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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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태생이 원초적 체험을 만들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가 창조한 인물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자연에서 자란 작가가 만든 인물과 도시에서 자란 작가가 만든 인물은 다르다. 자연을 원초 체험으로 삼는 작가의 인물이 고향을 이상향으로 품고 있는 반면, 도시를 원초 체험으로 삼는 작가의 인물은 이상향을 가지지 못한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일상에서야 다른 점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차이가 난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들은 마을공동체적 관계를 기본으로 하지만, 이상향이 없는 사람들은 개인적 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둘의 차이가 극명해지는 것은, 절망의 순간에서이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들은 절망에서도 돌아갈 곳이 있다. 고향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진정으로 절망하지 않는다. 아니, 고향이 사라졌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 현실의 고향은 사라졌더라도, 그의 기억 속에 고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절망한다.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기에 그는 절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애초부터 잃을 것이 없었으니까.

시대가 변했다. 작가들도 대부분 도시 태생이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붕괴되었고, 산업화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모든 곳이 도시가 되어버린 마당에, 그런 이분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오롯이 혼자다. 폴 오스터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은 혼자 살고 혼자 절망하고 혼자 절망을 이겨낸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이 절망 앞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절망 속으로 추락하고 추락하고 또 추락해서 바닥까지 떨어진다. 이것이 그의 인물들이 가진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찾아왔다 쉽게 떠나가는 거리, 그 거리의 모퉁이에서 그들은 버티고 있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기 위해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 오기 렌이 담배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어, 스쳐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 속에 담아두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도시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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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3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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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 하나의 상품, 하나의 아이템, 하나의 콘텐츠다. 그 동안 끊임없이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콘텐츠로의 역사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 그렇지 않은가? 나는 역사와 관련된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등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왜 삼총사가 거리를 달리던 프랑스의 절대 왕권 시기는 분위기 있어 보이고, 왜 도포자락 휘날리면서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를 부르는 소호강호의 주인공들은 운치가 있어 보이고, 왜 일본도를 들고 설치는 무사시의 모습은 멋있어 보이는가?

사실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소재를 발굴해서, 작품을 제작했고, 마케팅했고, 해외에 소개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뿐이다. 역사와 인문학적인 콘텐츠의 가치는 얼마나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프로이트가 고대 그리스의 연극을 심리학 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외디푸스'라는 인물은 지금처럼 가치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김용이라는 작가가 중국의 역사와 호걸담을 집약하지 않았다면, 중국 영화의 소재는 훨씬 빈약해졌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 전통, 문화적 전통에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차이는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다모(茶母)'에 주목한다. 특히 처음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격구(擊毬)는 우리의 숨은 문화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역사스페셜'이라는 TV프로그램도 그런 맥락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종영되기는 했지만, 이 프로그램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조명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했는가? 그저 국사책에 나오는 연대만 외우는 것에 급급했지, 그 이상의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보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문화를 콘텐츠로 만드는, 그것이 문화를 산업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문화 창조자로의 작가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화는 창조자에 의해서 가치가 만들어진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문화는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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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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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무분별한 발전이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보호와 보존이 필요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너무도 뚜렷한 가치명제가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너무도 당연한 것, 너무나 확연한 선악의 구분, 너무나도 정당한 가치, 그렇기 때문에 소설로 만들어지기 힘든 문제가 된다. 소설이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흔들리고 변화하는 사실을 옹호하는 법이니까. 소설이란 확고한 의지의 영웅호걸이 아니라 끊임없이 번민하는 보통 사람들의 편에 서는 법이니까. 소설이란 큰 목소리로 외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이니까. 아무렴, 그렇지 않은가? 소설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서 환경문제를 다루기 힘들다.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기 힘든 것처럼. 그것이 너무도 명쾌한 논리이기 때문에, 조금의 반박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이슈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환경문제를 언급하는 인물이 영웅화되기 쉽고, 그의 목소리를 주장이 되기 쉽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경에 대한 문제를 소설이 포기해야 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소설이란 또 한 편으로 현실에 대한 공격의지를 불태우는 강력한 저항수단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거짓으로 보다 큰 진실을 내보이고, 낮은 목소리로 더욱 큰 공감을 불러온다.

우리는 흔히 소설가를 사회적인 양심을 가진 지식인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구분이 때로는 과도한 멍에로 작용하기도, 추악한 위선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소설이란 결국 사회의 문제, 인간의 문제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문제를 다루는 소설이 끊임없이 창작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환경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왜 다른 사회적인 문제들에 비해서 환경문제를 다룬 소설은 작품의 양으로도 질로도 빈약하기만 한 것인가? 물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하나는 작가들의 무관심과 무지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작가들은 보다 고민해야 한다. 보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다 귀를 기울이고, 보다 고통을 받으면서, 현실의 문제와 부딪혀야 한다. 문제의 외각을 돌기만 하는 아웃복싱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으로 파고들어 맞붙어 싸우는, 그래서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 않는 인파이터(Infighter)가 되어야 한다.

