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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는 너의 방
  내가 놀러가고 싶은 너의 방
  너를 안고 싶어한 너의 방
  나무는 너의 방
  가자고 하지 않아도 가고 싶은 방
  나무는 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문이 있는 방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들어가는 방
  그러고도 다시 들어가 바라보는 문
  너의 방
  나무는 너의 방
  너는 방 속에 있는가
  너는 많은 잎 속에 있는가
  지금은 없는 잎,
  이마에 해와 달이 지나가고 있는가
  나무는 너의 방
 
  나는 나무에 매어 있는 그늘
  나무 그늘
  웃음 뒤의 웃음
  제 몸을 진저리치다가 다시 서는 나무
  꿈을 잠시 떨어뜨려 놓고 있는 나무
  울음 뒤의 울음
 
  나무의 낮은 데를 가보고 싶어
  소 발자국 같은 걸 그늘 속에 그려서 문으로 삼을까
  너에게 가는 문으로 삼아야 할까
  먼데를 보는 소의 표정으로
  그래야 들어갈 수 있을까
  너에게 바치는 춤을 추어야 할까
  나무는 너의 방
  너를 안고 싶은 방
  해마다 한 칸씩 더 나를 가두고
  해마다 한 칸씩 더 나를 밀어내는
  아득한 방
  나란히 누워 있고 싶은 방
 
  이렇게 맑은 날은
  나 아주 조금만 존재해야 하리
  존재하려면 아주 조금만 조금만
  존재해야 하리
  차라리
  너의 속이 되어서 너의 속이 되어서
  아주 속이 되어서 없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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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맑은 날은
나 아주 조금만 존재해야 하리
존재하려면 아주 조금만 조금만
존재해야 하리
차라리
너의 속이 되어서 너의 속이 되어서
아주 속이 되어서 없고 싶구나

조금만 존재하면 되겠습니다.정답을 찾은 기분이어요.

감사^^


플레져 2004-11-2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정답을 찾으셨다니 기쁘네요. 지난 가을엔 나무들을 실컷 봤는데...바다가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바다가, 너무 그리워요.......
 

머플러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입니다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입니다
물푸레나무처럼 늘 당당한 그녀에게도
간혹 아랍 여자의 차도르 같은
보호 벽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처음엔 보호이지만
결국엔 감옥
어쩌면 어서 벗어던져도 좋을
허울인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바람 부는 날이 아니라도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미친 황소 앞에 펄럭이는
투우사의 망토처럼
나는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거는
그녀의 깃발입니다
기억처럼 내려앉은 따스한 노을
잊지 못할 어떤 체온입니다

 

詩 :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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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얻다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막 밭에서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가.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詩 : 나희덕

 


 

 

 

 

 

 

 

 Edouard Boubat -Saint Germain-Paris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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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5 0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枯木


한 번도 걸은 적 없지만
그는 모든 삶을 경험했다
축축한 어둠을 덮으며
길들은 그의 내부로 밀려왔다
그는 낱낱이 기억한다
세상의 뿌리마다
잊혀진 죽음들이 달라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길을 숨기고 있는지
스쳐가는 새들은 모르리
사나운 바람이 몰려가고
갈라진 살갗이 낯선 신음을 흘릴 때
내부에서 울리는
둥글고 단단한 소리들
상처만이 마음에 길을 만든다

그는 낱낱이 기억한다
추억은 어둠 속에서 선명해진다
비워낸 자리마다
누군가의 발자국이 쌓여가고
그때마다 새들은 둥지를 허문다
한 번도 걸은 적 없지만
그는 모든 길들을 품고 있다

詩 : 고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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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1-1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고창환씨가 이성복 강연회에 와서 이성복 시를 읽어주는 걸 봤는데요. 머리에 기름 바른 정장 입은 게 야릇한 기분이...
첫시집에서 너무 모범적인 시를 쓰는 분이라는 인상이 강해요...

플레져 2004-11-1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고창환 시인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어요. 워낙 시인에 대해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모범적인 시 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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