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장면들은 게르마니아의 숲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묘사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역사적 배경을 약간 설명하겠다. 영화의 시점은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치세가 끝나가는 순간이었다. 원래 로마문명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해서 지중해세계를 모두 통합했고 캐사르에 의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까지 정복했다. 하지만 지금의 독일인 게르마니아지역에서는 더 이상전진을 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인데 하나는 지리적인 것으로 게르마니아 지역은 개발이 덜되어 길이 작고 많은 부분이 숲으로 이루어졌다. 숲에서는 기병의 활약이 제한되고 지리를 잘 아는 원주민의 매복과 기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복전쟁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게르만인들의 성격으로 이들은 문명화된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들의 자유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정복하기 위한 노력과 비용보다는 얻어지는 이익이 적다고 생각되었다. 실제 로마군은 토이거부르그 숲이라는 곳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군단 여럿이 몰살당하게 되었다. 어쨌든 제국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이 부근을 북방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더 확장하지도 물러서지도 않도록 상황을 유지하였다.
한동안 평화롭던 북방의 경계선도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세 때쯤 되어서는 점점 강해지는 게르만인들의 압력에 의해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최전선에 나와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게된다.
이제 막 눈앞에 보여지는 숲에 머무르고 있는 관객의 주의를 감독은 곧 전쟁터로 끌고 간다. 수많은 사람과 사람이 충돌하는 대 전투가 벌어지고 덕분에 한동안 정신도 차리기 어려워진다. 하나 하나의 국면을 본다면 살육행위로 이어지는 잔인한 전투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장엄한 느낌조차 다가온다.
장군이 직접 일선 전투에 참가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용맹을 발휘하는 모습은 흔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도적인 복선이 깔려있다. 그는 곧 그 용맹을 다른 공간에서 발휘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전투는 로마제국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우선 막 죽음을 넘긴 병사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싸워야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들을 대표해서 장군 막시무스는 황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청원을 한다. 이미 제국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로마군은 대부분 직업군인으로 충당되게 된다. 원래 로마의 출발은 자유민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무장하고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업군인이라면 그저 돈을 받고 그 대가로 싸울 뿐이지 별다른 명분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그래도 전쟁은 잔혹한 것이다.
여기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장면이 잔혹할수록 “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한다. 이 질문은 싸움터의 로마군을 대표하는 막시무스 뿐이 아니라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 모두가 품게 된다. 로마의 상대편인 게르만인들은 여기에 대해 간략하고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가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영화에 계속 보여주는 고대사회는 엄격한 신분의 차별을 가지고 있는 사회였다. 평민이나 노예들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폭은 지극히 작을 뿐이다. 자신과 가족에게 그런 노예로서의 삶을 살게하지 않기 위해서 게르만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비슷한 대답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도 나왔던 것을 잘 기억해보시기 바란다.
이 국면에서 황제가 갑자기 목숨을 잃는다. 범인은 바로 자신의 아들인 코모두스이다. 이유는 황제가 자신의 제위를 아들에게 넘기지 않고 장군 막시무스에게 주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지만 한가지 배경은 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 이어지는 5현제 시대에는 황제의 지위를 무조건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골라 미리 입양하고 권력수업을 시킨 다음 넘겨주는 전통이 있었다. 비록 민주주의 만큼 민의가 반영된 것은 아니라도 제법 개인의 욕구에 비해 공공의 이익을 고려한 훌륭한 제도였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아들 코모두스는 오랜만에 나온 폭군으로 무척이나 어리석게 살다가 신하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래서 왜 현명하고도 사색이 많아서 <명상록>까지 지었던 스토아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가 그런 이기적인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역사학자들은 많이 가졌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과감히 여기에 픽션을 도입해서 하나의 자연스러운 해명을 하려고 한다.
황제는 원래는 막시무스를 현명하고 사심 없는 자로 선정했었지만 아들에게 자신이 죽음으로 그 유지가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황제는 죽고 새로운 황제 코모두스가 요구하는 충성서약을 거부한 막시무스는 기습적인 체포를 당해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다. 여기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아 고향으로 내달았지만 부상 때문에 어렵게 도착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새까맡게 타버린 가족들의 시체들이었다. 절망 때문에 쓰러진 그가 눈을 떠보니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노예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체력이 건장한 그는 곧 검투사로 선발된다. 사막위에 놓인 자그마한 도시 그곳에도 원형극장은 있다. 그 곳에서는 과거 그리스 사람들이 연극을 보고 정견을 발표하고 운동경기를 하는 참여의 문화 대신에 황제의 신하가 내리는 포고를 듣고 관리들의 판결을 보고 검투사가 서로 찔러 죽이는 것을 지켜보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관객과 주체는 분명 서로 다른 자리다.
로마 문명의 보편성은 여기서도 확인될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은 심하게 말하면 보편적인 허무였다.
이곳에서 막시무스는 앞서의 싸움터에서 보여주었던 기술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이유는 단 하나 살자는 것 뿐이다. 나중에는 아예 혼자 나가서 상대방을 모조리 해치우기까지 한다. 피가 많이 튈수록 환호의 목소리도 커져 간다. 무수한 사람을 죽인 자신에게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막시무스는 칼을 내던져 버리기 까지 한다.
지방에서의 놀라운 활약으로 만들어진 명성은 그가 속한 검투사 집단을 로마의 대형경기장에서 열리는 황제 즉위 축하연에 초대되게 만든다.
시합이 열리는 공간을 조금 더 살펴보면 여기저기에 빵이 뿌려지고 있다. 이미 당시의 로마군중들에는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할 능력조차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일이 없는 사람들만큼 허무한 존재들도 드물다. 곳곳에 세워지는 영광스러운 건축물들 장엄한 행진 하지만 어느곳에도 민중들이 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들은 단지 관객으로 남겨지고 계속 그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받는다. 이들이 쌓이는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응해서 나온 것이 바로 원형경기장의 살육극이었다.
