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 신동으로 첫 발을 내딛고, 평생 동안 최고 음악가로서의 명예를 누렸지만, 사실은 체포와 숙청의 공포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오페라 작품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스탈린 동무가 공연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밤마다 모든 옷을 갖춰 있고, 여행용 가방을 싸 둔 다음, 승강기 옆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당의 요원들은 언제나 한밤중에 반역자들을 체포하러 왔고,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내 양손을 자른다 해도 나는 입에 펜을 물고서라도 작곡을 계속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곧 깨닫게 된다.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이 사이에 펜을 물고 작곡을 하는 작곡가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작곡가만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p. 75

 

“그는 남은 용기를 모두 자기 음악에, 비겁함은 자신의 삶에 쏟았다.” p.226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다. 브레히트처럼. 자신을 미워하며.

 

“영혼은 셋 중 한 가지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 남들이 당신에게 한 짓으로, 남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게 만든 짓으로, 당신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한 짓으로. 셋 중 어느 것이든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세 가지가 다 있다면 그 결과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겠지만.” p.239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그의 음악은......그냥 음악이 될 것이다. 작곡가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p.257

 

오늘도 지친 몸을 방에 부려놓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는다. 저음역대가 좋은 스피커 대신, 노트북 스피커로 유튜브의 영상을 찾아 들으니 소리가 영 뾰족하고 불편하다. 함께 듣던 CD는 그애가 가져가서 없고, 함께 듣던 그애도 이제 즈이 가족들과 지내느라 여기 없다.

 

고단했던 하루를 얘기하고, 좀 더 나을 내일을 꿈꾸고, 읽고 있는 문장이나 보고 있는 그림을 나누며, 도란도란 하루를 마감했던 동지들이 하나 둘 떠난 둥지를, 아직도 남아 꿋꿋이 지키며 나는 혼자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는다. 그의 어두운 표정과 이 구슬픈 춤곡이 과연 그럴만했구나, 혼자 고개 끄덕이며.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얘기해 주고 싶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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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조은수 지음 / 만만한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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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동안 네 권의 책을 번갈아 읽었다. <책만 보는 바보>의 표현대로라면 “책과 내 마음이 오가고 있는 공간은, 온 우주를 다 담고 있다 할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라 할 만하다.

 

우선 나는, 한 달쯤 전부터 1960년대 케냐의 가난한 시골 일모로그에 몸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가축들은 말라죽어 가고, 어른들은 무기력하다. 그 시골마을에 돌연 활기를 불어 넣어준 외지인들은 가난한 그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처지를 알리고, 항의하기 위해 도시로 길을 떠난다. 그 여정에서 헐떡이다가 (690쪽 중 390쪽까지 왔다) 홍으로부터 받은 두 권의 책 중 한 권을 펴들었다. “하나는 선물이고, 하나는 읽고 반납.”

 

반납해야 할 책을 먼저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살인적인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다가 1700년대 프랑스 귀족들의 사회로 순간, 옮겨 앉는다. 일모로그 주민의 삶이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이들의 삶은 쾌락을 위한 것이다. 일모로그의 그들은 투쟁을 위해 노래하고, 프랑스의 이들은 사랑을 위해 편지를 쓴다. 이 관능적인 편지글들은 묘한 흡입력으로 단숨에 휘리릭 책장을 넘기게 하나, 쾌락을 좇고 영혼의 타락을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점점 지쳐가고, 마침 눈도 침침해 온다. 그래서 잠시 바깥 바람 좀 쐴 겸 주문한 책을 찾으러 삼일문고로 향했다.

 

먼저, 지하에 들러 읽다만 그래픽 노블을 펴든다. 1800년대 지옥과도 같은 런던 뒷골목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 (만화)책은 크기와 내용과 무게가 어마어마하다. 그 묵직한 내용의 큰 축은 인간 이상의 무엇이 되고 싶은, 가진 자들의 횡포와 잔인함이다. 작은 글씨, 어두운 조명, 거친 그림체,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의 잔인함에 읽어 나가기가 힘이 들지만, 그래도 읽어 나가게 하는 힘이 대단한 책이다. 사장님이 재미가 있느냐 물으시는데, 물론이다. 영화까지 챙겨서 예습까지 다시 하고 간 상태다. 이제, 범행이 밝혀지는 순간만 남았다.

 

그 날 삼일에서 사 온 세 권의 책 중, 내가 주문한 건 바로 이 책이다.

<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서설이 길었지만 이 글은 사실 이 책에 대한 리뷰이다.

