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 1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1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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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본적인 취지야 십분 이해한다.
좋은 시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는 것.

그렇지만, 문제는 기준이다.
이 작품들을 선정한 이유도, 설명도 없다.
저 모든 기준은 김용택이라는 인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역시, 김용택이라는 인물이 선정자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오랜 시작활동과 감식안 자체를 좋은 선정자가 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준과 설명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詩라는 장르가 점점 일반 독자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요즘,
이런 식으로라도 시에 호감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것만은 변함이 없다.

단지, 조금만 더 자세했다면,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여기 선정된 작품들이 왜 좋은 시이고,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감상해야 하는지,
보다 자세하게 설명했다면,
보다 명확한 기준과 이유를 가지고 제시되었더라면,
훨씬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구태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쉬움 마음이 40에,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어서 기쁜 마음 60으로 버무려진 책이라고 할까?

아마도 나의 아쉬움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좋은 것이 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어쩌랴? 때로는 맹목적인 미움보다도 애증이 더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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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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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는 풍문(風聞)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분명히 세상 어딘가를 끊임없이 흘러 다니고 있지만, 그 정체는 확인해 볼 도리가 없는 것들. 그것들은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의혹에서 의혹으로,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증폭되고 또 증폭되어 간다. 쇠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몸이 커져가는 불가사리처럼.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풍문을 다루고 있다. 풍문이 가지고 있는 의구심을, 풍문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풍문이 가지고 있는 공포를. 그것은 물론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아니다. 공포/그로테스크/미스터리 등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장르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다. 기괴하고 두렵고 잔혹한 사실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풍문을 다루는 것.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살인과 도륙이 난무하는 것들, 무차별적인 학살로만 점철된 것들, 이를테면 '13일의 금요일'이나 '스크림', 혹은 '주온' 따위의 것들은, 공포 장르라고 할 수 없다. 의미 없는 살인, 의미 없는 방화, 의미 없는 쾌락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엽기(獵奇)에 지나지 않는다. 항간에 유행하는 가벼운 의미의 ‘엽기’가 아니라, 사전 그대로 ‘기괴한 것이나 이상한 일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다니는 변태적인 행각’이라는 뜻에서의 엽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최근의 경향이 공포/그로테스크/미스터리 등과 엽기를 구분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무서움을 만들어내는 원인에 대한 성찰이 되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끝없는 '양(量)의 가속논리', 즉 더 큰 흥미를 주기 위해서 점점 더 잔인한 방법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미 이러한 '양의 가속논리'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지루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혹은 지루함을 극복하고 공포 장르의 정수를 파악할 수있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교육이다. 해답은 교육밖에 없다. 클래식 음악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반복해서 음악을 듣고, 음악사적 사실을 학습하고, 음악이론을 습득하면서 나름대로의 재미를 찾아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장르문학에 대한 독서행위도, 문학의 이론이나, 장르적 특성과 본질, 혹은 창조행위를 경험하면서 보다 고품질의 장르문학을, 더 나아가서는 문학 그 자체에 대한 감식안을 높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의 논의, 특히 인터넷을 통한 논의에서, 어려운 문학작품을 죄악시고, 그것이 마치 현학적인 태도에 불과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그렇지만,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잘못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현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도 잘못이지만, 자신의 수준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현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도 잘못이지만, 자신의 수준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어렵다’/‘지루하다’는 말만 거듭하는 독자들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한쪽만 변해서는 소용이 없다. 작가와 독자가 모두 변해야한다. 작가들도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하고, 독자들도 자신들의 무지를 깨우쳐 나가야 한다. 문제는 교육이다. 교육이 없으면, 문화의 발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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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킨트
배수아 지음 / 이가서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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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되어버렸지만, 소설에서 역사의식 따위는 없어도 된다. 아니 없는 편이 좋다. 그런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설에 헛바람을 집어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면서, 기껏해야 소설에 불과하면서, 마치 자기가 역사책이나 철학책이나 심지어는 경전이라도 되는 듯이 뻐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없는 편이 좋다. 사회문제에 대한 고발의식 따위도 없는 편이 좋다. 고발이아나라 소설은 신문기사나 르포가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소설 따위에 왜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는가?

소설은 소설이다. 소설은 그저 이야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배수아의 소설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한다. 소설은 소통이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설이 될 수 없다. 소설이 역사책/철학책/경전이 아니고, 신문기사/르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기장이나 낙서장도 역시 아니다. 소설은 작가 자신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어야 한다. 설령 그 속에 역사의식이나 사회비판의식 따위가 없더라도 말이다. 적어도, 혼자만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배수아의 소설이 가진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의 소설은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글쓰기가 근본적으로 개인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아니, 개인적인 정도가 아니라 폐쇄적이기까지 하다.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립이란 정말 멋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쾌락의 차원이다. 그것을 찬미한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진정 고립을 모르거나 혹은 나약하게 겁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고립에 대한 찬미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고발이라거나 소통에 대한 그리움인 것으로, 정 반대로 왜곡되곤 한다. (글이 서툴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방법에 있어서 나에게는 대개의 경우 선호하는 몇 가지의 사소한 방법이 있는데, 동일시하거나 비판하거나 개입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가능한 한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고립이란 그것과 비슷하다. 고립이란 반드시 혼자 지낸다거나 배타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고립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동물원에 간다']

인용된 부분처럼, 작가는 스스로 고립되어 있으며 그 고립을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고립이란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대부분의 것이 용납이 되는 요즘 세상에서 혼자 동떨어져 살겠다는 태도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더구나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고립, 혹은 폐쇄적인 삶이란 때로는 제법 매력적이기까지 한데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립을 글로 쓰게 되면, 그러면서 고립의 이유를 밝혀주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왜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야기, 더구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니까. 혼자 고립되고 혼자 속삭일 것이라면 구태여 소설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설이니까, 소설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이야기이며, 소설이란 기본적으로 소통이니까. 차라리 일기를 써라, 그도 싫으면 글쓰기 따위 하지 말고 포르노나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던가.

