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뜨거운 태양볕아래에서 롬멜이 보였던 기지와 지략도 역부족이었고 차가운 동부전선에서 북극곰과 힘을 겨루며 보였던 의지와 용맹도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끝까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서부전선은 오랫동안 조용했다. 매일 차가운 바다를 바라보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독일군 병사들은 하루 하루에 대해서 어떤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연합군은 바다를 건너 쳐들어 올 것이 분명하고 문제는 쳐들어오는 지점일 따름이다. 그리고 최전선에 서있는 병사들은 자신들의 임무는 고작 적의 상륙을 일정시간 지연시키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은 무척이나 파도가 거셌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군은 더욱 자신들의 상륙작전을 독일쪽에서 알아채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상륙정에 줄을 맞추어 서있던 병사들은 무척 떨리는 상태였다. 차분하라는 하사관과 장교들의 지시가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변에 도달하자 앞문이 열렸다. 그순간 앞줄부터 차례대로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저쪽 독일군 벙커에서 쏘아대는 기관총탄은 삽시간에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밖으로 뛰쳐나가 보았지만 몸 숨길 곳 없는 해변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기관총탄의 밥이 될 따름이었다. 날아오는 총탄이 그대로 보인다면 그 총탄에 떨어져나가는 살점도 같이 보여주는 섬세함을 영화는 발휘한다. 전쟁은 한참동안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작전을 짜는 쪽이란 늘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이길만큼의 숫자를 작전구역에 배치하게된다.
그렇게 거시적인 작전이라도 막상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율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충실한 수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 톰 행크스는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부하들을 보면서도 차분히 지시하고 행동한다. 전진해서 엄호하라고 하고 저격병을 시켜 돌파구를 만들고 뒤를 돌아서 마침내 벙커를 부셔버린다. 조금전까지 앞만 보고 쏘아대던 독일병들도 이제 수류탄과 화염방사기의 공세에 의해 타죽어가는 가련한 신세로 변하고 말았다. 동료들의 죽음을 잊지않는 미군병사들은 결코 저항력을 잃은 상대방이라도 포로로 남기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미군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자 여기까지가 영화의 도입부다. 논문으로 보자면 문제의 제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어떤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일까? 아마도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하는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물음이 될 것이다. 이 물음을 안고 영화는 계속 이어진다.
잠깐 역사적인 배경을 덧붙이자면 서부전선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은 사막의 영웅 롬멜이었다. 하지만 사막에서 너무 무리하며 열심히 싸웠던 롬멜 원수는 신병 치료차 독일 본토로 가 있었고 자신이 응급처방해 놓았던 몇가지 방어선이 미군에게 피해를 주는데 어느정도 효과를 보았지만 결코 상륙을 완전히 저지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그의 머리속에는 상대가 쳐들어왔을 때 상륙을 허용했다가 우세한 기갑력으로 밀어붙여 오갈데 없게 만드는 타격을 입힐 것인가 아니면 바로 상륙하려는 곳에서 저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상층부와 벌이는 논쟁이 놓여있었다. 롬멜의 입장은 곧바로 저지하자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필수적인 기갑전력에 대한 통제권은 오직 히틀러의 손에 있었고 이 중요한 순간에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바다로 적을 몰아넣기에는 너무나 시기가 않좋은 상태였다. 독일에 대한 연합군 측의 양동작전으로 어느쪽에도 힘을 집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륙을 허용하고 만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이제 상륙작전을 막 성공시킨 톰 행크스는 곧이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라이언이라는 병사의 형제 모두가 이번 전투와 태평양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것이다. 그래서 그를 집의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주자는 인도적인 결정을 따르기 위해 적지에 낙하한 라이언의 구출작전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초반의 영화가 무자비한 전투신을 아주 빠른 속도로 보여주던 것에 비해 이제 영화는 아주 작은 부대가 천천히 꽤 긴 행보를 하는 모습을 비춰주게 된다. 음악에서 흔히 쓰이는 소나타 형식이 빠르게 느리게 다시 빠르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참고로 할만하다.
하지만 이제 관객들도 전쟁의 다양한 면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찬찬히 여러 부분을 뜯어보아야 할것이다. 우선 톰 행크스가 작전지시를 받는 장면을 보자. 군지휘부의 명령을 전달하는 상사의 앞에는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위에는 먹다남은 샌드위치가 있다. 이를 힐끔 쳐다보는 톰 행크스의 무심한 표정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 있지 않을까? “조금 전까지도 우리의 동료들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비를 넘기며 이 땅을 쟁취했다.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총탄에 쓰러져갔다. 하지만 사람은 슬픔만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먹어야하고 잠도 자야하고 그렇게 슬픔을 접고 또 앞으로 나가야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전쟁중이니까 말이다.”
