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반쯤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싸주신 반찬이 있으니 국만 끓여 상을 차리기로 결정, 새벽에 입맛이 이상한걸까? 평소 잘 끓이던 쇠고기무국의 맛이 영 이상하다. 남편도 뭔가 이상하단다. 5시 조금 넘어 그래도 꾸역꾸역 밥을 먹는 남편, 말로는 행복하다지만 먹는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남편이 출근하기 전까지 기다렸다 6시쯤 잠이 들었다. 8시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고 도저히 일어나기 힘들어 이불 속에 눈을 감고 누워 있으니 아이들이 밥 달란다. 미리 해둔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차려 아이들 밥을 챙겨주는데 입안이 깔깔하다. 잠을 못 잔 사람의 특유의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부랴부랴 준비하고 유치원으로 어린이집으로 갔다.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돌아와 머리가 빙글거려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잠이 들었다. 중간에 어렴풋이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계속해서 잠을 잤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나니 신경질이 잔뜩 났다. 이게 뭐야? 해야할 일은 산더미같은데...오늘 저녁에 언니랑 영화도 봐야하는데...해야할 일들을 하지 않으니 집안이 엉망이다. 어제 사온 땅콩을 까먹는 아이들은 여기저기 땅콩껍질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녔다. 이럴땐 아이들이 빨리 자랐으면 좋겠다. 제발 조신하게 앉은 자리에서 먹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제 작은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온다는 <만추> 영화 시사회표가 있다고, 15세 관람가라 조카와 가지 못한다고, 그래서 내가 얼른 가겠다고 했다. 요즘 현빈에게 푹 빠져 있는 내가 <만추>를 마다할리가 없지 않은가.
전번달엔 언니네 집에 온 가족이 몰려가서 언니와 전철을 타고 갔다가 다시 언니네로 돌아와서 우리집에서 종로3가 서울극장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정확히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7시 30분까지 갈 생각으로 5시 50분쯤 집을 나섰다. 작년 12월에 개통한 경춘선을 이용하는게 더 나을거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집앞에서 버스를 타고 마석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상봉역에 내려 중앙선을 갈아탄다. 그리고 회기에서 내려 종로3가역에서 내리면 된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시간이 7시 10분쯤 되었다. 나오는 출구를 확인하지 않고 와서 출구 찾느라 주변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는데 술 취한 할아버지가 와서는 뭐라고 뭐라고 자꾸 말을 거신다. 술에 취하지 않으셨다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좀 겁이 덜 났을텐데, 술 취한 사람 상대하기 싫어 엉뚱하게 급하게 아무 출구로 나갔더니 피가디리였다. 피가디리 건너편이 서울극장이니 다행이다 싶었다.
일찍 도착해서 언니랑 커피 한잔 마시며 여유도 부리고 오히려 좋았다. 오늘 조카가 졸업했는데 졸업식엔 못 갔다. 두번이나 서울 나들이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영화는 다음에 보고 저녁이라도 먹자고 했지만 언니네는 시댁 둘째형님네랑 저녁을 먹는다고 해서 주말에 졸업축하해주자고 미루었다. 원하는 선물 이야기해보라니 중학교 올라가니 가방이랑 신발이 필요하단다. 남편은 마음에 드는 신발 사주자고한다. 주말에 만나서 함께 쇼핑해야겠다. 축하인사는 전화로 간단히했는데 녀석 너무 쿨하다.
잘 생긴 현빈과 예쁜 탕웨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젊고 잘 생긴 영화배우에 빠진 아줌마가 되어가는 것 같지만, 영화 자체도 좋았다. 어떤 배우가 연기를 했다고 해도 아마 좋았을 거라고 말했을 것 같다.
늦은 가을은 쓸쓸하다. 화면도, 두 사람도 모두 쓸쓸해보였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일까. 웃고 있었지만, 이제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전혀 괜찮은 상황이 아닌 훈,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애나. 무엇이 옳다고,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 두 사람이 그 순간만큼은 위로가 되었다면 좋겠다.
늦은 가을 바람이 불어온다. 인생의 어느 순간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들은 그렇게 스쳐 지나갈뿐이다.
다시 만나기를 바라지만, 인생이 또 그렇듯 다시 만날 수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계속 무겁게 진행되던 영화 중간 관객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대체 그 웃음 뒤에 눈물은 또 왜 나오는지......
영화를 보고 나오며 언니도 재미있었단다. 만족스러운 영화관람을 마치고 전철에서 언니는 동대문역에서 내려 헤어지고 나는 회기에서 상봉으로 상봉에서 경춘선을 탔다. 1분차이로 열차를 놓치고 19분을 기다려서 다음 열차를 타고 마석역에 내렸다. 역앞이 한산하다. 역시 시골은 시골이다. 역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깨끗하게 씻겨 재우고 남편도 잠을 잔다. 어느새 아이들이 자랐다. 엄마가 없어도 잠을 자며 기다릴줄 알게 되었으니 다행스럽다. 내일 아침엔 남편에게 밥은 못 챙겨줄 것 같다. 내일은 저녁에 온가족이 다른 지인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우리집이 2차 장소가 될 차례다. 그러니 내일은 반짝반짝 청소 좀 하고, 아이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
전철을 이용하면서 읽을 책을 한권 가방에 넣어갔다. 여행가고 싶은 마음이 들때 가끔 들쳐보다가 본격적으로 읽을 요량으로 요새 자주 손을 대고 있는 <굴라쉬 브런치>이다.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여행에세이라 우선 부담감은 적다. 글쓴이의 문체가 맘에 들었다가 말았다가 그런다. 뭐랄까 글을 쓰는 언어와 말을 하는 언어는 조금 다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말을 하는 언어가 편안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여행에 굶주려 있는 요새 푸른 바다 실컷 보고 싶다. 겨울바다는 놓쳤으니 정겨운 봄바다라도 보러가자고 졸라봐야겠다.
이런, 언니랑 마시고 온 커피탓에 잠이 오질 않는다. 그래도 일찍 잠을 청해봐야겠다. 어제 부족했던 수면을 더 채워야할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