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詩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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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23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자 좋죠...

반딧불,, 2006-03-23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건 플레져님??

히피드림~ 2006-03-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교하게 쓰여진 화려한 시도 좋지만 이렇게 수수하면서 말을 거는 듯한 시가 좋아요.^^

mong 2006-03-23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가 따스해요 ^^

잉크냄새 2006-03-2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그 의자에 쉬다 갑니다.

플레져 2006-03-2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의자가 불편할 때도 있는데 없으면 또 불편...
반디님, 그런가요? ㅎㅎ
펑크님, 흘러가는 물처럼...^^
몽님, 노란색 우드스톡군이 따스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ㅎㅎ
잉과장님,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 푹 쉬세요.
 

조용한 이웃

 

부엌에 서서 창밖을 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 줄기도 가늘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오늘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
그리고 봄기운을 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씹는 것이다


詩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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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1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mong 2006-03-1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래줄을 보니 또 매달리고 싶은 생각이~ㅎㅎ

stella.K 2006-03-1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거 꼭 플레져님 같아요! 우리 조용한 이웃 맞죠?^^

starrysky 2006-03-10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목에 필이 확 꽂혀서 들어왔어요. ^^
요새 저와 저희 가족들은 시끄러운 이웃 때문에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거든요. ㅠㅠ 제발 저희에게도 조용한 이웃을 내려주소서!!!!! (페이퍼랑 넘 상관없는 소리만 해서 죄송해요오~ 부비부비~ ^^)

2006-03-11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3-1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만두님~ ^^
몽님, 조금 있다가 또 매달리세요 ㅎㅎ
스텔라님, 우리들의 이야기죠? ^^
스타리님, 아...그 고통(?) 알지요.
우리 이웃도 별로 조용하지는 않아요.
오늘은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보자구요 ^^
(스타리님의 부비부비 넘 귀여워요 ㅎㅎ)
 

엘 살롱 드 멕시코


엘 살롱 드 멕시코
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 그 철조망을 넘는다
그리운 캠프 페이지,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
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
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
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
엘 살롱 드 멕시코가 그립다
난 왜 그리움 따위에만 허기를 느끼는 것일까
이태원을 무작정 배회하고 싶다
그나마 내 고향집 근처를 닮은 곳이기에
아마 난 뉴욕에서도 기지촌의 네온사인을 그릴 것이리라
후암동의 불빛이 보고파 눈물지었다는 맨해튼의 어느 교포 소녀처럼
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
내생에도 난 또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하리라
가슴에 매단 망각의 손수건으론 연신 업보의 콧물 닦으며
체력장과 사춘기 그리고 지루한 사랑의 열병을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 앓아야만 하리라
아, 난데없이 내 맘 속에서 인류애가 솟구친다
이 순간 내 욕정은, 그리움으로 잘 위장된 내 욕정은 온데간데 없다
이게 제정신인가
아님 무슨 인류애라는 신종 귀신이 날 덧씌운 것인가
그날 살롱 멕시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
딸라 한닢 없던 외삼촌이 명랑하게 딸랑거렸다
샌드위치와 위스키를 시키고 나서
용케 합석시킨 지아이의 붉은 뺨에 뽀뽀하던 외삼촌,
그립다, 어수룩한 그 백인 병사마저
엘 살롱 드 멕시코
이젠 자꾸만 들어가고 싶은
그래 켐프 페이지 위병초소의 산타클로스와 함께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 나, 나
성조기는 사라져도 그 단맛만은 영원하리라
나의 엘 살롱 드 멕시코를 적시는
외삼촌의 스트레이트 위스키처럼, 여태 숙취로 남은 그 취기처럼,
그 옛날의 그리움에 어느새 난 샌드위치되어 있다
내 해탈한 뒤라도 그 그리움만은 영겁토록 윤회하리라
엘 살롱 드 멕시코

 

  詩 진이정

  * 품절을 풀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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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03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집을 세 권 샀지요.
사기만 하면 누가 집어가서......
정말 냉소적인 표정의, 다소 불량한 눈빛의 청년이었는데......
시들이 너무 좋았어요.

