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도 워낙 많은 싸움을 치르면서 가끔은 질때도 있었다. 특히 처음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나가던 초반기에는 힘이 크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최전선에 앞장서야 때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시기에는 위험이 자신의 몸에까지 미칠뻔 했던 사례가 여러번 있었다. 삼국지 연의에 보면 적들이 조조를 깍아내리려고 조조가 겪었던 고충들을 열거하는 장면이 나온다. 몇가지는 정사에도 분명히 나와있는 사실로서 조조의 역정이 그리 순탄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처음 여포와의 싸움에서는 성에 잘못들어갔다가 간신히 살아나온 일화가 남아있고 장수와의 싸움에서는 일단 항복을 받아내었지만 여자를 뺏는 지나친 오만함을 보이다가 역습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여기서 조조는 대신 아들과 조카가 죽고 만다. 조조의 부인은 여자때문에 아들을 잃고 돌아 조조를 상대하지 않았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적벽에서 유비와 주유의 연합군 때문에 손해를 보고 물러난 것도 뼈아픈 패배였다. 이후에도 마초에 이끌린 서강세력과의 전쟁에서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야만 대적이 가능했다. 유비와 겨룬 한중 전투에서는 별로 우위를 지키지 못해서 체면을 구기게 되자 이른바 계륵(우리말로는 닭갈비로 먹기도 신통치 않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깝다는 의미로 사용됨)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최고 지도자가 위험을 겪는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모범을 보인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맞서 싸울 자신들의 숫자가 적보다 적다면 아무래도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럴 지도자까지 뒷짐지고 지켜본다면 더욱 불안하다. 반면에 지도자가 앞에 서서 스스로 위험에 노출 병사들은 우리가 그래도 싸우는 목적이 있고 승산도 있구나 하고 따라 나서게 된다.

 

어쨌든 조조는 패배보다는 승리가 훨씬 많았고 더구나 같은 적에게 연달아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조조는 무엇보다 사물의 전국면을 내다보는 입체적 사고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다음을 내다 있는 전략적 사고를 있는 능력이 있었다.

