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유비를 처음 만났을 그의 나이가 20 중반을 넘어선 시점이었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무척 젊은 나이에 그는 천하의 형세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충분히 수행한 상태였다. 처음 갈등의 정치에 들어가지 않고 지방에 머무르던 제갈량이지만 계속 자신의 뜻이 크다는 점을 주변에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제갈량의 입장에서 출사를 하려면 중원의 우수한 인재들을 잔뜩 거느렸고 조조나 2대에 걸쳐 오랜 측근들이 둘러싼 손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형주의 주인 유표 또한 결단력이 없어서 수명이 다해가는 것은 가까이 보았다. 반면 유비는 아직 부족하지만 자신이 들어가면 발전할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삼고초려라는 진지한 자세 또한 사이의 신뢰를 만들게 했다.

 

과거의 유비라면 싸움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장기였다. 몇몇 전투에서 그를 따르는 관우, 장비 등의 활약에 의해 좋은 성과를 것도 보았다. 반면에 일정한 영토를 다스려서 내실을 다지는 것에는 별로 였다. 인품에서 좋은 평판은 얻었지만 결국 땅을 빼앗긴 것을 보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비해 제갈량은 법가적 사고방식에 기초해서 유비가 만들어낸 인덕 중심의 운영체제를 바꾸어버렸다. 실제 나중의 진행과정을 보더라도 제갈량이 전투에서 대단한 지략을 짜내어 승리를 거두었다고 묘사된 삼국연의의 이야기들은 거의 허구다. 반면 내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인심을 얻고 체제를 안정시켰다는 업적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유비는 이제 자신의 부족한 약점을 보완해서 크게 도약할 기회를 제갈량을 통해 맞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갈량의 천하경영이라는 뜻도 유비라는 인물을 만나서 현실로 발휘되었기에 이후 조조를 적벽에서 물리치고 촉을 얻어 ,오와 함께 삼국의 형태로 천하로 나누는 대사업을 함께 하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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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유비의 서촉정복

 

이제 하나의 영웅 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적벽대전 이전으로 보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비가 보인 활약은 별로 없다. 대부분 전쟁에서 지고 도망다니는 모양이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여포에게 서주를 잃을 때도 가족조차 지키지 못했는데 결국 아들을 하나 밖에 얻지 못한 것도 이런 방랑의 결과다.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유비가 탁월한 장수라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적을 살펴보면 유비는 이긴 것보다 진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조조군과의 싸움에서는 거의 대부분 패배를 겪었다. 하지만 유비는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해가는 인물이었다. 어려울 마다 공손찬, 원소, 여포, 조조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누가 보면 박쥐라고 하겠지만 삼국지 전반부에 활약하는 인물들 중에 유비를 무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점에서 유비에게서 상당한 잠재력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유비와 한번 인연을 맺은 관우,장비 여러 인물들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조조나 원소의 제의를 뿌리치고 항상 유비에게 돌아갔다. 서주에서도 미축 등이 합류했고 형주에서도 제갈량과 방통이 합류할 정도로 유비는 인복이 많았다. 뜻은 크고 인재도 늘었지만 이루어낸 것은 적어 조조와 싸우는 최전방의 하나에 배치되어 있는 신세가 바로 유비의 상태였다. 말을 타려다가 말에 살이 너무 붙었구나 바꾸어 말하면 전장을 뛰어다니며 공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한가하게 머물러 있었구나 하는 탄식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비육지탄의 고사다.

 

유비 스스로 나는 열심히 뛰었는데 이정도에 그칠까하는 물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동안 유비에게 부족했던 점은 전체 대국을 보는 관점과 기존의 호족들을 묶어내는 외교력이었다.

