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은 드라마처럼 드라마틱하게 진행되진 않는 것 같다.
가벼운 치매증상이라는 진단을 수년 전에 듣긴 했지만 별탈없이 지내오셨던 엄마는 수술을 받으신 후로 우리를 종종 당황스럽게 한다. '아차! 깜빡 잊었다'라고 말하던 시절의 엄마가 그리울 지경이다. 우리가 놀라서 바로 잡아주거나 상기시키면 엄마는 '아이구..내가 정신 차려야지!'하며 화들짝 놀란다. '엄마, 원래 전신마취하면 아이큐가 10씩 팍팍 떨어진대~내가 애 둘 제왕절개수술해서 낳느라 그 좋던 머리 다 나빠진거잖아~헤헤헤'하며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나는 싱거운 소리를 해쌌는다.
남편 차를 손 좀 봐야해서 정비공장에 따라 갔다.
정비공장 사장 부인이 나를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오며 반가워하는거다.
이 공장과 거래 튼지 7~8년 동안 우리가 얼굴 본 건 고작 한 두 번인데(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데)분에 겨운 환대를 받는 것 같아 살짝 머쓱했다.
-기억력 좋으신가봐요.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어머, 제가 사모님을 어떻게 잊겠어요!
돌아온 대답이 사뭇 사연있게 들리는 거다. 말귀 못 알아듣는 내 표정을 알아채곤 얼른 부연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 우리 첫 애 낳았을 때, 장미꽃 보내주셨잖아요!
저 그때 완전 감동 받았잖아요~
내 차에 남편을 태우고 정비공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득달같이 남편에게 물었다.
-있지..저기 사장 마누라가 그러는데...
그 집 애 낳을 때 '내'가 꽃다발을 보내줬었대. 빨간 장미꽃으로.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것 같아 민망할까봐 어물쩡 넘어가긴 했는데...
혹시, 그 말..맞아? 내가 그 집에 꽃 보내준 거 맞아?
-웅, 그때 그랬잖아.
-내가?
-응.
-꽃을? 내가 왜? 그 사람과 친하지도 않는 내가 뭣 때문에?
우..우리가 그렇게 친했나!
-아, 이 사람 왜 이래? 기억 안 나?
꽃집에 같이 간 것도 또렷이 기억나는구만....
꽃다발 포장할 때 마지막에 반짝반짝 뿌리는 약, 그거 뿌리지 말라고 그랬었잖아?
이쯤이면, '아하!' 하며 기억도 날 법한데 나는 남의 이야기같이 들렸다.
내가 할 수있는 거라면 오로지 '내가 그랬단 말이지? 허을' '헐!'만 연발할 따름이었다.
근래 이런 류의 내 기억력 때문에 실수를 두 번이나 했다. 이래갖고서야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겠나?그 두 번의 실수-나는 여태까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벅벅 우기고 있던 중이었다. 상대방은 분명히 나한테 말 했다고 하고 나는 전혀 들은 적 없다고, 내가 듣기라도 들었다면 뒤늦게라도 생각나야 하는데 전혀 금시초문이라고,그러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은게 분명하다고 우기고 있었는데-이게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밝혀진 것만 두 번이지, 내 기억력에서 완전히 사라저 없어진 것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나 치매 검사 같은 거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어째 남의 이야기같이 전혀 기억도 안 날 수가 있냐? 에휴.....
하며 친구한테 털어놓으니까, 친구는
"네가 요즈음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봐. 요 근래에 얼마나 큰일들을 겪었니?
수용할 용량을 넘겨버려서 뇌가 버리는 것도 있나봐...쯧쯧..."
뇌가 버리는 것.
친구 말처럼 다 넣어 둘 공간이 없어서 기억 몇 가지 지울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버려진 그 기억의 예쁜 편린일랑은 오늘처럼 조우하게 된다면 좋겠다. 기억에 없는 어느 순간의 나 때문에 누군가가 행복해했다는 말을 들을 때 나 스스로 얼마나 기특하였던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마흔 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한, 아직은 한참 쌩쌩한 마흔 다섯이지 절대 일흔에 접어든 할머니의 일기가 아니란 걸 밝히며 쓰는 바이다ㅋㅋ20110614ㅎㅂㅊㅁ
덧) 생일이었어요. 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