이 작품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인파이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에서도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끊임없이 이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것도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자근자근, 영웅호걸이 아니라 항상 흔들리고 약한 인물들을 통해서. 바로 그런 점이 그와 그의 작품이 환경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또한 다른 작가들이 그에게 배워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인파이터, 세상에 대한 인파이터. 작가가 택할 수 있는 스타일은 오직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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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열매술꾼 열림원 이삭줍기 1
아모스 투투올라 지음, 장경렬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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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부했다. 제법 완강한 몸짓으로. 그 행동들에 거짓이 섞여있었을까? 아니,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감정과 신념에 충실했을 뿐이다. 비록 그러했기 때문에 나의 거부는, 논리적이고 행동적인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감정적이고 독자적인 성향에 그치고는 말았으나, 그 시도 자체에는 거짓이나 욕심이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나는 거부한다. 거부하고 있다.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들에 대하여. 그것들은 거미줄과 같아서,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금세 내 마음 속, 머리 속 한 귀퉁이를 점령하기 마련이다. 자주 거미줄을 걷어내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들은 마음껏 날아다닐 수가 없으며, 정도가 심해지면 단단하게 굳어버려 내 스스로 편견덩어리가 되어버린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것들의 위험을 너무나 많이 보고자랐다. 그랬다. 나는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문학은 자유로운 것이라고 믿어왔다. 문학에 있어서 고정된 가치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하기에 고정적인 형식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내 머리 속에는 고정된 '문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동안 내가 제도권 교육의 틀 속에서 배워왔던 '문학'은, 유럽식의 문학이었다. 유럽식 문학의 전형은 잘 짜여진 형식(well made form)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논리정연한 구조와 치밀한 복선을 근간으로 한다. 그만큼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기반에서 문학이론이 전개되어 왔다는 증거일 터.

하지만, 한편으로 문학은 감성과 닿아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문학적 전형은 항상 새롭게 짜여졌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의 안티로망이나, 중남미문학의 환상성(magic realism), 구미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모두 그러한 노력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문제성을 가진다. 서구적인 문학전통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한없이 낯설게 보인다는 점. 그럼으로써 새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독서가 끝난 뒤에 이것을 과연 문학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 분명히 새로운 작품이긴 하지만, 아직은 감성적인 동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문학적 규범을 모두 부정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문학이란 작품과 독자 간의 커뮤니케이션, 즉 감정의 공유라는 것.

불행히도 이 작품은 나와의 공유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이 작품 자체의 문제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자신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껏 아프리카의 문학적 전통을 가진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문학 속의 아프리카라고는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쿤타킨테와 오두막을 가지고 있는 톰 아저씨 밖에는 없지 않은가? 서구인들의 눈으로만 아프리카를 보아왔던 것이다. 이것이<대지>에 나오는 왕룽일가의 삶만을 읽고서, 아직까지도 중국인들이 그렇게 살고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다시 한 번,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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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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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버렸다. 그건 분명하다. 이젠 아무도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물론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고, 가끔씩 종말과 구원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하철역에서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신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낡은 것처럼 보인다. 논쟁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정치적 대담이 있고, 각종 심포지움이 개최되고 있으며, 늦은 밤 TV에서는 각종 토론 프로그램이 난무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열정적으로 논쟁을 하는 사람은 낡아빠진 유행처럼 보인다.

왜 이런 것들이 낡아버린 것일까? 사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난 시절이나, 논쟁을 통해 사람을 마녀로도 성자로도 몰았던 시절이나, 본질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종말을 두려워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들을 낡았다고 한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 그것은 본질적인 것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속도에 익숙해져버렸다. 천천히 산책하면서 하늘을 바라볼 시간은 없어지고, 철도와 비행기로 재빠른 여행에 익숙해졌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묵상을 할 시간은 없어지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바쁜 출근시간에 익숙해졌다. 결정적인 것은 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 혹은 논쟁은 밝은 대낮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촛불을 밝혀놓고 혼자 앉은 시간,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대화, 그리고 술취한 다음 날 아침에 밀려드는 자괴감, 이런 것이 고민과 논쟁을 만든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이 없어졌다. 혼자 있는 밤이 사라져 버렸다. 인터넷, TV, 심야의 헬스클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밤시간을 빼앗아 버렸고, 그와 함께 신에 대한 고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논쟁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를 가진다. 사라진 논쟁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점. 끝나지 않은 것을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사라지지 않은 것을 사라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계속되고 있는 것을 계속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더구나 신을 믿는 사람들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 둘 중의 어느 한쪽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이 논쟁을 벌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 사람들이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코와 차기 교황으로 거론되는 마르티니 추기경이라면, 이보다 막상막하인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동안의 논의들이 가졌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토론이 꼭 결론을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구나 이런 종류의 토론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논의가 전혀 근접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사실 토론은 비슷한 패러다임을 가진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전혀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토론은 주장의 반복에 그칠 뿐이 아닌가. 물론 입장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서로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치는 있다. 하지만 결론 맺을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그래서 비슷한 말들의 반복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질리게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논쟁과 신에 대한 문제에서 멀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한계가 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문제가 가지는 한계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런 한계를 뻔히 알면서도 이런 종류의 글을 계속 읽어야 하는가?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래야만 한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므로. 다만, 이제는 조금 새로운 형식으로, 조금만 더 새로운 분위기의 책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불구경, 물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해도, 맨날 싸우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어찌 유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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