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문득 햇살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낮은 어둠이 깔려있을때, 문득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오전의 전부. 9시부터 11시 57분까지. 그 사이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야무지게 먹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더 풍요로운 오전 시간을 갖고자 좀 더 일찍 일어난 적도 있으나 내가 왜 이리 일찍 일어났을꼬...하는 엉뚱한 상념으로 두어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의 아량은 2시간 57분이다. 2시간 57분 안에 대단한 일을 저지르고 싶어 종종거리기도 하는데 대개는 가만히 앉아 시간의 흐름을 애써 잊고 있을 뿐이다.  

아침부터, 실은 어젯밤부터 심보선 시인의 시를 읽느라 잠을 설쳤다. 아침형 인간이 자정 넘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불면 혹은 감상 (독서와 영화). 요즘엔 되도록 침대에 일찍 누워 이웃집 아이가 잠들기 전 책상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의자를 질질 끌어 당겼다가 책상으로 밀어넣는 소리는 밤의 낭만인 것만 같았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로 한동안 나의 계절과 밤과 무력한 오후와 생기발랄한 점심을 사로잡았던 시인은 새 시집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기별이라도 하지 그랬수, 라고 친숙하게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지만 시인과 나는 멀다.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울지도. 여섯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심보선 시인의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을 읽는다. 나만의, 어떤 즐거움의 묘미를 발견하고 싶어서 뒷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발문, 시집의 해설을 쓴 이의 이름이 띠용- 하고 눈에 밟혔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처럼, 물컹물컹 촉감을 느끼는 것처럼 발문을 쓴 이가 잠시 심보선 시인을 멀리하고 (미안해요, 시인이여!) 예쁘장하게 나타났다. 심보선 시인보다 먼저 좋아했던 (애정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볼까나~) 진은영 시인이다. 진은영 시인이 심보선 시인의 시집 발문을 썼다! 시인들이 어떤 연유와 어떤 시스템으로 발문을 써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내게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나는 심보선 시인과 진은영 시인과 동시에 소개팅 하는 것처럼 (혼성 소개팅이라니!) 둥둥둥 두근거렸다.   

 

   
 

 심보선과 부자 아버지를 갖는 행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세상에서 제일 큰 저택을 구입할지도 모른다. 너무 커서 옛 연인을 초대해도 그 저택 안에서 결코 마주치지 않을 만큼 넓은 집. 그곳에서 가장 크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 몰래 망원경으로 살펴보면 그녀가 그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만큼 아름다운지, 아직도 무화과를 즐기는지 관찰할 수 있는 그런 집.  

  그렇지만 우리들의 진짜 아버지는 너무 가난해서, 혹은 유산 없이 돌아가셔서 우리는 그런 저택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거야. 낭만적으로 빛나는 장식과 가구 같은 말들로 채워진 언어의 저택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거리에서도, 허름하게 부서진 건물 안에서도 만나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하고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된 가장 가난한 이는 모리스 블랑쇼였다. 그는 언어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난했다. 그가 내린 문학의 정의 속에서 시인과 독자는 전 재산을 탕진하는 도박꾼처럼 모든 것을 잃는다.  

- 진은영의 발문 도입부-

 
   

 

<연보(年譜)>

나는 소설책보다는 시집이 더 좋아
나는 시보다는 작가 연보가 더 좋아
나는 언제나 무덤에 가까운 쪽에 매혹되니까  
(중략)

심보선의 시는 살아있음의 반대, 죽음의 연대와 하릴없는 혹은 할 일이 있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연한 시선으로 가까운 것, 먼 것을 그저 바라보며 조우하고 있다. 침울하고 우울한 죽음의 연대가 아닌 나의 일생이 쌓인 과거들의 집합소인 소멸이다. 상조 회사의 광고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나온 생애의 누적된 일상, 상처와 노래 혹은 쓸모없이 지나버린 어느날들의 기록으로서의 엔딩 장면, 내가 지나온 과거다.  

<음력>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 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어렵게 기억해내어
나에게 말했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힌 과거야.
(중략)  

  

심보선 시인을 읽던 밤, 문득, 내가 아는 보선이가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보선이는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보선이는 덩치도 크고 키도 큰, 예쁘지 않은 부잣집 딸이었다. 나의 사춘기 시절엔 부잣집 딸은 무조건 이뻐야 한다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었다. 보선이가 부잣집 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보선이는 가끔 생선 냄새를 풍기며 학교에 왔다. 나는 보선이의 부모가 찰진 진흙 밭에서 꼬막을 캐어 학교를 보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보선이의 감색 교복 재킷은 청결하지 않았다. 체크무늬 교복 치마는 풍성하고 비루했다.  

