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3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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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 하나의 상품, 하나의 아이템, 하나의 콘텐츠다. 그 동안 끊임없이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콘텐츠로의 역사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 그렇지 않은가? 나는 역사와 관련된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등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왜 삼총사가 거리를 달리던 프랑스의 절대 왕권 시기는 분위기 있어 보이고, 왜 도포자락 휘날리면서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를 부르는 소호강호의 주인공들은 운치가 있어 보이고, 왜 일본도를 들고 설치는 무사시의 모습은 멋있어 보이는가?

사실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소재를 발굴해서, 작품을 제작했고, 마케팅했고, 해외에 소개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뿐이다. 역사와 인문학적인 콘텐츠의 가치는 얼마나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프로이트가 고대 그리스의 연극을 심리학 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외디푸스'라는 인물은 지금처럼 가치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김용이라는 작가가 중국의 역사와 호걸담을 집약하지 않았다면, 중국 영화의 소재는 훨씬 빈약해졌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 전통, 문화적 전통에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차이는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다모(茶母)'에 주목한다. 특히 처음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격구(擊毬)는 우리의 숨은 문화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역사스페셜'이라는 TV프로그램도 그런 맥락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종영되기는 했지만, 이 프로그램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조명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했는가? 그저 국사책에 나오는 연대만 외우는 것에 급급했지, 그 이상의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보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문화를 콘텐츠로 만드는, 그것이 문화를 산업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문화 창조자로의 작가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화는 창조자에 의해서 가치가 만들어진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문화는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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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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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경문제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무분별한 발전이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보호와 보존이 필요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너무도 뚜렷한 가치명제가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너무도 당연한 것, 너무나 확연한 선악의 구분, 너무나도 정당한 가치, 그렇기 때문에 소설로 만들어지기 힘든 문제가 된다. 소설이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흔들리고 변화하는 사실을 옹호하는 법이니까. 소설이란 확고한 의지의 영웅호걸이 아니라 끊임없이 번민하는 보통 사람들의 편에 서는 법이니까. 소설이란 큰 목소리로 외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이니까. 아무렴, 그렇지 않은가? 소설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서 환경문제를 다루기 힘들다.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기 힘든 것처럼. 그것이 너무도 명쾌한 논리이기 때문에, 조금의 반박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이슈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환경문제를 언급하는 인물이 영웅화되기 쉽고, 그의 목소리를 주장이 되기 쉽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경에 대한 문제를 소설이 포기해야 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소설이란 또 한 편으로 현실에 대한 공격의지를 불태우는 강력한 저항수단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거짓으로 보다 큰 진실을 내보이고, 낮은 목소리로 더욱 큰 공감을 불러온다.

우리는 흔히 소설가를 사회적인 양심을 가진 지식인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구분이 때로는 과도한 멍에로 작용하기도, 추악한 위선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소설이란 결국 사회의 문제, 인간의 문제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문제를 다루는 소설이 끊임없이 창작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환경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왜 다른 사회적인 문제들에 비해서 환경문제를 다룬 소설은 작품의 양으로도 질로도 빈약하기만 한 것인가? 물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하나는 작가들의 무관심과 무지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작가들은 보다 고민해야 한다. 보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다 귀를 기울이고, 보다 고통을 받으면서, 현실의 문제와 부딪혀야 한다. 문제의 외각을 돌기만 하는 아웃복싱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으로 파고들어 맞붙어 싸우는, 그래서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 않는 인파이터(Infighter)가 되어야 한다.