일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저 ‘조금 재미있다’, 했을 텐데 지금 접한 독서 환경이 이 책을 더없이 귀하고 고마운 책으로 만든 거다.

 

너무 많이 가져서 부끄러웠던 톨스토이는 여든 둘의 나이로 가출을 감행한다.

 

“러시아 곳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고, 목숨까지 잃고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는 귀족들만 배부르게 먹고 화려하게 살고 있소. 이런 세상은 잘못된 거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제 함께 잘 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하오.” p.32

 

그래서 톨스토이는 농민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눠주고, 자신이 쓴 책들을 가난한 농민들이 공짜로 읽을 수 있게 유언장을 고친 뒤 집을 떠난다. 저 가난한 케냐의 시골마을을, 저 타락과 향락에 젖은 프랑스의 귀족사회를, 저 지옥 같은 런던의 뒷골목을 헤매다가 만난, 이런 톨스토이라니. 약간의 도덕적 흠은 치열하게 산 흔적 정도로 생각하는 현재의 우리 실정에 비추더라도 톨스토이의 이러한 이념은 고결하다.

 

“난 드디어 집을 나와서 홀로 거렁뱅이가 되었다. 드디어 가장 진실한 내가 된 거야. 그동안 힘들여 쌓아 올린 명성도 재물도 없고, 가족도 없는 벌거벗은 나 혼자가 된 거야.” p.105

 

평생 힘들여 쌓아 올린 명성과, 재물과,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생활을 버리고 톨스토이는 홀로 되어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행복한 노년을 위해 건강 관리를 하고, 일을 해서 저축을 하고, 부지런히 친구를 만나러 다니는데, 이 고결한 어른은 그런 것들에서 그렇게 벗어나고자 한 거다. 그러곤 비밀 일기장에 이런 고민을 남긴다.

 

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첫 번째 단점,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한다.

두 번째 단점, 이치에 어둡다.

세 번째 단점, 마음이 잘 변한다

네 번째 단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 단점, 성격이 밝지 못하다.

여섯 번째 단점, 자기 자신을 속인다.

일곱 번째 단점, 거짓말을 한다.

여덟 번째 단점, 조급하게 생각한다.

아홉 번째 단점, 남을 잘 따라한다.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있다고 하잖아요. 하나는 차르 정부와 또 하나는 톨스토이.”

p.83

 

러시아 최고의 권력이라 불렸던 톨스토이의 고민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뭔가 위로 받는 기분이다. 게다가, 잘 생기고, 세련되고, 작품도 자신보다 훨씬 일찍 인정받았던 투르게네프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껴 절교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니, 평범한 계집아이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투르게네프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다네. 투르게네프가 너무 세속적이라서 절교한다는 편지를. 사실 나는 속으로 너무 질투가 나서 그런 거였는데, 감쪽같이 거짓말을 한 거지.” p.113

 

20대 초반에 언니의 책으로 <안나 까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를 읽었으나, 기억에 남는 거라곤 안나 까레니나와 브론스키, 레빈 같은 이름들 뿐이다. 그나마 <안나 까레니나>는 읽은 기억과 메모한 흔적이라도 있지, <전쟁과 평화>는 책을 읽기는 했는지, 표지만 보곤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산더미라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런지는 기약이 없다.

 

드넓고도 신비로운 우주를 헤매다 현실로 돌아왔다. 1700년대의 프랑스 귀족 사회는 홍에게로 돌아가고, 런던의 뒷골목은 거기 서점에, 케냐의 시골마을과 아이같은 톨스토이는 내 책상 위에 고이 누워 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이냐, 네가 나를 펼치기 전까지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라 말하며. 이제 네가 나를 속속들이 봤으니 이제 나는 네게 무엇이 되었느냐, 물으며.

 

아이의 얼굴을 하고 찾아 온 대가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나는,

거칠고 공정치 못한 세상을 그래도 살만하다 생각하고,

스스로의 졸렬함에 실망해 자책하던 날들을 위무받는다.

 

마침내, 비가 비답게 쏟아진 아름다운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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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은 참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해. 사랑이 있는 쪽에선 사람을 빼앗고, 사람이 있는 쪽에서는 사랑을 빼앗아 가고.” p.358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아이와, 증오하는 아빠에게서 도망쳐 나온 아이와의 대화이다. 이만큼 살아도 세상이 불공평한 것만 같은 나는, 열다섯 이 아이들의 얘기에 딴은 그렇기도 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세상은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하기도 하지, 그래.

그 아이들의 이야기에 밤 깊어가는 줄을 모르고, 390쪽을 단숨에 읽어내린다.