그리고 어느날, 10년 만에 보선이를 만났다. 보선이가 졸업 앨범 주소록에서 우리 집 전화 번호를 보고 연락을 해온 거였다. (10년 사이 이사하지 않은 나, 전화 번호도 바뀌지 않은 내가 어떤 유물처럼 느껴졌다) 보선이를 대학로 예일디자인학원 지하 에스프레소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에스프레소 카페의 단골이었다. 너른 실내는 나무 판자 바닥으로 깔렸고 짙은 네이비 2인용 소파와 짙은 초록색 테이블이 있었다. 아르바이트 생은 자주 바뀌었고 주인은 커피 리필에 관대했다. 진한 커피를 추출하던 정통 커피 전문점은 내 또래 아이들의 아늑한 아지트였다.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들고 와 쉬어가는 그녀들이 있었고, 지금은 죽어도 할 일이 없다는 게으른 표정의 그들이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곳에서 스터디를 하기도 했고 남자친구들을 만났으며 미래를 걱정했다.   

그 곳에서 10년 만에 보선이를 만난 건 위치 설명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보선이를 나의 세계로 무작정 데려와도 될까 하는 망상은 금세 거뒀다. 보선이도 나처럼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보선이는 중국 청도에서 유학중이라고 했다. 보선이는 가사 도우미와 함께 살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며 자랑했다. 내가 보선이와 친했던가. 보선이를 만난 후 보선이와의 친분 정도를 가늠하다니. 보선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껏 멋을 낸 보선이와 아저씨들의 구겨진 셔츠 주머니에서나 나올 법한 구겨지고 허름한 담배갑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빨리 보선이와 헤어지고 싶었다. 청도에서 삼각관계에 휘말려 멋진 사랑을 했다던 보선이의 연애와 그 허름한 담배갑은 어울리지 않았고 보선이의 고백마저 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결국 그날 나는 보선이의 술 한 잔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선이는 검은색 벨벳 재킷에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검은색 스타킹,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재킷에 받쳐입은 흰색 블라우스가 보선이의 마지막 순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보선이는 그 구겨진 담배갑을 검은색 가방에 넣고 청도에서의 러브스토리를 다 들려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여전히 나는 의문이다. 보선이와 내가 친했던걸까. 보선이는 왜 그날 내게 연락을 했을까. 나는 왜 보선이를 만나러 갔던 것일까.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내가 아는 보선이와 심보선 시인은 아주 다르다. 그건 아주 자명한 일이지만 보선이와 아주 헤어진 것만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구겨진 담배갑을 (아! 정말 그 담배갑은 몹시 초라했다. 겨우 종잇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초라하고 누더기 같을 수가 있는지) 가방에 넣고 다니는 건 아닐까. <이 별의 일>에 기대어 보선이와의 질긴 기억을 '멸망' 모드로 기록하고 싶다. 그날, 보선이의 화려한 삼각관계에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말하는 입 보다 듣는 귀가 발달한 사람이고 싶었다. 비록 늦었지만, 늦게 보선이에게 이르는 말, 그때 넌 참 예뻤어. 주머니에 금화가 가득한 부잣집 딸처럼 풍요로워 보였고 깔끔했어. 나는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내. 너는 어떻게 지내니? 졸업 앨범의 나의 주소록과 전화 번호가 바뀐 것처럼 나도 많이 변했어. 변했을 거라고 생각해. 너도 변했으리라 상상하며,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초롱하게 빛나는 것처럼 너도 별처럼 빛나고 있기를.  

 

<늦잠>  

별은 어둠의 미묘한 순응자.
시간이 닦아놓은 밤의 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젖은 흙 위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잘 익은 사과 맛이 나는 발자국들을 찍으며.

나의 어느 쪽 귀에 더 많은 속삭임이 고여 있을까? 
내가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쪽의 반대편.
당신이 메마른 숨결의 흰 가루를 떨어뜨리는 그 움푹 팬 곳.  

새벽의 결정, 입술에서 이슬로 옮아간다.
금화를 세어본 적 없는 당신의 손.
언제나 잘못된 시간의 열쇠를 아침에 건넨다. 

등 뒤에서 당신은 나지막이 묻는다.
"지금은 몇 시죠?" 