과거의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전달된다 하지만 여기서 교훈을 얻어 지금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에 딸린 것이다. 천재와 범인을 구별하는 것은 이런 능력의 유무인데 조조의 활동을 보면 천재라고 인정해 있는 장면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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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여러 지방권력자 중의 하나로 머무를 때와 중앙에서 황제를 모시고 있을 때의 전략이 같을 수는 없다. 황제를 모신다는 건 그만큼 명분을 가지고 주변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힘만 강조해서 밀어붙이려 한다면 이 또한 한계가 보일 것이다. 두가지를 조화롭게 활용하는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가령 황제가 조조를 승상으로 올리자 원소가 거북함을 느꼈다. 이 때 조조는 재빨리 자신을 낮추고 원소를 올려세우는 기민한 대응을 했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원소의 특징을 알기에 싸움을 뒤로 미루려는 계산의 결과다. 조조의 본거지가 천하의 중심부가 된 이상 장점과 단점이 생겼다. 어떠한 곳으로도 가장 빨리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보면 적대적인 세력에게 항상 포위당해 있다는 단점도 가진 상태였다. 조조의 군사력만을 놓고 보면 많은 싸움을 치른 경험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원소를 포함한 주변의 적들과 비교하면 그렇게 많은 병력이라고 할 수 없다. 한쪽을 마음먹고 공격하러 나가더라도 다른 지역의 적이 뒤를 노릴 수 있기 때문에 병력을 두텁게 남겨야 했다. 특히 이 당시의 전쟁은 식량의 보급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굳이 무리를 해서 많은 병력을 장기간 끌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각각의 원정은 되도록 빨리 마무리지어져야 했다. 오랫동안 비운다면 자신의 빈집이 털리게 된다. 여러 상대를 놓고 싸움을 빨리 벌이고 빨리 매듭짓기 위해서는 역시 속도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속도를 만들어내는 힘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결단력이다. 조조의 강점 중 하나는 결단력이다. 승부를 내야 할 곳이나 시점이라면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반면 상대방은 대부분 주저주저하면서 여기에 맞서지 못했다. 즉 집중과 속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조조에게 뒤쳐지는 것이다. 자신의 장단점을 알기에 조조는 정예병력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해서 공격하는 기습 작전을 잘 시도하였고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둔다. 원소와 본격적인 싸움을 하기 전에 우선 유비를 기습공격해서 격파한 것 등은 좋은 사례이다. 뒤집어 보면 조조의 상대방들은 그런 기민한 작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조가 장수나 유비를 공격할 때 원소는 가만있었고 원소와 관도나루에서 격전을 벌이고 계속 이어서 원소의 본거지를 공략하는 동안에도 유표나 한수는 자기본거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음으로 각각의 적을 공격할 때 조조는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이를 바탕으로 세부적인 작전을 수립하였다. 조조의 싸움들을 보면 누구보다 도박을 잘 할 줄 알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의 행위가 도박으로 보였지만 실은 그가 충분히 상대의 기질과 상태를 이해하고 하는 행동이었다. 그만큼 상대를 잘 읽어내는 힘은 그가 인간에 대해 특히 자신과 겨루고 있는 상대방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손자가 강조한 지피지기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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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군사력 조조는 작은 무력집단에서 출발해서 계속 성장해나가 결국 중원을 통일해가는 대장정을 밟아나갔다. 동탁의 제안을 거절했기에 주요 지방관으로 임명되지 못했다. 가문의 배경이나 친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3대가 재상을 지내며 지방에서 권력을 쌓았던 원소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다. 유비처럼 밑바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배경은 아니었다. 이런 조조가 다른 경쟁자를 누르고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그가 전쟁에 나가서 거의 대부분 이겼던 상승장군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동탁,여포,공손찬 등은 대부분 이민족을 포섭하여 자기 군대로 거느릴 수 있었고 이 군대 자체가 그들의 경쟁력이었다. 반면 조조의 강점으로는 조조 자신이 가진 지략을 꼽을 수 있다. 세상의 흐름을 크게 보고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위치를 알아 보아 해야 할일을 순서대로 잘 배치하는 것이 전략이다. 그렇게 수립된 전략을 바탕으로 실제 하나 하나의 목표를 이루는 것은 전술이다. 조조가 처음 가진 전략은 거점을 중심으로 주변의 적을 물리쳐 영역을 하나씩 넓혀가는 것이다. 가장 껄끄러운 적인 여포, 원술 등을 제거하기 위해 우선 친분이 있고 거점이 멀리 떨어진 원소와는 동맹관계를 가져갔다. 중국의 고대 전략으로 유명한 원교근공 전략이다. 이렇게 일정한 영역을 확보한 다음에는 중앙으로 나서게 된다. 중국의 수도는 거의 대부분 낙양이나 장안이었다. 이곳은 천하 어디로든 쉽게 나갈 수 있고 각 지역의 물자를 수송 받을 수 있는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 그리고 이 지역 자체가 옛날부터 경지가 넓고 농경이 발달하여 인구가 많은 중심부였다. 사회가 안정되고 정부의 힘이 강할 때는 사방을 제압할 수 있지만 힘이 부족하면 거꾸로 사방에서 중심으로 몰려들어온다. 그래서 중앙을 차지하려면 명분과 실력 두 가지를 잘 겸비해야 한다. 조조가 헌제를 맞아들임으로 명분을 확보했고 원소를 제외하고는 일대일로 조조를 꺽을 만한 실력을 가진자가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시점이다. 내가 나중에 힘을 더 키웠다고 해도 남이 황제를 차지하고 있다면 싸워야 빼앗을 수 있게 된다. 어쨌든 조조로서는 이 때가 자신이 나서기에 적절한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판단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은 조조의 대국적 안목이었다. 처음 동탁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을 때 다른 장수들과 다르게 조조는 천하를 전체로 한 덩어리를 이룬 시스템으로 보았고 지정학적인 분석을 통해 싸움을 장기적으로 유리하게 끌어가려고 했다. 전쟁이란 칼과 창으로 치고 받는 싸움만이 아니라 자원의 흐름과 민심을 고려해가는 커다란 사회적 경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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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통치

조조의 능력 하나가 전쟁이고 다른 하나가 정치라는 것을 앞에서 지적했다. 정치에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관용의 미덕이다. 물론 미덕이 애초부터 그에게서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위에서 지적했다. 하지만 한번 깨달은 그는 시종 서주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

우선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조조에게서 가장 높게 평가할 만한 중의 하나는 그가 장수라는 지방군벌을 용서했다는 점이다. 장수는 처음에 자신에게 항복했지만 바로 번복하는 바람에 조조 자신 또한 거의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었고 결국 조조의 아들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복수를 위해 여러차례 정벌을 하려했으나 실패했었는데 원소와의 대전을 눈앞에 두고 작자가 자신의 군대를 들어 조조에게 항복해왔다. 보통사람의 기분 같아서는 자식의 복수를 위해 칼을 뽑을 수도 있겠지만 조조는 깨끗하게 용서하고 그를 매우 공정하게 대우했다. 

