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삼국지의 다른 백미라고 있는 제갈량의 북벌을 살펴보자. 여러 번의 대위 전쟁 중에 가장 조건이 좋았던 싸움은 천수,안정 지역의 호응과 맹달의 내응을 받을 있었던 첫번째 출전이었다. 원래 지역은 마초가 맹활약하며 지지를 받았던 곳이다. 마초와 조조의 싸움은 매우 치열했고 패전의 결과 마초의 일족 300명이 모두 멸해지고 오직 마대 혼자만 남았다고 한다. 정복된 지역의 주민들 또한 마음 깊이 조조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마초의 나라인 촉나라의 군대가 오자 크게 호응을 했다. 더해서 맹달 또한 조비가 들어서면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해지자 촉에게 내응의 뜻을 보였다. 두가지가 결합되었다면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기대해본다.

전장을 나서는 제갈량의 각오는 출사표라는 훌륭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전략으로 가자면 논란이 많다. 당시 위연은 자신에게 별동대를 주면 험하지만 가까운 길로 장안 앞까지 막바로 달려가서 적을 기습하겠다고 제안했다. 삼국지에서는 여기에 대해 무모한 이야기라고 비판하며 제갈량 편을 든다. 하지만 전략은 과거 한나라의 시조 유방이 취해서 대성공을 거둔 전례가 있다. 더해서 적이었던 사마의 또한 제갈량이 전략으로 나왔다면 위나라가 한층 위험했을 것이라고 평했던 것으로 보아도 타당성이 있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제갈량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바꾸어 말하면 과거의 전쟁에서 제갈량의 전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잠잠하던 국경선을 넘어 촉의 군대가 밀고 들어 오자 우선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준비가 안된 상대라면 역시 기습이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되는 증거들이다. 덕분에 차분하고 안정된 길만 선택했던 제갈량의 당시 선택에 대해 후세의 비평가들로부터 오랫동안 비판을 받았다.

한참 뒤에 여기에 대한 반론이 하나 제기 되었다. 왕부지라는 유명한 학자가 고증을 통해 제갈량이 사실은 전면적 북벌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라 제한적 전쟁을 시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설혹 장안을 점령한다고 해도 위나라가 더욱 많은 군대로 반격해온다면 촉의 군사력으로 계속 이기기는 어렵다고 것이다. 그래서 마초의 영향이 있던 강족 지역으로 가서 사람들을 끌어들여 군사를 보충하고 백성의 머리수를 늘리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라는 해석이다.

실제 지역 백성들은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군대를 따라서 촉으로 이주 했다. 어쨌든 가정의 실패 이후 이어진 모두 다섯 차례의 위나라에 대한 원정은 거의 대부분 성과 없이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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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입신하여 유비를 만나서 천하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을 나이가 아직 20 였다. 오랜 기간 동안 그를 보좌하게 되는데 먼저 손권을 설득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겨뤄 이겼고 촉이라는 천하의 귀퉁이를 차지하여 계속 양쪽에서 견제하는 전략을 추진하여 삼국이 마치 솥의 발과 같이 균형을 잡아 서로 견제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유비가 떠난 그의 아들을 보좌하여 여러 위에 대한 전쟁을 일으켜 유업을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전장에서 명을 다했다. 삼국간의 대립 당시에도 촉과 대치하던 진의 장수들도 그를 존경하여 휘하의 병사들이 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할 정도 였고 후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끊이지 않는 추앙을 받았다. 문학적인 재주는 후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士表에 드러나 있고 사회 경영에 대한 이해는 맹획을 잡았다가 놓아주는 전설에도 나오듯이 깊이와 폭이 제법 되었다.

 

유비가 쫓기는 신세에서 촉에 안착하는 과정까지 제갈량이 보여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견력은 매우 탁월했다. 당시 유비는 별다른 영토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세력의 수준이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 벌였던 촉과 한중의 공략은 후세에 보아도 정확한 방향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그의 안목의 정확함이 많이 확인되었다.