나는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눈동자를 이어주는 흙길.
녹슨 나침반의 떨리는 북쪽.  

오전 열 시. 
이제 일어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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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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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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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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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8-2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보선 시인이 아닌 플레져님의 보선 이야기가 잔잔하니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네요.
어디선가 별처럼 빛나고 계시겠지요. 님처럼요.^^
'눈앞에 없는 사람'은 급관심 가는 시집입니다.

플레져 2011-08-22 15:30   좋아요 0 | URL
불현듯 떠오른 그녀가 오늘도 행복하기를 기원해요...
날이 서늘해졌어요. 여름 감기, 가을 감기 조심하세요 :)
 

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詩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을 읽은 후로 이병률의 시를 더 안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거면 족했다. 시인의 새로운 시들을 우연히 맞닥뜨려도 읽지 않았다. 내가 읽고 싶은 시들, 새록새록한 일상들, 사연과 멜로디를 품고 있는 시어들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더 오래 바람의 사생활에 수록된 시들을 읽고 암송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새시집 출간 소식을 듣고도 시큰둥, 했다. 나에겐 아직 일용할 시가 있어, 하는 도도함으로 버텼다. 아무런 기대없이 횡단보도에 섰을 때 마침맞게 푸른 신호등으로 바뀐 것처럼 시집이 뚝, 떨어져 내게 왔다.   

 

세상 모든 길이 찬란으로 통한다면 좋겠다. 반성, 슬픔, 자괴감, 실망, 희망, 망각, 각질, 소멸...그런 모든 것들이 다 찬란으로 통한다면 참 좋겠다. 시인은 벌써 해탈을 준비하는 것일까. 시인의 조언과 수긍이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그런데 어떡하나. 나는 <바람의 사생활>이 더 좋다. 바람의 사생활을 더 좋아하는 것도 '다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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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5-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란한 빛을 내뿜을 수도 있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주변에 안개가 너무 짙게 깔려 그 빛이 발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요즘입니다. (잘 지내시죠 플레져님..?)

플레져 2010-05-21 01:15   좋아요 0 | URL
등대지기같은 불빛이라도 있다면 위로가 될텐데요.
벌써 여름이에요, 메피님!^^
금세 겨울도 올 것 같은 이 예감은...뭘까요...ㅎㅎ

2010-05-20 16: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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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1 0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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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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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두시  


밤 열두시는
혼자시키는 
떡볶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썹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게 수술 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물컹하다 

반찬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詩 이병률  

 

 

 

 

 

 


한동안은 성실했다. 계획표에 써 있는대로 움직였다. 스트레스를 받는 시각도 기쁨을 느끼는 시각도 매일 같은 시간이었다. 밤 열두시가 되면 어김없이 자야했다. 몸이 그렇게 기억하도록 만들었으므로 그래야했다. 그래도 밤 열두시에 자기엔 뭔가 허전했다. 침대에 누워 그날 읽고 싶은 책들을 꺼내 읽었다. 스탠드를 켜놓고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가끔 무작위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메모하기도 했다. 추억이 생각나면 책을 덮고 그 추억으로 깊이 들어갔다. 무안하고 창피했던 기억보다 행복하고 아쉬웠던 추억이 더 많이 떠올랐다. 밤 열두시는 그렇다.  


올 가을의 목표는 '단촐한 서가'이다. 오랜만에 알라딘 중고샵에 스무권의 책을 보냈다. 거의 채 1년도 되지 않은, 손때가 묻지 않은 책들이다. 정들기전에 보냈다고 하면 너무 구차한가. 어떤 책은 몹시 귀하게 여겼던 책이었는데 판매 목록에 넣었다. 오랜만에 그 책을 펼쳤을 때 저자가 내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잘조잘...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서워서 이별했다. 다이어트가 필요한 서가이다. 너무 많이 소유하려했던 티가 난다. 서가 맨 아래 한 칸이 비었다. 그 텅 비어있음이 매력적이다.  

  

  

 

 

 

 

 

 

 

에릭 호퍼의 책은...나의 무지와 건망증과 제멋대로의 성향을 드러내는 구매 목록이었다. 에릭 호퍼를 에드워드 호퍼로 알았던 것이다. 와. 에드워드 호퍼가 자서전도 썼구나! 했던 것이다. 그가 그가 아니었다. 득도 있다. 덕분에 몇 년 전부터 보관함에 있던 책을 구해냈다. 에릭과 에드워드씨 모두 좋다.  

