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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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클래식 곡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와 베토벤 교향곡 7번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클래식 보다는 바흐를 연주한 자끄 루시에의 연주를 듣고 나서 이 곡에 푹 빠져 버렸다. 한참을 자끄 루시에의 편곡을 듣다가 이 곡에 대한 관심을 늘렸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바로 글렌 굴드의 1955년 녹음과 1981년 버전이다. 그 후 한참을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CD 플레이어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지금은 다른 연주자들의 앨범을 갖춰놓기는 했지만 아직 누구의 연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초보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자끄 루시에의 곡은 재즈로 해석이 되었기 때문에 쉽게 구분이 가능하지만.

 

글렌 굴드의 1955년판은 앨범재킷에서 부터 독특하다.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사진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심들 속에서 스치듯 살펴본 정보에 의하면 초기 연주를 제외하고는 대중앞에서 연주하지 않고 스튜디오 녹음만 했다는 그리고 행동이 조금은 독특했다는 점이다. 그 말은 마치 그가 피아노 연주의 절정을 위해 혼자만의 길을 걸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그를 책으로 만났다.

 

"손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에 속해 있었다.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더 이상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피아노 속에 자신을 지우고 융해시켜 버리려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은 글렌 굴드'가 아니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이다." (76쪽)

 

이렇게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 자신이 피아노 솔로, 음악 그 자체로 말이다. 음악가에게 있어 이런 평가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전설이 되어 갔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그즌 청중과 결별하고 스튜디오에서 녹음만 하게 된다.

 

이런 전기를 통해 만나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이다.

"우리는 흔히 그가 누구보다 좋아한 음악가는 바흐였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그가 좋아한 음악가는 올랜도 기번스였다. 정확히 말해 그의 간결성을 좋아했다. 그리고 시벨리우스를 좋아했던 것은 그 차가움에 있었다. 그러나 굴드의 바흐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우리가 갈망이나 기억을 지녔다고도 추정하지 않는 것들의 수수께끼 같은 명징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음악은 우리가 듣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듣는 무엇이 된다."(179쪽)

 

역자 후기에서 지은이의 책 구성 방식이 골든베르크의 그것을 따랐다고 한다. 그제서야 나는 숫자들과 그리고 아리아라는 제목을 기억했다.

 

이 책은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보통의 전기물들이 보여주는 역경을 딛고 바로 서는(혹은 성공에 이르러는)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의 마음을 앗아가는 그런 일반적인 전기의 양식과는 다르다. "더 잘 연주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 이것이 굴드의 미학이다."(99쪽) 굴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 지은이는 마치 이런 말을 하는 듯 하다. 아마도 이 책이 일반적인 전기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면 끊임없이 자신의 정신과 싸우고 육체적인 질병과 싸우는 동안 음악을 통해 해방감을 맛보았던 글렌 굴드가 그려졌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글렌 굴드를 왜곡하는 것이다. "굴드가 콘서트를 비난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청중의 존재로 인해 그의 연주가 왜곡된다는 점이다."(152쪽)  굴드를 왜곡하지 않기 위해 그가 연주회장을 버리고 스튜디오에 매진했던 것 처럼 그렇게 독자로써 전기를 읽는 즐거움을 버리고(즐거움이라는 왜곡) 끈기있게 읽어나가야 굴드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독특한 미학을 가지고 있다. 바로 피아노와 거리두기이다. 그는 연주를 위해 수 없는 연습보다 연주를 생각했다. "더 잘 연주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 이것이 굴드의 미학이다. 시토회 수도자 토마스 머튼의 개념과도 비슷한 후퇴의 미학. 사람들과 거리를두고, 피아노 자신과도 거리를 둘 것. 그는 녹음이 있기 며칠 동안 자신의 피아노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피아노는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로 연주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연주하는 것의 정신적인 형상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의 손가락의 속박 사이에 일종의 투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손가락의속박에서 우리가 해방된다."(99쪽)

 

손가락과 피아노라는 물리적 속박에서 음악을 해방시킨 글렌 굴드는 음악의 본연에 집중한다. "굴드의 미학은 발견을 돕는 미학이다. 본능적으로 연주가들은 제거하기보다는 첨가하는데, 그의 미학은 제거하는 편을 택한다. 영감이라든지 단숨에 해치우는 것을 경계하고, 오랫동안 해석이 있은 다음의 연주, 분명 이런 것이다. (101~102쪽)... 그는 우회를 통해 정수에 도달한다. 그리고 욕구의 긴장을 통해서가 아닌(그렇다고 긴박감도, 방법론도 제외시키지 않으면서)일종의 순화를 통해 미(美)를 건드린다.(102쪽)... 그래서 장식적인 기능을 삭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바흐의 장식음들을 그는 마치 장식음이 아닌, 악절의 다른 음들과 똑같은 멜로디와 화음의 가치를 지닌 음들처럼 연주한다. 이들의 필연성과 절박함을 발견하기 위해서인양, 분해되어 나온 뚜렷한 음들로 천천히 연주한다. (103쪽)"

 

굴드가 그렇게 음악의 미학에 빠져들고자 했던 것 처럼, 미셀 슈나이더는 글렌 굴드와 관련된 삶과 그에 대한 소문보다는 글렌 굴드의 음악에 빠져들고자 했다. 사실 그래서 이 책을 두 번 읽게 되었다. 여느 전기처럼 책을 읽으면서 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번째 천천히 읽어내며 미셀 슈나이더를 통해 글렌 굴드의 음악에 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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