죽고 죽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게르만의 싸움터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게르만 전사들의 싸움도 제국의 영광을 지키려는 로마 병사들의 외침도 아닌 단지 관객으로서의 환호일 뿐이다. 투표할 권리조차 빼앗기고 체육관에서 벌어지는 선거의 결과를 TV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노예 같은 백성들과 별로 다들 바 없는 삶이다.
원형 경기장에서 주최측은 자마의 전투를 흉내내게 된다. 자마 전투는 기원전 198년에 있었던 것으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과 로마 장군 스키피오가 각기 운명을 걸고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것이 경기장 현장에서는 전차와 노예군의 대결로 나타난다. 말이 끄는 전차에 타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활로 공격하는 적에 맞서 발이 느린 보병으로 이루어진 막시무스 쪽은 아무래도 불리할 수 밖에 없다. 훌륭한 지휘관의 자질 중 하나가 위기에 대해 발빠르게 대응하는 능력이다. 막시무스는 빠르게 대열을 만들게 했다. 그리스의 팔랑스, 로마의 레지움은 모두 대열을 만들어 위세를 보이는 전법이었다.
이런 효과는 경기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처음에 손쓸 수 없이 밀리던 막시무스 측에서 완전히 상대를 제압해버리게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말까지 집어 타고 상대방을 해치우는 보복까지 수행한다. 거의 경기장에 모인 모두를 압도하는 솜씨였다.
덕분에 반갑지 않은 손님을 빨리 만나게 된다. 황제가 아예 내려와 자신을 부르게 되자 꼼짝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되었다. 완전 무장한 근위대가 자신들을 포위한 상태에서 목숨에 대한 결정은 황제에게 달려있다. 이때 계속 그들을 살리라고 환호하는 군중들의 위세는 막시무스가 당당히 걸어나 올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서로 이미 상대를 알아보게 되었다면 어느 한쪽이 끝장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막시무스를 죽이려는 황제의 시도들은 계속 무산되었지만
그라쿠스라는 원로원 의원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꽤나 유명하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가장 애틋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형제들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다 죽어간 덕분에 그들은 오랫동안 이름을 남겼고 오늘날에는 헐리우드의 영화감독들에게 꼭 이런 장면에 소신있는 지도자의 표상으로 써먹히게 되었다.
그라쿠스와 협력하고 밖으로 나가 자신의 군대를 불러들이려는 막시무스의 시도는 여러 동조자들을 규합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욕심만 그득했던 검투사들의 주인이 대의에 동조해서 막시무스에게 기회를 주게하는 것은 꽤 부자연스러운 기획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그가 전황제로부터 목숨을 구하는 징표로 목검을 받았었다고 설정한다. 고대사회의 인간관계는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행위가 동서를 막론하고 있었다.
이제 영화는 마지막으로 치달았다. 황제가 직접 복수를 위해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인기 높은 검투사를 꺽어 더 높은 인기를 얻기 위해 아니면 공공장소에서 정당한 수법으로 상대를 해치워서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서게된다. 역사적으로도 실제 코모두스 황제는 직접 칼을 들고 검투사들과 싸움을 했지만 실은 엄청난 비웃음과 경멸을 샀을 뿐이다.
영화에서 그는 비겁하게도 독침으로 그의 몸에 상처를 내어놓고 싸움을 건다. 막시무스는 복수를 성공했지만 그 자신의 생명도 꺼져갔다. 계속 이어지는 비겁함과 추함에는 마침내 근위대장까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막시무스의 생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어느 순간에 경기장이 보이다가도 곧 아내와 아이들이 사이좋게 서있는 들밭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생에 대한 믿음이 짙게 깔려있다. 사려 깊은 관객이라면 영화 중간 쯤에서도 막시무스가 동료 검투사와 대화하면서 먼저 죽는다면 아이에게(아내는 빼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달라는 대화를 나눈 것도 기억을 할 것이다.
이러한 소망들은 결국 이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이승의 거친 모습을 초월하게 만드는 내세와 불멸의 가치를 담고 있는 종교였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치세에서도 기독교는 자유를 위해 피흘리는 싸움을 계속했고 결국 후대에 와서는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종교의 핵심은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기독교란 모두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들이 베드로와 같은 어부건 바울과 같은 가죽 수선공이던 노예건 할 것 없이 모두를 말이다. 오늘 그들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자신의 존재가 실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을까? 그렇게 해서 로마는 황제의 제국에서 교회의 제국으로 변화해가게 된다.
막시무스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유언은 그라쿠스를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복원하라는 것이다. 버려진 황제의 시신을 내팽겨 쳐버리고 소중히 막시무스는 실려나간다.
여기서 더 영화를 끈다면 역사의 왜곡이 점점 더 크게 일어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막바로 엔딩신이 나오게 하는 것으로 감독의 거대한 스펙터클 기획은 마무리된다.
감독이 역사를 왜곡시켰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실은 교묘한 배치를 통해 많은 부분에서 역사의 의미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은 역사적 진행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강자에게는 더 강해질 권리가 항상 있지만 약자에게는 늘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소한 오락거리들을 보면 로마시대와 얼마나 흡사한지를 발견하고 놀랄것이다. 원형극장은 TV로 검투사의 피튀기는 싸움은 장갑을 낀 권투선수의 경기와 각종 프로스포츠로 대체되었다. TV를 보며 먹는 각종 인스턴트 식품들은 황제가 주던 빵과 비슷하지 않을까? 감독은 다시 현대의 로마인들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