몹시 힘든 여름을 보내던 어느날 **동 서점에서 덥석 집어든 <어머니 수난사>는 책더미에서 구했다. 어떤 날은 서가에 책을 정리하여 넣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다.  

엔, 그녀에게 받은 <꿀벌의 언어> 는 자꾸 벌꿀의 언어라고 말한다. 벌꿀과 꿀벌, 에릭과 에드워드, 비슷한듯 다르다. 벌꿀은 꿀벌들이 채집한 꿀을 일컫는 것이고 꿀벌은 꿀을 채집하는 벌들이다. 어쨌든 책은 달다. 그녀가 여러번 이메일에서 언급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야금 야금 꿀단지 꿀 먹듯 읽고 있다.  

 

 

 

 

 

 

 

곧 서가에 넣고 싶은 책들. 망설이고 있는 건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이...책들이 있어서다. 책들이 줄 서 있다. 미쓰요의 책들이야 무조건 영순위이지만 조금 참고 있다. 전작주의자가 되는 것이 조금은 두려워졌다. 실망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닮을 것 같아서다. 미쓰요처럼이 아니면 다른 작가의 책들을 읽지 않을 것 같아서다. 슈이치씨의 신간들은 해마다 가을에는 꼭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와는 조금 다르길 기대하는 <무지개>는 망설여지면서도 기어코 구입하게 될 것 같은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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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3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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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5 1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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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0-05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도 순대는 떡볶이에 닿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플레져 2009-10-06 11: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소망대로 그렇게 될겁니다 ㅎㅎ
떡볶이에 튀김 비벼 먹는 거 무지 싫어했는데 요즘엔 그렇게 먹는게 더 맛나다는 걸 알게되었어요. 그러나 순대는 예외...차라리 순대볶음:)

다락방 2009-10-06 16:05   좋아요 0 | URL
전 원래 튀김을 떡볶이에 비벼 먹는거 좋아했었는데 요즘엔 아주 싫어졌어요. 요즘엔 튀김은 무조건 간장, 순대는 무조건 소금! 이거에요 ㅎㅎ

플레져 2009-10-07 11:28   좋아요 0 | URL
저두 라면 끓여먹을땐 절대로 계란이나 다른 야채들 안넣어요!
아, 가끔 콩나물 넣어 먹는데 그건 맛있어요 ㅎㅎ

2009-10-26 1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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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2 05: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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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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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점심상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너는 다시 어딘가에서 넥타이를 반쯤 풀며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누르고
나는 어디, 부모 친척 없는 곳으로 가볼까?
그때, 넌 왜 내게 왔지? 

너, 왜라고 물었니? 
C'est la vie, 이 나쁜 것들아!  
나, 어디 도시의 그늘진 골목에 가서 
비통하게 머리를 벽에 찧으며...... 

다시 간다  

詩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프렌치 토스트에 딸기잼을 듬뿍 바르고 햄 한 조각 넣어 씹어먹는 아침상. 배경음악도 아닌 배경수다처럼 틀어놓은 티비에선 올여름 휴가를 함께 하고 싶은 연예인들을 꼽는다. 남편이 묻는다. 자기는 누구랑 휴가를 가고 싶어? 스크램블 에그를 한 입 가득 넣고 남편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나, 혼자. 어느덧 나를 닮아 애교가 늘어버린 남편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는 나와 함께 휴가를 가고 싶다고, 뻥, 일지도 모를 접대용 멘트를, 철철, 흘린다. 어디에서 보았더라. 나처럼 말한 대다수의 여자들을 본 적 있다. 그들은 일상에 지치고 시들어버린 여자들이었다. 여름 초입부터 두 달 동안, 지금까지 쭈욱 힘들고 고단하고 시들고 피곤하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남들 다 가는 유럽 배낭 여행을 보며 엄마가 말했다. 너도 다녀와. 못 간 이유는 많았다. 갑자기 가려니 난감했고 엄마가 진즉에 떠밀지 않은 것이 야속했고 봐야할 영화가 수북했다, 그때. 나중에 가지 뭐 하고 말았는데... 그때 갔어야 했다. 아니면 그때 못 간 휴가, 지금 되찾아서 떠나고 싶다. 물론, 나 혼자. 혼자, 라는 것 때문에 이 시집을 꺼낸 건 아니다. 이 시집이야말로 어떤 구실에서든 내가 불쑥 꺼내볼 수 있는 진통제니까. 진통제를 스윽, 눈으로 맥주먹는 게처럼 스윽 빨아들인다. 심장이, 마음이 차가워진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 혼자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노트북과 <렛미인><완벽한 병실>을 들고 떠났으면 좋겠다. 아아. 막 상상하니까 막 행복해진다. 어쨌든 나도 어디로든 다시 간다.  