호머의 오딧세이를 보면 괴물들에게 희생된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들은 배가 고파 먹고 잠이와서 잤다라는 대목이 있다. 엇비슷한 자세로 삶이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쨌든 상륙지에는 벌써 수많은 병사들과 함선들이 모여있다. 그들도 모두 먼저 왔던 사람들의 희생을 밟고 모인 것이다.
차출된 부하 병사들이 새 임무를 좋아할리는 없다. 가야하는 곳이 적지이고 또 임무가 기껏해야 한 병사를 데려오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누구든 “왜 나도 부모님이 있는데 남의 부모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하나?”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져댄다. 어쨌든 그들은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전쟁터와는 거리가 있게 생긴 샌님 하나가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같이 합류하게 된다. 타자기를 들고 가면 안되냐는 질문에 연필을 들어보이는 톰 행크스의 표정이 재미있다. 그만큼 전쟁터라는 곳은 사람에게 응용력을 길러주나보다. 어쨌든 영화의 두번째 단락은 꽤 길게 전게된다. 저격병도 만나고 전장터를 피해 숨어있는 프랑스 농부도 만나고 하면서 몇번의 싸움을 겪게 된다. 한번은 적병들과 서로 총을 들고 마주보면서 상대에게 총을 내려노라고 고함을 지르는 경험을 하게된다. 누구든 먼저 당기는 쪽이 유리하지만 결코 피해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들 머뭇대다가 미군쪽에서 사격을 시작하였다. 삶과 죽음이 한시점을 경계로 서로 나뉘는 장면이었다.
다음 장면은 일련의 병사들이 행군하는 속에서 라이언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는 대목이었다. 혹시나 희생자중에 있을까해서 군번표들을 뒤진다. 웃으며 작은 쇠붙이 조각을 넘기는 그들에게 누군가 진지하게 물어온다. 자신들의 넘기는 그 표딱지도 실은 한 생명의 상징이 아니었냐고 저렇게 적진을 향해 어쩌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병사들의 눈에도 자신의 소중한 목숨의 희생이 표딱지 던지기와 동격으로 취급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냐는 그런 내용들이 담긴 질문이었다.
또 다른 장면에는 지휘관이 탄 지프를 그대로 내려놓으려고 하다가 추락해버린 비행기를 보여준다. 별 의미 없는 안전과 편의를 위해 부하들까지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고간 그런 우매함의 상징이다.
라이언이 있을만한 위치는 확인되었다. 행군은 계속되고 다음에 도달한 곳은 기관총이 엄폐된 독일군 벙커였다. 자신들의 임무와 상관이 없지 않냐며 돌아가자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톰 행크스는 위험을 알면서도 방치할 수 없다는 투철한 군인정신을 발휘한다. 기습작전으로 상대를 거의 헤치웠지만 미군쪽에서도 희생자가 하나 나왔다. 동료의 죽음을 본 병사들은 분풀이를 하기 위해 독일군 포로를 즉결처분하려고 한다. 그런 미군들 사이에서 우리의 샌님은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를 들먹이며 처분을 반대한다. 하지만 의견은 분분하고 처형이 막 실행되려는 순간 톰 행크스가 나서서 포로를 풀어주며 미군에게 가서 항복하라고 명령한다. 영화 시작의 전투장면과 이어지는 전쟁의 윤리와 잔혹성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는 것이다.
힘겹게 도달한 목표지점에서 그들은 라이언 일병을 발견한다. 하지만 어디인가 맥이 좀 빠지고 똑똑치는 않아보이는 상대방을 보면서 자신들의 희생과 노력이 별 의미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담긴 표정을 짓게된다. 하지만 곧 그 라이언 일병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다. 여행은 계속되고 그들은 드디어 진짜 라이언 일병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정찰용 장갑차를 바주카포로 해치우는 용감한 청년 병사가 바로 고대하고 고대하던 라이언 일병이었다. 이정도면 좀 보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표정들로 변하게 된다.
그에게 자신들의 임무를 설명해주는 것도 한편에서는 그리 편안한 일이 아니다. 형제들의 죽음, 본인에게 허용된 귀환 명령 그리고 오가며 희생되었던 다른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갔다.
대원들에게는 이제 너는 지겨운 전쟁터를 벗어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부러움과 자신들의 위험한 임무가 이제 종결되었다는 기쁨이 밀려왔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여의치가 못했다. 여기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고 이 다리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야 아군을 계속 전진시킬 수 있다는 보다 큰 임무 속에 우리의 라이언 일병은 하나의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중차대한 임무를 개개인의 안전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사뭇 지사적인 태도를 라이언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기로 작정하고 다양한 준비를 한다. 준비가 모두 끝나고는 잠시 휴식이 주어진다. 라이언은 죽은 형들에 대한 재미있는 회고를 한다. 이 장면도 오딧세이에 나오는 그런 모험담 비슷한 느낌을 준다. 죽은 자에 대한 자유로운 방담도 끝나고 이제 그들도 새로운 죽음앞에 마주서게 된다.