플레져 2006-03-0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이 안풀려요. 어딘가는 절판이고...
로드무비님이 그러시니까 더 애타게 품절을 풀어달라고 외쳐요!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남편은 내가 끌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해서 결혼했고
나는 남편이 내가 지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을
받아주는구나 착각해서 결혼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좀 더
커다란 가방만을 원했고
남편은 내가 온갖 잡동사니 쑤셔 넣고 다닐까
더 커다란 가방을 못 사게 하고
툭하면 좀 더 커다란 가방 때문에 다투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더 커다란 가방이 왜
필요한지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남편은 내가 자기랑 헤어지고 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닐 꼴을 못 봐서 헤어지지 못하고
오나가나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만난 우리는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하고

詩 성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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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2-1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커다란 가방이 웬수야~

물만두 2006-02-1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읽어버린 가방이란 책이 나온걸까요?=3=33

이누아 2006-02-16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랑과 대화가 통해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나니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몇 년 간의 노력끝에 이제 좀 이야기라는 걸 하긴 하는데...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말을 잃어버려서 정말 황당했어요. 이 글을 읽으니 그때 생각이.^^

2006-02-16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2-17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2-1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호호~
몽님, 그놈의 가방땜시...
만두님, 그런 책도 있어요? ㅎㅎ
이누아님, 아~ 그런 경우가 제게도 있었어요. 무슨 말이라도 나눠야하는테 딱히 할 말이 없는 경우라니...:)
 

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파카'나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어떤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詩 송찬호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경북대 독문과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6호에 ‘금호강’ ‘변비’ 등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붉은 눈, 동백』 등 

*******

  작가들이 뽑은 올해의 좋은 시 중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품이래요.
  너무 좋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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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13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좋군요~

세실 2006-02-1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저도 한때는 만년필을 좋아했던 적이 있어요~~~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옛 추억을 생각하게 해주는 군요...

ceylontea 2006-02-1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저도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년필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요즘은 컴퓨터와 프린터를 사용하니 점점 글 쓸일이 없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글씨도 엄청 못 쓰고 말입니다..
요즘은 만년필 사용하니 기분은 참 좋아요... 전 3자루의 만년필이 있는데 가는 촉을 좋아해서 모두 EF촉입니다.. ^^
보라색(제가 좋아하는 색.. ^^), 파란색, 검정색을 사용하고 있어요... ^^

산사춘 2006-02-1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의 만년필도 좋아요.

이리스 2006-02-13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년필 좋아라해서 비싼 돈 들여 몇개나 사놓고는 거의 고사만 지냈죠. -_-;;

플레져 2006-02-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그 마지막 싯구는 정말 명문이어요.
세실님, 교양과목 모 교수님은 만년필로 레포트를 제출하라고 했었어요. 잉크 넣는 게 번거롭긴 했지만, 글씨 쓰는 동안 참 좋았어요.
실론티님, 3자루의 만년필과 세가지 색을 갖고 계신 님이 부럽네요. 보라색 만년필로 사랑도 쓰세요...ㅎㅎ
산사춘님, 제 만년필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꾸벅.
낡은구두님, 만년필은 한 자루쯤 소장하고 싶은, 애장품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mong 2006-02-1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들어요
플레져님의 만년필에는 무엇이 살까요? ^^

Laika 2006-02-1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려서 보라색 싸구려 만년필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빌려 입은 작은 언니의 엘르 롱코트를 망가뜨린 아픈 과거가 있어요...가방안에서 뚜껑이 열린 만년필이 하루종일 쓱싹쓱싹 코트를 쓸고 갔으니....

2006-02-14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2-14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그 부분도 좋은데요. 다 좋아요~
몽님, 제 만년필에는 굳은 잉크만...흑...
라이카님, 아... 생각만해도 아까워요. 코트와 애궂은 만년필 뚜껑과, 곤란해하는 라이카님과... 코트를 보면 그 생각이 떠나질 않겠어요.
속삭님, 재미나게 보셔요 ^^

ceylontea 2006-02-1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프레져님.. 사랑이라구요.. 아이 부끄러워..
쓰잘데기 없는 업무 내용만 휘갈기고 다니고 있어염.... ㅠㅠ

플레져 2006-0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어제는 사랑을 쓰셨어야 하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