 

다음 리더의 요건 중의 하나가 따르는 사람들이 적절히 자기 목표를 갖게 하는 것이라면 제갈량의 업무수행은 높은 점수를 받을 있다. 촉이라는 나라는 유비를 따르던 떠돌이 세력에 의해 다양한 지방 호족들을 정복하거나 연합하면서 세워졌다. 이런 조건에서 후일 까지 불화 없이 정권을 유지할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내부의 단합을 유지했다는 증거다. 이를 통해 그의 리더쉽을 상당부분 확인할 있다. 이는 특히 조조의 위가 촉과의 전쟁을 통해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사마의에 의해 무너졌던 것에 비교해볼 보이는 장점이다.

 

물론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나이 어린 군주와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 의지하고 일을 꾸려갔지만 막상 제갈량이 떠나자 궁안에 머무는 군주를 둘러싸고 환관을 중심으로 파당이 생겨서 의사소통을 가로막아서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이반되었다. 이래서는 결코 전쟁을 이길 없었다. 이런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 것은 제갈량이 신하의 분수를 지켰다고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한계를 일찍부터 그었다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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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삼국지 전반부를 만들었던 조조와 유비가 퇴장하고 다음 세대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촉에서는 제갈량이 전권을 가지고 위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에 나섰고 여기에 대해 위에서는 사마의를 내세워 막게 된다. 이후 사람의 대결로 삼국지의 이야기가 전개 된다.

 

제갈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만들어낸 과장을 극복해야 한다. 적벽대전에서 바람을 불러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벌이는 싸움마다 이겨서 사마의를 혼쭐내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했지만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일 밖에 없었던 비운의 천재가 삼국지연의에서 그려진 제갈량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진수가 정사인 삼국지에서의 묘사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 유능하고 성실하며 공정한 재상이었다는 점은 강조하지만 반면 전장에서 대단한 기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라는 평가다. 이를 놓고 진수의 집안이 원래 제갈량에게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하고 멸망한 국가의 관리로서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입장에서 글을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이 전투의 전면에 나서서 커다란 성과를 적이 예상외로 적은 것은 부인 없는 사실이다. 정말 제갈량만 동원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유비가 서촉원정에 처음부터 동반하지 않았을까 의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역량 없이 후대에 그렇게 칭송을 받는 것은 아니다. 먼저 제갈량과 직접 대결하던 위와 진의 시각을 보면 제갈량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진에서 촉의 사관이었던 진수를 받아들여 제일 먼저 시켰던 일이 <제갈량평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제갈량은 어려운 존재였다고 느껴진다.

제갈량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점은 제갈량이 상당한 명문가 출신의 준재라는 것이다. 친형 제갈근은 오나라에서 손권을 섬겨 2인자의 자리인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조카인 제갈각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약간 조카뻘되는 제갈탄도 위나라의 지방 지사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나중에 사마씨에게 맞서기도 하였다. 가까운 친척들이 이렇게 각기 섬기는 군주를 달리하면서 인정받을 있었던 것을 보아도 집안이 상당한 명문이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사회의 특이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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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기질을 싸움에서 풀지 못하다 보니 평소에 사냥을 좋아했다. 남들처럼 사슴을 잡으러다니는게 아니라 아예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한번은 호랑이가 덤비는 통에 목숨까지 위태하게 되었는데 주위의 간언을 받아들여 튼튼한 수레를 만들어서 안전하게 호랑이 사냥을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손권 자신은 싸움의 재주가 부족했지만 반면에 현명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을 기용해서 적절히 임무를 위임하는 능력은 뛰어났다. 장소, 주유, 노숙, 육손 모두 충분히 몫을 인물들을 적절한 요소에 활용해서 성과를 만들어내었다. 점에서는 적어도 유표의 무리보다는 앞서는 것이다.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의리는 있지만 때로 하는 기질을 참지 못해 감정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신하와 말이 오고 가다 갑자기 화를 내며 직접 칼을 들어 처죽이려고 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신하가 바로 손권이 아버지처럼 받들던 장소였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한다.

건강해서 장수했던 것은 좋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판단이 흐려져 오류가 더욱 많아졌다. 공손연이 신하가 뜻을 보이자 멀리 요동지방까지 1만이 넘는 군대와 많은 물자를 보내주었다. 당시에도 장소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뜯어말렸지만 혼자 고집으로 밀어 붙였다. 공손연이 말을 바꾸어 병사를 빼앗고 위나라에 보고해버리자 쫓던 신세가 되버렸고 국제 망신을 톡톡히 당한 꼴이었다. 화가 장소가 집에 틀어 박히자 쫓아가서 집을 나오라고 주변에 불까지 질렀다는 보면 보통 성격은 아니었던 같다.