이제 영화는 종결부로 치닫는다. 처음 전투장면이 미군과 독일군을 포함해서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매우 거시적이고 외향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이었다. 영화는 분명 왜 이렇게 많은 죽음이 있어야 했는가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약간의 인물들을 보다 세밀히 관찰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내면을 쫓아가는게 방법일 것이다.
답은 어느 정도 나왔다. 라이언이라는 인물은 충분히 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하나의 생명과 다른 하나의 생명이 서로 더하기 빼기해서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라이언이라는 인물은 하나의 상징으로 놓여있다. 왜 굳이 대서양 너머까지 아들들을 보내야 하는가? 타인의 자유를 위해 굳이 우리의 자유가 희생되어야 하나?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그런 일련의 질문들 속에서 라이언은 2차대전을 통해 미국이 지키려고 했던 땅과 사람과 가치를 모두 축약시킨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상징은 충분히 자신의 가치를 내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던져진 답을 놓고 구출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결말은 아주 빠른 템포로 처음에 보았던 것과 같은 전투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처음의 전투장면이 진지한 문제 제기를 위해 세밀하고 충격적인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면 마무리 전투장면은 실은 그냥 서부활극의 수준을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상적이었던 대목도 얼마간 있었다. 본인이 영화를 본 곳이 삼성플라자의 씨넥스라는 영화관이었는데 사운드 시설이 좋다보니 마치 내가 전쟁터의 한가운데서 타이거 탱크의 굉음을 듣는 고통스러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사운드는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독일군 SS 친위대원과 미군 한명이 칼한자루를 들고 서로 맞대결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삶과 죽음이 이런식으로도 갈라지는구나 하는 가르침 하나를 받았다. 서로 위치가 뒤바뀌면서 죽이려하다가 죽게되는 순간에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해보다가 마지막으로 외치는 말은 “안돼” 였다. 조금전에 사람을 죽인 칼을 툭툭치며 여유있게 계단을 내려오는 승자를 보면서 우리의 샌님은 여전히 벌벌떨며 한쪽에 앉아있었다. 동료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과 자신에게 밀려오는 공포 이런 것들이 뒤섞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것이다. 전황은 급격히 밀려가면서 미군들을 차례로 쓰러진다. 그렇게 미군을 쏘아붙이는 독일군 중에는 어디서 낯이 익은 사람이 하나 있다. 아까 벙커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살려준 병사였다. 그를 보는 순간 샌님이 느끼는 한숨 그리고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계속 밀려온다.
하지만 영화는 어차피 해피엔딩이고 독일은 지게 마련이다. 우스꽝스러운 전투기의 등장으로 적의 탱크는 부서지고 우리의 샌님은 갑자기 일어나서 독일군들을 세우고 아까 살려준 사람을 이제 자기손으로 죽이게 된다. 무엇인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설정일 따름이다.
톰 행크스에게는 약간의 숨돌릴 기회가 주어진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죽음이 헛되지 않게 열심히 살아라라는 메시지였다. 영화는 다시 회고가 시작되었던 묘지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 삶을 다 누린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그가 남긴 족적들은 뒤에서 그를 쳐다본다. 뒤돌아보며 묻는 말은 아 참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만큼 값어치 있는 삶을 이루어냈을까하는 것이었다. 답은? 아마도 그렇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모두들 전쟁의 목적에 대해 영화가 보여주듯 그러한 숭고한 자기 희생의 영웅적 이미지에 동조할 수 있을까? 2차 대전 바로뒤에 있었던 한국전쟁과 조금 뒤에 있었던 베트남 전쟁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회색빛에 담아서 아련하게 보이도록 포장한 감독의 테크닉에는 실상 붓의 테크닉으로 감쳐진 상처들이 잔뜩 담겨있는 것이다.
미국이 끊임없이 2차대전의 영웅담을 강조한다면 한쪽 당사자였던 독일에서는 베트남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런 균형감각을 가지지 못한채 영화에 대한 기억을 마무리한다면 또 하나의 희가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영화 곳곳에 스필버그의 유태인다움이 가끔 드러나지만 묘지에 놓인 특이한 십자가도 지켜볼만하다. 다윗의 별이라고 유태인의 상징이 묘비 앞에 놓여있는 것은 유태인도 분명 이 전쟁에서 한몫을 했다는 시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