 

 

  

 

 

 

 

  


책그림이 있어야 멋있어지는 알라딘 페이퍼. 한밤중만 피해서 읽자 하면서도 꼭 잠자리에 들어서야 렛미인을 펼쳐보게 된다. 꿈자리가 사나울까봐 많이 읽지 못하고 접어버린다. 영화보다 더 좋을거란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디비디가 나오는대로 꼭! 자로 잰듯 소설 쓰는 여자 오가와 요코의 완벽한 병실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꿔나가는 소설가의 재능을 훔쳐보며 마구마구 생성되는 건물들과 책상과 병실 침대를 상상한다. <임신캘린더> <약지의 표본> <박사가 사랑한 수식>과는 다르다. 언제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그 다음 작품이 참 좋은 작가중에 한사람.  

저녁은 좀 가볍게 먹고 싶다. 서늘하면 더 좋겠다. 오늘은 일년 중 가장 무더운 '대서'다. 어제 일식 이후에 시원해진 날씨. 대서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크크. 이대로라면 여름, 지낼만하다.   

 페이퍼 배경음악은 윤상 <소심한 물고기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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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7-2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오늘 플레져님은 요새 무얼하고 계실까 생각했는데 페이퍼가 떴어요. 너무 놀라워요! 문학동네 훔치고 싶은 책 10권 리스트 당첨자 보면서 '문학'하니까 플레져님이 떠올랐거든요. 반가워요! ^^

플레져 2009-07-23 23:13   좋아요 0 | URL
아. 반가워요, 마노아님. 그저 무심코 페이퍼쓰기를 눌렀던 것이 아니라 마노아님의 궁금증 호르몬 덕분이었던가보네요 ^^ '문학' 으로 저를 생각해주셨다니 너무 좋은걸요. 헤헤.

2009-07-23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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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2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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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7-2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핑 제목을 보고 이런 제목의 시가 올라와 있을 것 같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네요. 박연준의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도 플레져님덕에 알게 됐었죠. 지금도 제가 그나마 가장 자주 펼쳐보는 시집이에요. (시를 잘 몰라요 ㅜㅡ)

그나저나 렛미인이 영화보다 더 좋단 말예요? 아아. 또 사야 된단 말예요? 휴..

밤과 이른 아침에는 서늘하니 잠도 잘 와요. 잘 자요, 플레져님.

플레져 2009-07-24 09:49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
영화만큼 좋은 것 같아요. 좋은 영화는 좋은 원작이 있듯이 말이죠.
원작 소설을 매끄럽게, 액기스만 쏙, 뽑아서 간결하게 만들었다는 느낌.
돈.주.고. 사셔야 할텐데...1년 후 이벤트를 기다리기엔 좀 그렇죠? ㅎㅎ

Kitty 2009-07-2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플레져니임~~~~ 글 보니 넘 좋아용~~
남편분이 진짜 애교가 많으신 듯 ㅋㅋㅋㅋㅋ 너무 좋아보입니다~
저도 문학, 특히 한국문학하면 플레져님이 젤 먼저 생각나요!! ㅎㅎㅎㅎ

플레져 2009-07-24 09:50   좋아요 0 | URL
무뚝뚝한 나무 토막도 애교쟁이로 만들어버리는 저의 비결...은 없습니다만 ㅎㅎ 아마도 함께 한 시간 덕분에 서로를 닮아버린 것 같아요.
잘 지내신거죠? 한국문학하면 플레져! 이거이거 기분 최고인걸요 ^^!

2009-07-25 1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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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5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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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8 0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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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7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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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8 05: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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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의 식사  


찻길가의 조그만 빵집
하나밖에 없는 조그만 테이블 앞에
소박하고 정갈한 정장 차림의
아직 늙지 않은 한 아주머니
테이블 위에는 보랏빛과 잿빛이
섞인 속살을 드러낸 케이크 한 조각
그리고 갈색 조그만 드링크 병