 

엄마가 신혼여행을 간 사이, 지명수배중인 ‘친구의 운동권 형’을 도와주러 어려운 길을 나선 준호와, 부자 아빠와 별나빠진 엄마의 이상한 양육방식에서 도망쳐 나온 승주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인간을 피해 집을 나온 정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할아버지 하나와, 덩치가 치타만 하고 사납기는 맹수만 한 도베르만 한 마리의 좌충우돌 여행기인 이 소설은, 청소년문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한때 청소년이었던 모든 이들이 읽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개장수는 개처럼 다리를 털어 바지 솔기에 낀 불알을 빼낸 뒤 뻗정다리를 끌며 멀어져 갔다.”p.29

 

나는 이처럼 중년 남자의 바짓속 사정을 디테일하게 그려 놓은 문장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말 유쾌하지 않은가, 이런 청소년 문학.

정규리그가 시작되기 전 집중적으로 가지는 합숙훈련을 말하는 “스프링캠프”, 이 스프링캠프를 거친 후 이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 후일담도 고마웠다.

어쩌다보니 거꾸로 읽게 되는 정유정의 작품들에 나는 자꾸만 감탄하고, 자꾸만 고맙고 있다. 책을 빌려준 나영이게도 고맙다.

 

 

2.

 

"나는 웃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발달이 조금 느린 거려니 했다. 하지만 육아책에는 아기들이 생후 삼일이면 웃기 시작한다고 쓰여 있었다. 엄마는 손을 꼽아 날짜를 세어 보았다. 백 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p.21

 

놀란 엄마가 병원에서 받은 아이의 병명은 “감정 표현 불능증”.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데다 뇌 변연계와 전두엽 사이의 접촉이 원활하지 못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고, 감정의 이름들을 헷갈리”게 되는 병이다.

 

잘 웃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그저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로 여겨졌던 아이는 여섯 살 무렵, 한 학생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피해 학생이 죽음에 이른 엄청난 폭력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목격담을 전하는 아이의 표정은 평안 그 자체여서, 사건을 처음 전달 받은 동네 어른은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해 초기 대응에 실패한다. 그래서 살릴 수도 있었던 학생은 죽고, 죽은 학생의 아빠였던 그 동네 어른은 아이를 탓하며 ‘네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말했다면 늦지 않았을 거다.’라고 절규한다.

 

아이는 한순간에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무서운 아이로 낙인찍히고, 엄마는 느끼지 못한다면 배울 수밖에 없다며 아이에게 감정 표현법을 가르친다. 어떤 경우에 어떤 인사를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 어떤 말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상대방의 표정에 따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p.27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p.81

 

모든 감정이 활자에 불과하던 아이는,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믿음아래 불철주야 감정에 대해 가르치던 엄마 덕에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비교적 평범하게. 엄마가 미처 가르치지 못한, 엄청난 감정의 표현을 해야 할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흘간의 장례 내내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나를 두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다양한 추측을 하며 속닥거렸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럴 거야. 아직 어리니 뭘 알겠어. 엄마도 죽은 거나 다름없고 이제 고아나 마찬가진데 실감이 안 나니 저러지. 남들은 내게 슬픔이나 외로움, 막막함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안에는 감정 대신 질문들이 떠나니고 있었다.” p.58

 

혼자 남은 아이의 나날이 눈물겨워지려는 순간, 2부가 시작되고 이야기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윤재에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다. 그들의 아슬아슬한 관계 맺기는 아, 이 책이 청소년 문학이었지 하고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하며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아래의 문장은 엄마가 남긴 헌책방을 꾸려가는 아이의 말이다.

 

"할멈의 표현대로라면,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 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 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p.118

 

이 밤, 내가 딱 원하는 만큼만 내게 이야기를 쏟아 내 줄, 다른 친구를 만나러 나는 이만 내려간다. 책상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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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영화 포스터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아름다운 몸의 남자가 공중에 붕 떠 있는 포스터만 보고 구미엔 상영관이 없어 대번에 대구 CGV로 달려가신 분이 계신가 하면, 틸다 스윈튼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만 보고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이 영화를 선택한 나 같은 이도 있다.