더해서 한참 동안은 불로장생의 비약을 찾아오겠다는 도사들의 무리에 빠져 적지 않은 재화를 낭비하기도 했다.

 

나이 들어서의 가장 문제는 후계체제인데 본인이 불로장생을 원하다보니 죽는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리게 된다. 막상 정말로 몸이 힘들어져서 포기하기 전까지 미루게 된다. 급작스레 결정하려다 보면 판단도 흐려져서 귀가 엷어지다보니 혼선이 많았다. 태자를 세웠다가 공주의 고자질에 폐해버리기도 했는데 과정에서 사람들이 서로 패가 갈려 싸우다 보니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지도력은 약화된다. 진시황에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미루려고 하면서 후계자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은 것이 통일의 위업을 빨리 무너뜨리게 되었는데 손권의 경우도 유사한 면이 있다.

즉흥적인 면은 여자 문제에서도 나타나는데 길을 지나다가 여인을 보게 되고 주워다가 맏아들에게 주었는데 여기서 나온 자식인 손호가 오나라의 마지막 군주가 된다. 손책이나 주유를 비롯하여 당대 오나라의 무장들 대부분이 일종의 약탈에 의한 혼인을 자주 했었다. 보고 마음에 들면 가서 빼앗는 것이다. 여자를 싸움의 전리품으로 본다면 이런 태도도 가능하겠지만 안정된 체제에서 후계자 양성을 위해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의 자녀교육이다. 그런 측면으로 보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를 빼앗아 들이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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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손권

 

손권의 자산은 아버지와 형이 만들어준 것이 대부분이다. 아버지 손견은 반동탁 전쟁의 최선봉에 섰었고 손책은 약간의 병사를 원술에게서 얻어 강동의 패자가 되는 기틀을 만들었다. 손권 자신은 형으로부터 창업에 능하지는 못해도 수성에는 적절할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창업자는 보통 스스로 판단해서 일을 벌리고 맨앞에서 실천해나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조를 계승하는 사람은 창업자와 같은 능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직접 일을 없지만 창업자가 구축해놓은 인맥들을 활용하여 일을 남에게 맡길 있다.

손책은 전투의 앞에 섰고 상하 관계보다는 끈끈한 동료의식으로 뭉쳐진 오나라의 지도층을 만들어 놓았다. 손권은 대체로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주어진 틀을 유지하였다.

 

조조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싸우기로 결단하였고 주유를 기용하고 유비와 동맹을 맺어 작전에 임하는 등은 틀에서 손권이 현명하게 판단한 것이다. 반면 유비와 관우에 유감을 가져서 형주를 공격 것은 하나를 얻고 둘을 잃은 것이다. 오랜 소원이었던 형주를 차지한 것은 하나를 얻은 것이다. 이로써 강동의 방어가 튼튼해졌고 물자와 인력 또한 풍부해졌다. 반면 유비와의 동맹이 깨져서 서로 목숨을 걸고 다투는 전쟁을 치르게 되어 조조를 물리칠 기회를 놓친 것은 전략 상의 아쉬움이다. 이릉 전투이후로 유비나 손권의 세력이 조조의 판도를 흔들 기회가 것은 거의 없다. 체제가 안정될수록 중원의 힘은 점차 강하게 느껴지는데 손권의 군사가 용감하더라도 강에서 싸울 때의 이야기지 배를 버리고 육지에 내려서 기병전에 능한 조조의 군사를 물리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손권 개인의 기질로 보면 무장 출신의 집안 내력이 잠재하고 있어서 모험을 좋아했다. 하지만 병사들을 지휘해서 전투의 승리를 쟁취하는 능력은 별로 없었다. 싸움의 선봉에 서지도 않았고 효율적인 전략을 짜내는 경우도 별로 보지 못했다. 직접 참여한 싸움에서는 오히려 패배를 경우도 있었다. 종합적으로 무장으로서의 재능은 별로 없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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