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의 평화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전에는 평화로웠습니다
조카들은 '톰과 제리'를 보았습니다
남동생 내외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여동생은 연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조금만 늙으셨습니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후 또한 평화롭습니다
둘째 조카가 큰 아빠는 언제 결혼할거야
묻는 걸 보니 이제 이혼을 아나봅니다
첫째 조카가 아버지 영정 앞에
말없이 서 있는 걸 보니 이제 죽음을 아나봅니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저녁 내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부재중 전화가 두 건입니다
아름다운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사랑하는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허공이라면 뛰어내리고 싶고
구름이라면 뛰어오르고 싶습니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이토록 평화로운 날은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詩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남편은 당분간 주말에도 집에 오지 못한다. 재활치료를 하고 있는데 재활치료 경험이 있는 시동생이 훌륭한 파트너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거르면 굳어버릴 거라는 주술에 걸린 것처럼 남편은 굳은 팔을 (세상에 팔이 굳어있다니!) 움직이기 위해 홍화씨를 삼키고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휴일은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아빠가 되어 움직이는 날이었다. 몰랐던 건 아니고 안중에 없던 일이었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이겠다. 빵을 사러 가는 길에 만난 아빠들은 아내와 함께도 아니었고 아이들과 함께였다. 엄마들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엄마들은 일요일에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단 한명의 엄마를 발견하였으므로 답을 구하는 일은 금세 그만두었다. 제과점에서 오직 단 한 명의 엄마를 발견하였는데 그 엄마는 빵에도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휴일을 맞은 엄마들은 어떤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고 처연한 표정이어도 되는 날일까. 그 엄마의 남편인 아빠는 산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를 제지하고 아내에게 어떤 빵이 좋겠느냐고 여러번 물었다. 그 엄마는 입만 비죽 내밀고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 아빠는 애가 타서 죽을 것만 같은 새까만 얼굴로 아이 엉덩이를 때리며 겁을 주고 유통기한이 정해진 땅콩 크림빵을 집어들었다. 우와. 정말 맛좋은 시나몬 페스츄리나 커피번에는 관심도 없다니! 찹쌀 크림 도넛의 쫄깃함을 지나치시다니! 슬그머니 힌트라도 주고싶었지만 그런 관심이 호의로 받아들일리 없을 터. 가끔은 푼수를 떨어도 세상은 덜 각박할텐데... 세상 모든 아빠들의 휴일은 한 남자의 휴일이 아니라 모두의 균형을 유지하는 날로 기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평화라고 불러야 한다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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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1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1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2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3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12-0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일인 어제 형부는 조카를 데리고 잠시 우리집에 방문해서 컴퓨터를 손봐주고 가셨지요. 언니는 집에 있었어요^^

플레져 2008-12-01 17:05   좋아요 0 | URL
세상의 엄마들은 휴일을 휴일처럼 쓰고 계시는거지요? ^^

다락방 2008-12-01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플레져님 덕에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을 산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올려주신 시도 너무 좋아요. 이 시집이 좋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종종 보곤 했는데, 이참에 저도 한권 사서 휴일의 평화를 느껴봐야 겠어요.

플레져 2008-12-02 15:15   좋아요 0 | URL
이 시집은 한 편씩 곱씹어 읽는 맛이 있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좋아하실거에요... 매일, 휴일의 평화를 느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텐데 말이죠 ^^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은 참 풋풋하지요? 오래 묵혀두었는데 다시 꺼내봐야겠어요.

2008-12-16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詩  김사인 -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중에서




사진 : 플레져 "060419-singap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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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 2007-05-21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잘 찍으셨네요! 제가 찍으려면 다 도망가던데...^^

2007-05-21 0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21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7-05-2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조용조용한 시 같네요. 댓글도 조용조용.

2007-05-22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22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7-05-22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바로 도망갔어요. 제가 사진 찍은 다음에 ㅎㅎ


잉크냄새님, 조용한 서재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
 

건망증


깜빡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너무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에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詩 박성우
 

 

 

 

 

............................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는 박성우의 시<거미>의 마지막 행은
마지막 버스만큼 씁쓸하고 황량하다. 거기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금 전 읽은 시를 자꾸 읽고 또 읽고 다시 보게 된다.
일상 한 켠을 긁어 모아 언어로 짜놓은 시어들이 거미집처럼 얽혀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이 여기 모여있다.

그의 첫 시집 <거미> 의 연작시집 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조금 더 깊어졌거나 처음 보는 언어들도 전학생처럼 더러 앉아있다.

