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 바다출판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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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는 정치문제와 같아서, 항상 견딜만한 법이다.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바로 그 견딜만하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당장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견디고 견디다 보면 어느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우리의 문학에서 환경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지금 당장은 견딜만하다는 점, 그래서 작가 자신도 그 문제에 주목하지 못하고, 독자들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분명히 문학이란 사회를 향해서 민감한 더듬이를 내밀고 있는 예술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환경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 있었고, 김원일의 <도요새에 관한 명상>과 같은 작품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유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 위에서 언급한 이유가 크겠지만,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과도하게) '선명한 갈등구조'이다.

환경문제는 선악의 구분이 너무나 뚜렷하다.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고, 환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선한 자들이다. 이처럼 선명한 구분은 작품창작을 제한한다. 모든 예술은 기본적으로 자유롭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현실에 작용하는 억압뿐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형식과 구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조가 만들어지고, 끊임없는 실험이 이루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무나 뻔한 구조, 너무나 뻔한 대립은 작가들에게 흥미를 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작가들에게 매너리즘의 유혹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갈등구조가 선명한 것만큼이나, 해결방법 역시 간단명료하다. 환경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다른 해결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이것도 역시 또 하나의 제약으로 작용한다. 환경문제를 다룬 우리의 문학작품들도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은 한계에 대한 하나의 해결을 보여준다. 동화야말로 갈등과 해결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관점을 벗어나 동물의 관점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를 가진다.

근대 이후 발생한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인류가 만들어냈고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환경문제만큼은 인간들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이 조금 거창하기는 하지만) 환경문제는 전지구적인,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문제이다. 이러한 인식이 환경문제를 다루는 문학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참, 이 작품의 특징을 넘어갈 뻔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재미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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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작가정신 소설향 23
신이현 지음 / 작가정신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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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다.지금은 '내가 가장 예뻐'야 할 때라는 자기도취와 그러나 나의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나는 이미 '예쁘지 않다'는 자기혐오. 얼핏 보면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 성장에 대한 변명.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성세대를 욕하다가 결국 기성세대를 닮아가는 것.집안이 어려워지자 방황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나마 제법 잘사는 축에 들었기 때문이다. 원조교제를 하고나서 자신을 더럽다고 느끼는 것은, 순결에 대한 집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꿈을 잊지못하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주인공 스스로가 낭만적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행하는 모든 방황은 뒤집어볼 수 있는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점이 바로 변명이 되는 것이다. 여지가 없는 곳에서는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여지가 있기 때문에 변명이 되는 것이다.