요즘 들어 마치 고립을 자랑하는 듯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립이라는 것은 용인 받을 수는 있어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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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형 인간 -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사이쇼 히로시 지음, 최현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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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지쳤을 때, 그와 함께 몸이 지쳤을 때,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좋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자기최면을 거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야 말로 타당하기 짝이 없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진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는다.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내용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잠시 잠깐 잊고 있었던, 새삼스러운 진리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아침형 인간>역시 새삼스러운 진리를 다룬 책이다. 늦잠 자지 말고 일찍 일어나라!”이야말로 동서고금의 변함없는 진리이자, 부모님들의 단골 잔소리가 아니었던가? 이 책의 내용은 그런 잔소리에서 단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작자는 책의 처음부터 다소 과격한 사례를 들면서 잔소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이 “옆집 아이들은 말이다……”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문제는 이런 잔소리가 대중에게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맞다. 사실이다. 이제 좋았던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우리 세대는 이전 세대가 경험한 것 이상의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하필이면 이런 시대에 일상을 가꾸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 세대의 운명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단지 이 시대에 부합하는 내용을 다룬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 책을 사고-읽고-동감하는 우리들은, 이 땅에서 직업을 가지고 혹은 가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잔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위험하고 고단한 시대가 아닌, 먼 옛날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에 부모님에게 들었던 그 잔소리를 다시 한번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아침형 인간>이라고 되어 있지만, 11시 취침 5시 기상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새벽형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시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아마도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중시하고, 우리보다 덜 과격한 술자리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식 생활에 적합한 주장일 것이다. 우리야 밤 11시에 집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힘든 나라가 아니던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아침형 인간>이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적인 특성상 밤에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 그런 경우라면 규칙적인 하루를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일 것이다”(p.29.)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이 어떻게 동일한 패턴으로 살 수 있겠는가?

결국 이런 주장은 다소 힘들었던 삶의 국면에서 잠시 쉬어가는 오아시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아시스가 아무리 많아도 길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닐 터, 결국 걸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이미 아침형 인간과는 다른 저녁형 인간에 관련된 책도 나오고 있으니,<퇴근 후 3시간>(니시무라 아키라 지음, 해바라기)라는 책도 같이 읽어본 뒤에, 자신이 아침형 인간인지 저녁형 인간인지를 파악해보는 것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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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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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작품이 판타지소설의 효시가 되는지, 읽고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웅장한 전투 장면묘사, 각 종족의 언어까지 만들어낼 정도의 치밀한 설정,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종족들의 관계 등등, 실로 이 작품의 가치는 ‘처음’이라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이를테면 작가의 상상력이나 세계관이라고 할 만한 부분에 있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임무의 고차원성이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탁월함이다. 절대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파괴하려는 의지와 그 힘을 이용하여 눈앞의 난관을 회피하려는 욕망의 대립, 이것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갈등요소이며, 이 작품을 단순한 英雄騎士談에 그치지 않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파악하자면, 절대반지를 파괴하려는 행위는 고결함에 대한 욕망이고, 그것을 활용하여 난세를 평정하려는 행위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권력에 대한 욕망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자칫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세상과 가치관을 무시하기 쉬운, 매우 위험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작품은 이타성(利他)과 이기성(利己)의 대립을 근간에 깔고 있다. 거기에 이기적인 욕망에 대한 경고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작품의 주인공이 현명한 마법사인 간달프나 용맹한 요정인 레골라스가 아니라, 현명하지도 못하고 전투능력도 뛰어나지 못한 호빗족의 네 인물 ― 샘, 메리, 프로도, 피핀이라는 점도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은 지극히 약한 자들로 쉽게 이기성, 고난을 회피하려는 욕망에 빠져버릴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이타성을 잃지 않고서 눈앞의 고난과 대적한다. 이들의 행동이야 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직접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잠깐, 나는 샘, 메리, 프로도, 피핀이라고 했다. 맞다. 이것이야 말로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순서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프로도가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이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비록 반지를 차지하려는 유혹에 흔들리고,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보다 강한 인물로 단련되지만, 그는 별로 성장하지 않았다. 그의 심성은 태초부터 고결했고, 마지막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다. 그와 함께 했던 다른 친구들의 성장과 비교해본다면, 오히려 그는 종국에 허무적인 방랑벽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프로도야 말로 네 명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자라지 못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샘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이다. 그는 아주 비천하고 능글맞은 하인에서, 주인을 보호하는 조력자로, 나아가 주인의 임무를 대신하는 대리자로, 끝내는 자신의 고향을 되살려내는 당당한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그는 절대반지의 유혹을 받고, 각종 고난에 직면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이겨낸다(단순히 이겨냈다면 대단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주인까지 함께 이겨내도록 이끈다).
샘이라는 인물이야 말로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메리의 성장 역시 눈부시다. 그의 성장은 다소 단순한 단계를 밟고 있기 때문에 샘보다 앞서지 못했으나, 그 성장의 진실성으로 파악하자면, 다른 어떤 인물을 능가한다.
그는 겁쟁이이면서 무능력한 인물이다. 그런데 탁월한 점은 자신이 그런 인물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려하고,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끝내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고난에 당당하게 맞선다. 비록 그에게 있어서 전투다운 전투는 단 한번에 불과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칼을 들어 힘껏 내리찍은 것은 적장(敵將)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이었기 때문이다.

성장, 이처럼 성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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