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잠설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 이 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여 엿빛을 띠게 된다. 그 때 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면기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 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면,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一齡), 이령 혹은 한 잠, 두 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에 가서 특상, 1등, 2등, 3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때는 문학 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 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 때 독서를 많이 해야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 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대로 빛난다. 이 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 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떠서 제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한 사색에 잠긴다. 최면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 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殼)을 벗는다.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벽에 몸부림친다. 혹은 그를 요사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탈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1등품, 3등품으로 후세의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60을 1기로 한다면 20대가 1령기요, 30대가 2령기, 40대가 3령기요, 50대가 4령기요, 60대가 되면 이미 5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 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이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며 지어 논 고치[境地]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20대~60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가 남의 글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있다.

"그 사람은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5령기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다."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그렁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지. 훌륭한 문장가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作 : 윤오영



...윤오영...
수필가, 호는 치옹 또는 동매실 주인.서울 출생(1907-1967)
보성고등학교 교사를 지냄.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하여 격과 아취를 소중히 여김. 수필집에는 <고독의 반추>과 있고 저서에는 <수필 문학 입문>이 있다. 특히 <수필 문학 입문>은 종전의 서구식 문학의 관점과 다른 전통적인 시각에서 설명한 귀중한 노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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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04-0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심비에 새기듯이 또박또박 타자쳤던 것이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끄트머리 윤오영님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윤오영의 양잠설에서 문장론을 배웠다."
라고 나중에 써먹으려고 했던 야심찬 작정도 기억도 난다.

십 년이 지난 오늘 아침, 오자 하나 없게 정성들여 타자한 이 글을 다시 마주한다. 십 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의 문장은 어떠한가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즈음 내가 상상했던 십 년 후의 나의 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