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흡


   빗물에 말갛게 씻긴 석남사 길이 백리 밖 나를 한 숨에
흡, 빨아들이는 날이 있다 가지산 배꼽 밑 단전까지는 깊게
들이마시는 날이 있다 서어나무 연초록이 진초록으로,
햇살에 그을린 궂은살 박이기 전으로, 살아서 죄가 많은
이 몸을, 영가 천도재 무겁기만 한 발걸음을, 싸리비 자국
선명한 절마당까지, 절마당 앞 초롱꽃 여린 뿌리 끝까지

  한 숨에 빨아들였다가 후욱- 내뱉는 날이 있다 백리 밖
나를 빨아들인 힘으로 언양 지나 양산 두고 온 부산 앞바다
해안묘지 너머 수평선 카랑카랑한 섬 절벽 등대 불빛까지는,



詩 손택수 - <목련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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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6-09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도 사진도 참 맑아요
플레져님은 어디서 이런 좋은 시와 그림들을
모아서 자루에 담아뒀다가 하나씩 선물해 주시는 건가요?

플레져 2006-06-09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우선 덥석! ^^
사진은 얼마전 갑사에서 찍은 건데 좋은 시 만날 때까지
꾹 저장해놓고 있었어요. 심호흡 한번 크게 하세요~

플로라 2006-06-0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양, 양산지나 부산앞바다까지 모두 가보고 싶어요.
플레져님, 저 사진 와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와요...^^
저도 플레져님의 저 사진 덕분에 청명한 맘으로 주말을 맞이합니다~^^

릴케 현상 2006-06-0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명한 절마당가지<---혹시 '까지'인가요?

마태우스 2006-06-09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멋진 사진이네요.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샘도 플레져님의 글보다는 덜 아름답다는..
-팬 드림-

hnine 2006-06-0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갑사...대전을 뜨기 전에 갑사나 한번 더 다녀와야겠어요. 춘마곡 추갑사라는데, 가을까지 못 갈 것 같아서...

물만두 2006-06-0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플레져 2006-06-09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로라님, 죽기전에 가봐야할 곳 리스트에 넣었습니다 ^^
어느덧 주말이군요. 즐건 주말 보내셔요.

자명한 산책님, 까지, 가 맞아요. 오타 신고 감사합니다 ^^

마태우스님, 샘, 이라는 말이 저 계곡의 물에 딱 어울리네요.
아주 맑은 샘. 감사해요 ^^;;

hnine님, 갑사, 참 좋지요? 다음엔 마곡사와 동학사에 가보려고해요.
올해가 가기전에 ^^

만두님, 초코만두님, 맑은 기운도 느껴지시나요? ^^

icaru 2006-06-1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비 그치고 난 후..~ 맑은 공기 한 사발 명치까지 가득 들이키고 싶게 만드는 시구만요~

플레져 2006-06-1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지금도 비 오시네요.
장마가 벌써 시작된걸까요?
 

제비에게 세를 주다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이다
시름시름 기울어가던 처마 끝이다

진흙둥지 되바르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는 제비 한쌍
신접살림을 차렸다

부스스 일어나 올려다보면
밤낮으로 깨소금을 떨어뜨린다

이 허름한 적산가옥에 세를 들러 온 두 내외
덕분에 가난한 나도
이제는 어엿한 집주인이 된 셈인가

관리 한번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방을 빼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방세 대신 꼬박꼬박 챙겨주는

새울음소리를 염치없이 받아쓰고 있는 나도
이제는 집주인으로서의 그 알량하고 딱한
체면이라는 걸 알게 된 셈인가

달빛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 하룻밤 묵었다간 뒤다


  詩 손택수 - 시집 <목련전차> 중에서

 

 

 

 

***

한옥집 막내둥이였던 나는 봄이면 제비가 오는 게 반갑지 않았다.
내 소꿉놀이터 처마밑 아래 댓돌위와 제비의 집이 위 아래층을 이루고 있어서였다.
내 푸념에 아랑곳않고 엄마는 제비가 집 지으러 물고 오는 지푸라기가
행여 한 오라기라도 떨어져 있으면 내 살림들 맞은편에 놓고 제비가 주워가길 바랐다.
가끔, 지푸라기를 밟고 지나가며 심술 부리던 나는
제비가 새끼들을 낳는 것 만큼은 환영했었다.

봄이면 오는 제비,
봄이면 당연히 오는 제비가 어느새 서울에선 보기드문 새가 되었다.

지난주 시골 할아버지댁에 갔을 때 나는 제비를 보았다.
내가 알던 제비들은 이미 한줌 흙으로 돌아갔을텐데
어린 시절의 그 제비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 마냥 "제비다!"를 외쳤다.