아주머니는 이따금 한 모금씩
드링크로 입을 적시며
달게 케이크를 베어 물었다
유리벽 너머의 거리에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詩  황인숙  <리스본行 야간열차>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건 꽃보다 구준표 그리고 잔치국수다. 잔치국수를 먹고 나면 '맛있어 죽겠어'를 연발하게 한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잔치국수와는 좀 다른 국수일지도 모른다. 플레져국수라고 해야 할까. 화원 보다 꽃집이 더 정감있고, 베이커리 보다 빵집이 더 친숙한 것처럼 플레져국수 보다는 잔치국수가 훨씬 낫다. 레시피 라고 하기엔 쑥스러워서 만드는 방법을 간략히 소개한다. 재료 : 호박, 신선한 김장김치, 소면, 구수한 육수. 육수는 보통 육수와 비슷하다. 건새우, 양파, 대파, 다시마, 멸치등 냉장고에 있는 국물내기 재료를 모두 넣고 푹 우려낸다. 호박은 굵게 채 썰어 참기름 포도씨유를 넣고 살살 볶는다. 그사이 국수 삶을 물을 올려놓고, 호박이 다 익었을 때쯤 국수를 넣어 삶는다. 김장김치는 푹 익은 것보다는 잘 익은 정도가 좋다. 저 詩에서 처럼 아직 늙지 않은 아주머니 와 흡사한 느낌의 김치면 좋다. 1cm 크기로 채 썬 김치와 호박을 국수에 올려놓고, 육수를 붓는다. 호박을 좋아해서 호박은 아주 듬뿍 넣어 먹는다. 요즘 호박 값이 금 값 못지 않더라. 여러 군데 마트를 들러보면 싱싱한 호박을 파격 세일로 파는 곳도 있다. 비싼 호박이 장바구니에 두 개나 담겨있어 아쉬울지언정... 오후 세 시, 오후 일곱시, 오후 열 시에도 틈틈이 내 방식대로의 잔치국수를 맛있게 먹는다. 맛있어 죽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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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09-03-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란 지단, 김이 빠지면 무효!
(경상도식은 양념장을 해야되는데 : 매운 고추2+대파잘게썰고,마늘+국간장+진간장약간)
저도 주말의 한끼는 무조건 잔치국수. 이제 국수집 해도 될 경지에 올랐다나 뭐라나;

플레져 2009-03-12 18:15   좋아요 0 | URL
앗. 저는 국수나 만둣국에 김 들어가는 걸 싫어해요 ^^;; 김은 좋은데 뜨건 국물에 들어있는 김은 다 된 밥에 재뿌리는 느낌이랄까요. 계란지단은 귀차니즘으로 안하는거랍니다. 그야말로 내맘대로 국수 ^^!
(언제 한번 주문전화할께요! ㅎㅎ)

Mephistopheles 2009-03-1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요!

세끼 밥 이외에 세시 일곱시 열시..이렇게 간식으로 국수를 드시는 걸까요?
아님 밥대용일까요?

마냐 2009-03-12 17:59   좋아요 0 | URL
저도 메피님과 똑같은 질문요 ㅎㅎ 오랜만에 뵙는데, 이 글만으로는 정말 행복하게 지내시는 듯 ㅎ

플레져 2009-03-12 18:25   좋아요 0 | URL
메피님, 음... 다섯끼 정도는 먹는 거 같아요. 제가 위가 작아서 한꺼번에 많이 못먹는답니다. 매우 불편한 위장을 갖고 있지요^^ 간식으로 하루에 두 번은 먹어요. 먹고 나면 든든해요. 취사량을 넘기면 괴롭지만...


마냐님, 반가워요 ^^
이 글의 크기만큼만 행복한건지도 모르겠어요................흑!

2009-03-12 17: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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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3-1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읽는데 침이 그득;;; 저도 플레져님표 국수 먹고싶어욧~~~~~~~~~~~~ >_<
오후 열 시에 먹는 국수는 꿀떡맛이죠 ㅎㅎ
그나저나 플레져님도 위장 크기가 저랑 비슷하시군요!!!! 저도 위는 작지만 입이 궁금한건 또 못참아서 하루에 5-6번 정도 조금씩 야금야금 먹어요. 이렇게 하면 종일 배고프지는 않아서 좋은데 매번 양치질하기 귀찮아 죽겠어요;;;;

플레져 2009-03-13 22:39   좋아요 0 | URL
불량한 위장 때문에 사회생활 하기 힘들때가 종종 있어요 ㅎㅎ
야금야금 먹는 일이 때로는 너무 귀찮아요.
굶기도 하는데 결국 본능을 거스르지 못하고 먹어야 한다는 현실...
저두 양치질을 대여섯번은 하나봐요 -_-;

2009-03-13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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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7 08: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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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4 0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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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3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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