 

여기서 잠시 이전의 고사를 하나 살펴보자.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논공행상을 할때 주저주저 하자 주변의 공신들이 모두 동요하여 반란이 일어날 하였다. 이때 조언을 받아서 자신이 가장 미워했지만 공은 아주 없지 않은 사람에게 첫번째 포상을 내렸던 일이 있다. 포상받은 사람이 고마워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변사람들이 보는 눈이다. 이런 시범조치를 통해 다른 여러 사람들이 그렇다면 나는 그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

유방의 고사와 조조의 장수에 대한 조치는 이와같이 서로 맥이 통하는 면이 있다. 후일 조조에게 원소의 아들이나 형주, 한중 등이 자발적으로 귀순하게 되는 것은 일관된 관용정책이 영향을 끼쳤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예는 계속 이어진다. 조조가 오랜싸움 끝에 원소를 격파하고 보자 원소에게는 조조 진영의 사람들이 보낸 편지들이 잔뜩 있었다. 내용의 상당수는 조조쪽의 정보를 원소에게 보내려는 시도들이었다. 이를 열어보자는 측근들의 주장에 대해서 조조는 웃으면서 모두 태워버렸다. 한마디로 과거는 이상 묻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반면에 이전까지는 싸움에 장수를 처벌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지고 돌아오면 상응하는 벌을 주겠다고 공표하였다. 과거에 약할때는 무조건 자기 편에 남아있기만 해도 고마왔다 하지만 이제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가 되었기 때문에 상벌을 엄히 적용할 있게 것이다. 두가지 조치는 과거를 덮어둔 대신 철저히 미래지향적이라 있겠다.

 

이런 각도에서 여포에게 쫓겨 귀의한 유비를 죽이라는 정욱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받아들여서 여러 사람을 끌어들일 있다면 거꾸로 사람을 죽여서 여러 사람이 떠나가는 것도 자명한 이치다. 당시 조조도 유비의 능력을 인정했고 쉽게 자기 밑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순간 순간의 이해보다는 자신이 수립한 원칙에 맞추어 행동해나갈 정도의 책임과 여유가 생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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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를 물리치고 간신히 본거지를 회복한 조조에게 하나의 기회가 왔다. 바로 한의 천자인 헌제가 이각과 곽사라는 무력집단 사이에서 벗어나 유랑하다가 조조에게 의지하게 것이다. 그냥 하나의 군벌에 불과하던 조조가 외면적으로나마 황제의 명을 받드는 형식을 갖추게 것은 이때였다.

패라는 외곽 지역의 소군벌에서 황제를 모시는 중앙정부의 승상까지 올라간 조조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하나의 벽을 넘어야 했다. 이전의 동탁이 그랬듯이 신참이 권력을 잡으면 기존 중앙귀족의 반발이 심하다. 덧붙여 조조는 정복전쟁을 해나가면서 새로 점령한 곳의 지방호족들의 도전도 받고 있었다. 이를 요령껏 무마해가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은 물리적 정복이 아니라 정치의 역할이다.

조조의 시대는 한편으로는 황건적의 난을 통해 구질서의 파괴가 진행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전쟁이야 위에서 싸우면 되었지만 질서의 수립에는 정치가 필요했고 이는 관용이라는 미덕이 없다면 결코 이루어낼 없는 일이었다.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라가 가진 기존 권위로부터 최대한 물려받아야 했다. 아직 조조가 차지한 지역은 극히 일부였고 한나라 조정의 말을 듣고 있지는 않지만 이를 대체하겠다고 나서는 위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도 자신을 낮추어 죽을 때까지 한의 신하라는 틀에 남는 모습을 보였다. 지위도 시종일관 승상이라는 자리를 고집했고 주변의 적이 거의 없어졌을 때에서야 왕으로 한단계 올라섰다.

 

한의 마지막 천자를 헌제라는 시호로 부르는데 시호는 보통 다음 대의 황제가 죽은 사람에게 덧붙이는 이름이다. 한의 마지막 황제에게 이러한 시호를 붙이고 대우한 것은 위왕조였다. 한의 마지막 황제는 조조는 물론 아들 조비보다도 오래살았고 죽은 다음에 위왕조에게서 시호를 받게 된다. 시대 상황을 고려해보면 헌제에 대한 대우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이후 왕조의 황제들 중에는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던 경우와 비교해본다면 괜찮은 마무리를 것이다.

난세에 황제가 되어 꺼져가는 왕조를 살려보려고 여러 모로 노력한 헌제의 모습은 자체로는 애처롭게 보인다. 잠깐 시선을 현대로 돌리면 영화 <마지막 황제> 나오는 부의의 모습을 보는 것과 비교할 있을까? 헌제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 있을 하기로 하고 다시 조조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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