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제갈량에게 주어진 문제는 오랫동안 유비 주변에서 같이 행동하던 기존 측근들과의 조화였다. 원래 중국 사람들은 동향이라는 개념을 매우 중시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도시국가에 매여있었듯이 중국도 하늘아래 하나의 땅이라는 의미의 천하와 함께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동향인이라는 개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고대세계는 상업이나 군사의 목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여행이 없었고 따라서 태어난 곳에서 주변 사람들과 같이 평생을 보내다가 다시 묻히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형성된 지방 문화가 그 지역 사람들의 의식을 많이 좌우하였고 따라서 누구를 지칭할때도 무슨 땅 출신의 누구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유방에 대한 기록에도 패현 출신의 인재들인 소하,조참 등이 세력을 형성해서 계속 승상 자리를 주고받으며 군주를 끝까지 보필하는 모습이 보인다. 유방은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해서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추천하던 인재들이 모두 동향 출신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유비 주변의 관우와 장비는 도원결의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밥을 같이 먹고 잠을 같이 자는 사이였다. 이런 측근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이를 모두 통솔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들 삐딱하게 보는 상황에서 제갈량은 영입되자 마자 막바로 오나라의 손권을 설득해서 조조에 대한 싸움에 나서는 임무를 특유의 논리와 설득력을 잘 풀어낸다. 이런 식으로 필요한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면서 그의 역량을 주변에 확인시켰고 궁극적으로 관우와 장비 같은 오랜 측근들 보다 유비를 더 잘 보좌하는 2인자 자리에까지 올라서게 된다.
유표가 죽자 유비에게 어떤 사람은 이것을 기회로 형주를 차지하라고 권유했지만 적어도 유비는 그런 인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형주의 유종이 일방적으로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앞뒤로 적에게 노출되었고 할 수 없이 남쪽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도 조조를 두려워하는 민초들이 함께 가기를 청하다 보니 군대의 걸음을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조조의 기병 5천에 따라 잡혀 참담한 패배를 겪는다. 여기서도 대부분의 민초와 물자를 빼앗기고 몸만 간신히 빼올 수 있었는데 아끼던 자신의 부인까지 잃어버렸다. 지극히 바보로 보일 정도로 잇속에 밝지도 않았던 유비의 이야기를 보면 어떨 때는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그럼에도 감탄하는 것은 자신이 정한 원칙을 철저히 지켜나가고 한번 도움 준 이들을 배신하지 않은 인품이 느껴진다. 바로 그 점이 유비가 땅이 없으면서도 사람은 부자일 수 있었던 배경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