주인공의 종말은, 원조교제를 한 뒤에 여관에서 나오다가 남자친구의 칼에 찔려 쓰러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장면인데, 주인공과 원조교제를 하는 점박이 아저씨는 타락한 현실의 상징이고, 그녀의 남자친구는 스케이트보드에 미친 현실을 보르는 이상/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일본의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있다. 이 시는 꿈의 칼날에 찔려 피를 흘리지만, 끝내 현실의 단맛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주인공에게 바쳐지는 노래이다. 나는 특히 내가 가장 예뼜을 때 / 나는 아주 불행했고 /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 나는 무척 쓸쓸했다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이 구절이 작품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쁘지만, 불행하고 얼빠져있고 쓸쓸한 성장기. 혹은 예쁘기 때문에, 불행하고 얼빠져있고 쓸쓸해야 하는 성장기. 결국, 모든 성장은 아픈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이제 넋두리도 끝낼 때이다. 이 작품의 정점은 바로 이러한 성장에 대한 인식에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대로 이 작품의 한계가 된다.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는 것. 그것은 끝내 어른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아프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성장은 누구에게나 아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살아있으므로. 우리는 온전하게도 살아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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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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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나를 이끌었던 책이다.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다른 책을 빌려야했지만, 이 제목을 처음 본 순간, 다른 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충동적인 선택이 그러하듯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책에 미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구성을 가진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작품도 <과거의 인물이 쓴 책과 그 책을 읽는 현재의 인물>이라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두 인물 사이의 연결고리가 너무 헐겁다. 그래서 각각 별개의 이야기가 나열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군데군데 <양탄자>라는 제목으로, 책과 독서에 대한 기존의 텍스트들을 모아놓은 부분까지 있어, 가뜩이나 나뉘어진 듯이 느껴지는 구성을 더욱 산만하게 만들었다. 물론 군데군데, 번뜩이는 구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절에 의존하기에는 너무나 긴 텍스트였다. 소설이란 무엇보다 '이야기성'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것. 구절만으로 승부를 보고 싶다면, 소설이 아니라 아포리즘을 써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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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어주는 여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1
한젬마 지음 / 명진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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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읽어주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고 있다. 아니, 읽어<주다 >라는 것은 고사하고, <읽다>라는 말의 뜻도 역시 모르고 있다. <읽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읽는다는 행위는 어떠한 대상을 자신의 감각과 의지를 동원하여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읽기'는 흔히 '보기'와 구별된다. 보는 것은 1차적인 행위, 즉 즉물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읽는 것은 자신의 가치판단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예를 들어, 어떤 글을 보고나서 '재미있다' 또는 '지루하다' 등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글을 '보는' 행위가 된다. 그렇지만 그 글이 왜 재미있었는가, 혹은 왜 지루했는가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 행위는 <읽기>가 된다. 우리가 글 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광고, 그림 등등에도 '읽기'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림을 읽고 있지 않다. <읽기>라는 행위의 출발은 텍스트 그 자체에 있다. (물론, 텍스트에서 출발하여 사회문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런 경우라도 역시 출발점은 텍스트이다.) 이 책에서는 텍스트가 되는 그림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단편적인 미술사적인 정보를 제시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림을 <읽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단지 그림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그림 자체와는 별반 관계도 없는 자신의 인생역정이나 단편적인 감상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라면,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림으로 표현되었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글로 표현된 그런 부분들은 싸구려 수필집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처럼 <읽기>도 하고 있지 못하면서, 제목은 거창하게 '그림 읽어<주는> 여자'라고 달았다. 읽어<주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자신의 <읽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겠다는 의미이다. <주다>라는 말에서 교육적인 어감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감상을 타인과 교류한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싶다. 이처럼 의미를 축소시킨다고 해도, 이 책의 오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저자는 너무나 개인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읽기>도 읽어<주기>도 되지 못한다. 그녀가 읽어주어야 할 것은 '그림'이지, 다른 사람의 인생역정도 별로 다르지도 않은 개인의 과거 따위가 아니다. (그런 것을 보려면, 연예인들의 수필집이나, 정치꾼들의 자서전을 보라. 그거에 훨씬 절절하고 감상적이면서도 파란만장한 인생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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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걸작선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선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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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는 표제작인 「은하철도의 밤(銀河鐵道の夜)」이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게 심오하고도 묵시록적인 작품의 원작이 동화라는 점이 흥미를 자극했으며, '은하'와 '철도'라는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동화를 구축했을 지에 대한 궁금증이 내 선택을 부추겼다. 물론, 이 동화작품은 애니메이션의 내용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선, 신비의 여인 '메텔'이 등장하지 않는다. ^^ 동화에서는 두 소년이 함께 여행한다.) 그러나 빈민가 출신의 소년이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설정, 그리고 별에 들려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구조, 그리고 정서적인 측면 같은 요소들은 공통된다. 이 작품을 제외하고 흥미로웠던 작품은 「쏙독새의 별」이다. 무엇보다 행복한 동화가 아니었기 때문인데, 그 동안 읽었던 동화들에 대한 불만을 잘 긁어주었다. 동화라고 해서 항상 착한 사람들의 행복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왜 동화 속의 세상만 행복으로 가득한가? 아이들이 보는 작품이라고 해서, 거짓 행복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짓된 행복보다는, 뼈아픈 진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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