 

이 불친절한 영화 속 시간은 뒤죽박죽 흐른다. 흐른다는 표현이 맞기나 할지. 주인공 에바의 현재 속에 과거가 불쑥, 불쑥, 끼어드는 형국이다. 작은 여행사에서 서류정리를 하는 수척하고, 남루하고, 넋이 반쯤은 나간 에바 사이로, 당차고 아름다운 여행작가 에바가 등장하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무표정한 케빈 사이로, 끊임없이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어린 케빈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기에 이들의 시간은 흐르지 못하고, 엉망으로 섞이고 엉키어, 보는 이를 불안에 떨게 하는가. 왜 화면은 이다지도 붉은 빛으로 가득차 일렁이고, 왜 음악은 이렇게도 화면의 분위기랑 어울리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은 어쩌면 이렇게도 음악에 잘 녹아져 있는가. 이것은 어떤 영화인가.

 

자유분방한 여행작가 에바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임신과 함께 그녀의 모든 일상은 아이 케빈에게 바쳐진다. 케빈은, 모든 아이가 그렇듯 태어난 순간부터 운다. 울고, 울고 또 운다. 막 태어난 아기 케빈에게 막 엄마가 된 에바는 엄마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하고 싶지만, 케빈은 에바의 뜻대로 자라주지 않고, 참다 못한 에바는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하고 만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너도 알지?”

 

알 리가 있겠는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행복했던 엄마를.

케빈이 본 엄마는, 일에는 당당하지만 자신에게는 늘 조심스럽고, 조바심치고, 가르치려 들고,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숨 쉬고, 마음으로 다가오기보다 그저 의무를 다하는 것 같을 뿐이다. 그래서 엄마를 보는 케빈의 눈빛은 언제나 적대감으로 가득하고, 일부러 엄마의 화를 돋우려 자극적인 행동을 한다.

 

그렇게 자라서 케빈은 괴물이 되고 만다. 케빈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앞에, 에바는 거리를 걷다 모르는 여자에게 뺨을 맞아도 아무 항변을 하지 못하고, 장을 보다가 아는 사람을 보게 되면 숨어버리고, 누군가 집에 뿌려 놓은 붉은 페인트를 지우고 또 지운다. 손에서 붉은 페인트가 가실 날이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과거의 자신과 케빈을 생각한다. 어디서부터가 잘못이었을까. 나는 어떤 엄마였던가. 케빈은 어떤 아이였던가.

 

에바와 케빈의 가장 따뜻했던 기억은, 아픈 케빈에게 에바가 로빈훗을 읽어줄 때였다. 케빈은 아주 흥미로워하며 엄마의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듣고, 에바는 그런 케빈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다. 그리고 이런 음악이 흘러 나온다.

 

사랑하는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신 그 날을 잊을 수 없어라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넌 항상 이 엄마의 기쁨이었단다”

 

케빈이 선물 받은 장난감 활과 화살을 들고 엄마가 있는 주방 쪽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순간 그 음악은 다시 흘러 나온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다시 보니, 그 순간과 이 음악의 조합이 소름끼친다.

 

선정적인 장면도, 잔혹한 장면도 그닥 없는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달고 개봉한 이유를 알 만 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이 불길함과 일렁이는 붉은 빛은 웬만한 내공으로는 참아내기 힘들다. 그럼에도 묘하게 끌려 몇 번이나 다시 보게 하는 힘은, 틸다 스위튼과 에즈라 밀러의 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들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늘 함께 아파했지만, 가해자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어땠는가 하는 자각까지.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and his mother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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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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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이트 블란쳇은 어느 시상식장에서 카메라가 자신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 찍자 카메라를 향해 “Do you do that to the guys?"라고 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올해가 여성의 해라고 말하자 그는 ”Oh for fucks sake, every year is the year of the woman"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그는 아들들에게 여자를 훑어보면 안된다고 얘기한단다.

 

2-0

 

“2년을 열렬히 연애하고 또 3년을 같이 산, 빗방울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송이처럼 서로를 쓰다듬었던, 자신들을 반씩 닮은 예쁜 딸을 낳은 아내가, 아무래도 아내 같지가 않았다.” p.14

 

딸아이 하나를 키우는 전업주부 82년 생 김지영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빙의된 무속인처럼, 그는 자신의 친정 엄마가 되었다가, 아이를 낳다 죽은 선배가 되었다가 한다. 그냥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말투며 행동이 아예 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3-0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새벽 두 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다. 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브라까지 푹 젖었다. 기름기 많은 제사 음식의 특성상 제사설거지는 뜨거운 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섹수술을 하고 좋은 점 중 한 가지가 제사설거지를 할 때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뭐, 말 다 했다. 땀으로 찔꺽이던 고무장갑을 벗고 비누로 손을 씻었는데도 고무 냄새가 가시지가 않는다. 그나마, 내 노동은 이게 전부이지만 저 주방에 앉아 뭘 그렇게 치우시는지 늙은 엄마의 일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어제도 오늘 할 일들을 준비하느라 새벽 3시를 넘기셨었다.