이 작품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인파이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에서도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끊임없이 이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것도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자근자근, 영웅호걸이 아니라 항상 흔들리고 약한 인물들을 통해서. 바로 그런 점이 그와 그의 작품이 환경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또한 다른 작가들이 그에게 배워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인파이터, 세상에 대한 인파이터. 작가가 택할 수 있는 스타일은 오직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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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열매술꾼 열림원 이삭줍기 1
아모스 투투올라 지음, 장경렬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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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부했다. 제법 완강한 몸짓으로. 그 행동들에 거짓이 섞여있었을까? 아니,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감정과 신념에 충실했을 뿐이다. 비록 그러했기 때문에 나의 거부는, 논리적이고 행동적인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감정적이고 독자적인 성향에 그치고는 말았으나, 그 시도 자체에는 거짓이나 욕심이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나는 거부한다. 거부하고 있다.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들에 대하여. 그것들은 거미줄과 같아서,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금세 내 마음 속, 머리 속 한 귀퉁이를 점령하기 마련이다. 자주 거미줄을 걷어내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들은 마음껏 날아다닐 수가 없으며, 정도가 심해지면 단단하게 굳어버려 내 스스로 편견덩어리가 되어버린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것들의 위험을 너무나 많이 보고자랐다. 그랬다. 나는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문학은 자유로운 것이라고 믿어왔다. 문학에 있어서 고정된 가치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하기에 고정적인 형식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내 머리 속에는 고정된 '문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동안 내가 제도권 교육의 틀 속에서 배워왔던 '문학'은, 유럽식의 문학이었다. 유럽식 문학의 전형은 잘 짜여진 형식(well made form)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논리정연한 구조와 치밀한 복선을 근간으로 한다. 그만큼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기반에서 문학이론이 전개되어 왔다는 증거일 터.

하지만, 한편으로 문학은 감성과 닿아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문학적 전형은 항상 새롭게 짜여졌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의 안티로망이나, 중남미문학의 환상성(magic realism), 구미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모두 그러한 노력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문제성을 가진다. 서구적인 문학전통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한없이 낯설게 보인다는 점. 그럼으로써 새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독서가 끝난 뒤에 이것을 과연 문학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 분명히 새로운 작품이긴 하지만, 아직은 감성적인 동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문학적 규범을 모두 부정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문학이란 작품과 독자 간의 커뮤니케이션, 즉 감정의 공유라는 것.

불행히도 이 작품은 나와의 공유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이 작품 자체의 문제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자신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껏 아프리카의 문학적 전통을 가진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문학 속의 아프리카라고는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쿤타킨테와 오두막을 가지고 있는 톰 아저씨 밖에는 없지 않은가? 서구인들의 눈으로만 아프리카를 보아왔던 것이다. 이것이<대지>에 나오는 왕룽일가의 삶만을 읽고서, 아직까지도 중국인들이 그렇게 살고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다시 한 번,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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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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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버렸다. 그건 분명하다. 이젠 아무도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물론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고, 가끔씩 종말과 구원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하철역에서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신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낡은 것처럼 보인다. 논쟁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정치적 대담이 있고, 각종 심포지움이 개최되고 있으며, 늦은 밤 TV에서는 각종 토론 프로그램이 난무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열정적으로 논쟁을 하는 사람은 낡아빠진 유행처럼 보인다.