여전히 농촌의 따스한 굴뚝 연기도 사투리로 피어난다.
도시에서 지친 핼쓱한 군상들도 또 찾아왔다.
지치고 외로워보이지만 쓸쓸함이 없다면 내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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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3-27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치고 워로워보이지만 쓸쓸함이 없다고 꼭 내일이 없는 사람들일까요..^^
전 유쾌해질려고 노력하는 사람중에 하나인데..^^

플레져 2007-03-27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차장님 오늘도 야근하세요?
쓸쓸함을 두려움과 절망으로 바꿔주세요.
두려움없이, 절망없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절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이니까요. ㅎㅎ

이리스 2007-03-2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을 내자구요! ^_^

2007-03-27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7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7-03-28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아자! ^^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내 나쁜 몸이 당신을 기억해
온몸이 그릇이 되어 찰랑대는 시간을 담고
껍데기로 앉아서 당신을 그리다가
조그만 부리로 껍데기를 깨다가
나는 정오가 되면 노랗게 부화하지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눈을 감아
감은 눈 속으로 현란하게 흘러가는 당신을
낚아! 채서!
내 기다란 속눈썹 위에 당신을 올려놓고 싶어
내가 깜박이면, 깜박이는 순간 당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내 이름을 길게 부르며 작아지겠지?
티끌만큼 당신이 작게 보이는 순간에도
내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싱싱하게 파닥일 거야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내 눈은 깜빡깜빡 당신을 부르고
내 기다란 속눈썹 위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찍히고

 

    詩 박연준

 

 

 

 


***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
등단작인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을 읽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찌 이리 귀여울꼬.
어찌 이리 앙증맞고 기발할꼬. 게다가 푸릇한 나이라니!

시인의 시집은 덜 여문 열매처럼
막 동그라진 꽃봉오리처럼 설익었다.
파닥파닥한 기운도 펄펄,
정제되지 않은 (혹은 정제, 를 거부하는) 시어들과 은유들, 이미지들.

시인은 1980년생.
시인의 말은 넘치는 젊음과 끼가 포진해 있다.


■  시인의 말

스물다섯 때, 시가 몸살나게 좋았다.
그랬으니 신생아처럼 하루 스무 시간 잠으로 보내는, 아버지 발아래 엎드려 자꾸만 연필을 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시든 발목, 혈관 깊숙이 빨대를 꽂아, 공들여 시를 뽑아먹었다.
시를 뽑아먹을수록 나는 통통해지고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툭, 툭, 부러졌다.
그게 마음이 아프다.


정말 신이 나서 쓴 시들이라는 걸 금세 눈치챈다.
덤블링, 공중곡예는 기본.

두번째 시집은 어떤 모양일까.
비명이 아닌 속삭임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게 될지도.
부디, 그 파닥거리는 신선도는 유지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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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7-02-0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플레져님.....제목만 보고 화장품 부작용을 연상....한.....저는.....ㅡㅡ;;;;

플레져 2007-02-06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ㅎㅎㅎ
그렇네요, 그게. 정말...ㅎㅎ

물만두 2007-02-0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눈썹이라... 읽어보고 싶네요^^

비로그인 2007-02-06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거의 모르지만, 읽고는 갑자기 `좋구나' 싶었어요.

2007-02-06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7-02-06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예뻐요. 어쩐지 관심이 가는걸요. :)

땡스투가 적립되면 저인줄 아세요. 호홋 :)

Mephistopheles 2007-02-06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이 훌쩍 넘은 지금 여전히 시하고 친하지 않은 메피스토...^^

2007-02-13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 밤




썰물이 벌거벗은 갯벌에 남겨놓은 여윈 조개껍데기의 얼굴
차갑게 식어버린 바닷물이 그곳에 담겨 있다

탁한 먼지가 날아드는 남산터널 끝에서
저 달을 본 적이 있다. 복사지를 잔뜩 안고 나오던
도서관 밖에서. 자 빨리 걸어, 저녁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아이를 재촉하며 돌아오던 아파트 소로에서

그리고 그날
파란 시약을 달빛에 비춰보며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우와, 아기다!
얼마나 오래도록 그들은 껴안고 춤추었던가
침대 위에서 뛰노는 아이처럼

기꺼이 따랐다. 저 달의 명령을
금속의 저울과 몸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기계
로켓에 쌤플을 채취당한 달처럼 수많은 체혈과 검진
자 가는 거야. 공포와 싸우며 걸어들어갔던
그 하얀 고통의 방

더 가까이 오라
도시의 안테나에 얼굴이 엉망으로 찢기며
유리창 가까이 볼이 닿도록

느낄 수 있다. 네 속에 서서히 몰아치는 우박
너는 무수한 소혹성이 때리고 간 두창 걸린 계집이다
네 몸이 깨어지고 깨어지고 깨어질 때
거만한 도시와 기계와 이념과 모든 것을 삼키며
시바의 춤처럼 소용돌이치는 바다

하지만 지금 너는
지독한 밤훈련을 요구하는 엄격한 코치다
마지막 옷이 서랍으로 들어가고, 아이가 가까스로 잠들고
밤드리 노닐던 네 남편이 창녀를 찾아갈 때

저 달의 고통을 말 속으로 모아라
식어 있던 몸이 다시 뜨거워지고, 모든 잡념이 깨어져나가는 시간
얼음 위에 난폭하게 긁혀나간 스케이트 자국처럼
어지러운 노트들


詩 허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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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10-2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과 시,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