 

2-1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궁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아이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당해 온 것도 억울한데, 친구를 오해하는 나쁜 아이가 되기까지 했다.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p42.

 

초등학생 김지영 씨, 남자 짝에게 오래 괴롭힘을 당해 오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그 사실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저렇게 얘기를 하신다. 그게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3-1

 

여름 제사에 단술을 왜 자꾸 하는 거예요? 이 무거운 걸 불 위에 올렸다 내렸다...

느 증조할머니가 당신 제사에 다른 건 몰라도 단술은 꼭 올리 달라 했다카잖아.

엄마한테 직접 카신 거라?

야는 머카노..나는 느 증조 할머니 얼굴도 못 봤는데. 할머니가 카싰지.

그라마 나는 못 들어서 못 하겠소, 카지.

‘그믐 제사 몸써리 난다, 나는 보름에 죽을란다’ 캤던 양반이, 그래서 진짜 보름에 떠난 양반이, 그렇게 자손들 위한다믄 나 죽거든 아예 제살랑은 지낼 생각 말고 시원한 물이나 한 사발 떠 놔라 카실 일이지..

 

2-2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p.68

 

고등학생 김지영 씨, 뒤따라 붙는 치한을 낯선 여자의 도움으로 따돌렸는데, 놀란 마음을 위로는 받지 못할망정 아빠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3-2

 

엄마들은 10시에 모여 커피를 한 잔씩 하고, 둘러 앉는다. 젊은 엄마들은 꼬지, 동그랑땡, 우엉전 같이 비교적 쉬운 걸 부치고, 늙은 엄마들은 오징어 튀김, 배추전, 부추전, 무전 따위를 부친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간장에 졸이고, 조기를 굽고, 콩나물과 숙주나물,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를 다듬고, 탕국을 끓이고, 수육을 삶는다.

그러다가, 끼니 때가 되면 전 부치는 기름 냄새와 연기 때문에 눈이 다 맵다고 거실에 앉아서 투덜대는 아빠들에게 밥을 차려 내간다.

제사상을 받으시는 분들은 모두 그 아빠들의 조상들이다. 젊은 엄마들은 심지어 그들 중 누구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

 

 

2-3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p.101

 

아..성별이 가장 큰 직책이고, 가장 강한 무기이고, 가장 높은 벼슬인 아저씨들.

 

3-3

 

제사는 자시가 시작되는 11시에 지낸다. 엄마들은 접시에 음식을 담고 아들들이 그 접시를 제사상으로 옮긴다. 제사가 끝나면 다시 둘러 앉아 음복을 하고, 제삿밥을 먹는다. 그 시중도 물론 모두 엄마들 차지다. 아빠들은 절 몇 번 하고, 이미 지쳤다.

이제 남은 설거지는 늙은 딸 몫이다. 그게 3-0의 상황이고, 그 상황은 이미 종료다.

 

2-4

 

아기는 새벽 4시에 태어났다. 아기가 너무 예뻐서 김지영 씨는 진통할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하지만 예쁜 아기는 안아 주지 않으면 밤이고 낮이고 울기만 했고, 김지영 씨는 아기를 안은 채 집안일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잠도 자야 했다. 아기에게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이면서, 그래서 두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하면서, 예전보다 더 깨끗하게 집을 청소하고, 아기의 옷과 수건들을 빨고, 젖이 잘 나오도록 자신의 밥도 열심히 챙겨 먹으며 김지영 씨는 태어나 가장 많이 울었다. 무엇보다 몸이 아팠다. p.148

 

이 이후로, 아이를 키우며 김지영 씨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플 것이다. 그리고 김지영 씨는 그 아픔을 이겨 낼 것이다. 실제로 82년 생 여자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이라는 김지영 씨, 내 엄마이기도 자매들이기도 한 김지영 씨, 지나 온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 김지영 씨, 읽고 있던 <피의 꽃잎들>을 잠시 덮게 한 김지영 씨, 아닌 건 아니라고, 아픈 건 아프다고 말하라는 김지영 씨.

 

3-4

 

다음 주도 제사고, 그 다음 주도 제사다.

 

 

4

 

나는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휴머니스트다.

아니 나는 ‘무슨 주의자’ 라기도 우스운 그냥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대해, 으레 그래 왔던 일들에 대해, 그래서 별 생각없이 지나치던 일들에 대해 ‘그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 감사함을 표할 줄 알고, 그들의 용기에 박수쳐 줄 줄 아는 조금은 바른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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