빨랫줄에 잠깐, 돌담위에 잠깐 앉아있던 제비는
날렵하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버렸다, 속에 내 마음도 버림받은 것처럼, 나는 사진 한 장 못찍어 아쉬웠더랬다.

그 제비가, 맑은 시 한 편에 오롯이 살아났다.
반가워 여기 옮겨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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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0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짐승이 들어와서 집을 지을 정도면 그집은 좋은 집, 좋은 사람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밑에 글은 플레져님 이야기..겠죠..??)

플레져 2006-06-0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시절 저는 무지 얌전하고 착한 어린이였으니...=3
(빙고~ ^^ )

클리오 2006-06-0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옥 살던 시절 제비가 집을 짓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제비도 많고 제비가 집짓는 집도 많았는데.. 지금이라면 사람들이 집 지저분해진다고 싫어하겠죠? ^^

Mephistopheles 2006-06-0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3=3=3=3=3

물만두 2006-06-0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비며 참새며 못본지가 얼만지 모르겠어요.

플레져 2006-06-02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제비가 집 지을때가 없어져서 하늘 맴맴 돌다가
강남에서 영영 안돌아오는 걸에요... 흑.

메피스토님, 못된 어른이고 싶어요.
너무 착한 어른은...=3

만두님, 그러고보니 참새님도 뵌지 오래되었네요...흠.

아영엄마 2006-06-02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여요. 제비를 못 본지 한참 된 것 같아요. (참새나 까치는 그래도 종종 보이는데 제비는 왜 안 보일까??)

플레져 2006-06-02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비 몰러 나간다는 말도 점점 무색햊져요...

2006-06-02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ng 2006-06-0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비도 플레져님 마음을 알꺼에요...^^

하늘바람 2006-06-0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저도 좋은 시 감상하네요

플레져 2006-06-02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어머. 제비가 내 맘을 알다니!!! ㅎㅎ

하늘바람님,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시집 만났습니다.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 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 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맟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詩 함민복



Photo : 플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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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도 배불렀다는 말... 와 닿습니다.

플레져 2006-05-2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저 짠한 풍경에 오늘 마음이 무너졌어요...

hnine 2006-05-3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 고맙습니다. 오늘 아침 저에게 의욕을 주는군요.
공지영의 '절망을 이기는 법'이었던가? 하는 소설도 문득 떠올랐습니다.
퍼갈께요.

플레져 2006-05-30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맑은 아침입니다.
더없이 좋은 날 맞으시기를...^^

가시장미 2006-05-30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안녕하세요! :)

아침에 남겨주신 글인데... 오늘 하루의 시작이 조금은.. 조금은...
조금이라도 평온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부터 하루를 신나게 시작해야 하는데. 투명한 사진을 보고 기운을 얻습니다.

하늘바람 2006-05-3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함민복 씨 시를 읽네요. 사진도너무 좋아요

플레져 2006-05-3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가시장미님아, 넘 오랜만!
잘 지냈나요? (문득 반말이 어색어색 ^^;;) 신나는 하루 보내고 있지요?
다시 만나 반가워요!

하늘바람님, 비오는 거리, 차 안에서 찰칵...ㅎㅎ
 

이제 가야만 한다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詩 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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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피어날까요?

플레져 2006-05-2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믿을거에요...

검둥개 2006-05-2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
 

그리운 악마


숨겨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운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채는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 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詩 이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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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겨둔 남자도 좋아요 ㅠ.ㅠ

로드무비 2006-05-1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에로틱.=3=3=3

Mephistopheles 2006-05-1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화들짝 놀랐다죠..(볼 화끈 메피스토)

플레져 2006-05-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그게 제일 좋지요! ㅎㅎ

로드무비님, 뛰어가는 모습이 더 에로틱해요...홍~

메피스토님, 아뿔사...ㅎㅎㅎ

mong 2006-05-1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야클 2006-05-1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이 부부싸움 한 날 이시를 썼을까요? ^^

플레져 2006-05-1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안녕? 햇사리 반짝반짝... 좋죠? 캬~

야클님, 부부싸움 안한 날 썼을걸요.
맑은 날 죽고 싶은 심정처럼^^

잉크냄새 2006-05-1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악마죠? 남자? 여자? 둘다? 알려주세용~

플레져 2006-05-1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역쉬~! ^^

잉크냄새님, 남자 아니어요? 그리고 여자 마저도 악마로 만들려는 조짐이...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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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iiilll 2006-05-1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오늘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시로군요!

플레져 2006-05-1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트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늘 노력하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