왜 이런 것들이 낡아버린 것일까? 사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난 시절이나, 논쟁을 통해 사람을 마녀로도 성자로도 몰았던 시절이나, 본질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종말을 두려워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들을 낡았다고 한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 그것은 본질적인 것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속도에 익숙해져버렸다. 천천히 산책하면서 하늘을 바라볼 시간은 없어지고, 철도와 비행기로 재빠른 여행에 익숙해졌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묵상을 할 시간은 없어지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바쁜 출근시간에 익숙해졌다. 결정적인 것은 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 혹은 논쟁은 밝은 대낮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촛불을 밝혀놓고 혼자 앉은 시간,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대화, 그리고 술취한 다음 날 아침에 밀려드는 자괴감, 이런 것이 고민과 논쟁을 만든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이 없어졌다. 혼자 있는 밤이 사라져 버렸다. 인터넷, TV, 심야의 헬스클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밤시간을 빼앗아 버렸고, 그와 함께 신에 대한 고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논쟁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를 가진다. 사라진 논쟁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점. 끝나지 않은 것을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사라지지 않은 것을 사라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계속되고 있는 것을 계속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더구나 신을 믿는 사람들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 둘 중의 어느 한쪽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이 논쟁을 벌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 사람들이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코와 차기 교황으로 거론되는 마르티니 추기경이라면, 이보다 막상막하인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동안의 논의들이 가졌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토론이 꼭 결론을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구나 이런 종류의 토론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논의가 전혀 근접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사실 토론은 비슷한 패러다임을 가진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전혀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토론은 주장의 반복에 그칠 뿐이 아닌가. 물론 입장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서로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치는 있다. 하지만 결론 맺을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그래서 비슷한 말들의 반복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질리게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논쟁과 신에 대한 문제에서 멀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한계가 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문제가 가지는 한계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런 한계를 뻔히 알면서도 이런 종류의 글을 계속 읽어야 하는가?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래야만 한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므로. 다만, 이제는 조금 새로운 형식으로, 조금만 더 새로운 분위기의 책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불구경, 물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해도, 맨날 싸우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어찌 유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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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리자 라이스
안토니아 펠릭스 지음, 오영숙 외 옮김 / 일송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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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인생을 읽는 일은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그 사람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왔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독자들은 그들의 인생에 자신이 시도하지 못했던 부분을 투영시킨다. 나의 게으름 때문에, 환경 때문에, 소심함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그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나는 휴먼스토리를 절반만 신뢰한다. 어찌 그들이라고 해서 게으름이 없었겠는가? 배경적인 한계가 없었겠는가? 소심하고 두려웠던 적이 없었겠는가? 그들이 사람이라면, 초인이었다면 혹시 모르지만, 그들이 사람인 이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전기의 작가들이 한계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고, 그런 점에서 전기작가들은 역사를 왜곡한다. 물론 좋은 의미로 '취사선택' 혹은 '재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전기작가는 신문기자와 함께 가장 위험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 책도 이런 휴먼스토리의 범주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백악관의 안보보좌관이자, 차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인물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첫번째는 그녀가 부시 행정부라는 막강한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미국 공화당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을 통한 세계 제압>을 주창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가 아닌가? 그들의 뒤에 바로 그녀가 있다.
그녀는 뛰어난 전략가이다. 전략가는 승패에만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도덕이나 양심, 혹은 인간에 대한 애정 따위는 떠올릴 필요가 없는 말이다. 더구나 그녀와 그녀가 속해있는 미국 행정부처럼, '우리나라를 위해서, 우리 국민을 위해서'라는 주장까지 앞세운다면 더욱 그러리라.

하지만 미국인이 아닌, 오히려 그들이 앞세우는 '강력한 힘'의 희생자가 되기 쉬운, 분단의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논리가 달갑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총을 쏠줄만 알지, 총을 맞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목받는 두번째 이유는, 여성이면서도 전통적인 남성 중심사회인 백악관에 들어갔다는 것이고, 더구나 흑인 여성이면서 그랬다는 점이다. 인종차별은 참으로 뿌리 깊다. 그런 역경을 이겨냈으니 마땅히 휴먼스토리의 주인공이 될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가 인종차별과 편견을 이겨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택한 방법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백인남성사회의 방법이었다. 그녀의 가문이 내세우는 문구는 '두 배로 열심히!'라는데, 무엇을 열심히 한다는 말인가? 실제로 그녀는 열심히 했다. 미식축구, 피아노, 세계명작읽기, 피겨 스케이팅… 그런데 이것은 결국 백인이 되기 위한 조건들, 교양 있는 백인사회에 편입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특별한 백인 사회에 진입한 특별한 흑인이다. 그녀는 특별한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마치 초인처럼, 단 한번의 게으름이나 소심함이나 실패도 없이. 하지만 그녀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다시 누군가 그녀와 같은 길을 가고 싶어한다면, 그도 역시 그녀와 똑같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노력을 해야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이 불평등한 제도, 불합리한 구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특별한 백인사회에 진입한 특별한 흑인일 뿐이다. 그녀가 성공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성공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뒷면에서 또 다른 인물을 본다. 그녀는 특별해지고자 하는 욕망과 흑인으로의 정체성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과연 그녀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을까? 평범한흑인이 되고자 하려는 욕망이. 어떤 것이 더 행복한 일일까? 과연,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일까? 전략가적 선택으로야 콘돌리자 라이스가 옳다. 백번 옳다. 그러나 나의 이성의 동의하더라도, 감성을 쉽게 동의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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