원래 유비는 왕가의 후예라고 자칭하지만 후세의 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아주 비판적일 정도로 출신자체가 아주 한미하였다. 이런 유비로서는 지방에 오랫동안 뿌리 내린 호족들과는 자라온 배경이 달라서 외교적으로 맞대응하기에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어려움을 메꾸어주는 역할을 위해서 제갈량과 같은 명문 출신의 인재가 절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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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시대로 보면 승자였던 조조는 후대에 와서 악인으로 묘사되고 패자였던 유비가 선인으로 평가되는 것은 쉽게 풀리지 않는 의문인 같다. 실제 유비의 가계는 한의 황족으로 보기에 명확하지도 않다. 조조를 비난하는 근거도 신하의 위치에서 군주를 몰아세운 이외에는 그렇게 뚜렷한 것이 없다. 조조는 이들에 비해서 전란에 휩싸인 농민들을 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로서는 이미 무너졌던 과거의 체제를 고집하거나 왕가의 혈육을 찾아 자리에 앉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조 자신은 끝까지 신하의 자리에 머무르고 아들의 대에 와서 한으로부터 선양이라는 형식을 취해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했다. 피를 것도 아니었고 전대의 황제를 죽음으로 내몬 것도 아니다. 이러한 식의 정권교체는 이어서 계속 발생하는데 때로는 평화적으로 때로는 피를 보면서 중국의 중세기간 내내 계속된다. 유독 조조는 간웅이라는 평을 넘지 못한다.

역사적인 평가를 그리 쉽게 내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정치가로서 둔전법을 실시해 국가체제를 안정시켰고 구품관인법이라는 중앙과 지방의 교류에 관한 법을 만들어 전국의 통합을 추구했다. 정책은 과거의 효시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개인적인 면에서도 문학에 관한 조예는 건안 7 걸에 자식 둘과 함께 포함될 정도로 뛰어 났고 당대의 여러 명사들과 지혜를 논할 있는 재주가 있었다. 전쟁에 있어서 상대방보다 세력의 열세에 놓인 적은 많았지만 항상 빠른 결단과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로 앞서 나갔다. 죽는 순간에도 도굴에 대비하여 자신의 묘에 아무런 보물을 넣지 말라고 하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역사적 존재 위에 덧씌워진 소설의 허구가 하나의 인물을 공정하게 바라보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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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조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거목에 대해 평가를 해보자. 삼국지와 관련한 논의를 보면서 조조라는 인물만큼 공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존재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전에 작가 이문열이 삼국지를 평역이라는 독특한 틀로 새로 쓰기 위해서 몇가지 사전 조사를 수행했다. 그때 중국 현지의 작가들이 이문열에게 결코 유비를 깍고 조조를 올리는 방식으로는 대중의 인기를 얻을 없다고 충고했다 한다. 수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조조의 고향에도 그를 기리는 사당이 없다고 한다.

실제 조조의 삶을 살펴보면 인간적인 면모의 지도자는 되지 못했다. 자기가 애초에 섬겼던 한왕조의 신하로서 충절의 예를 끝까지 갖추지도 못했다. 오히려 한나라의 수명을 끊었기에 후세인의 많은 비판이 따른다.

이들은 대체로 유교에 근거한 비판인데 나는 적어도 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대를 살아가던 많은 민초들은 전투집단들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자체가 무수한 고통을 겪었다. 상황에서 홀연 일어나 각지에 웅크린 군웅들을 격파 복속 시켜 중원의 평화를 가져온 업적은 결코 작지 않다. 천하를 스스로 잃은 것은 한의 잘못이지 결과로 떠돌게 유민을 추스려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 조조의 행위가 잘못됐다고 수는 없을 같다.

 

한의 시조인 유방도 천하를 얻은 진이나 초의 왕가에게 넘긴 것은 아닌데 굳이 조조만 비난 수는없다. 조조를 비난하는 가장 좋은 예로 여백사 사건을 거론한다. 진궁이라는 사람과 같이 도망하다 여백사라는 지인을 만나 도움을 받다 오해로 그의 가족을 죽이고 다시 여백사까지 죽였다는 일화다. 여백사를 죽이고나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냐고 묻는 진궁에게내가 천하를 배반하지 천하에게 내가 배반당하지는 않겠다 말했다한다. 말을 조조가 진짜 했는지는 의문이다. 했다면 들은 사람이 진궁 사람이니 그의 입으로 퍼져나갔어야 하는데 정사에는 전혀 이러한 부분의 기록이 없다. 소설가의 창작이 지나쳤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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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싸움은 이어진다. 마초가 다시 덤비는 것을 물리치고 아예 한중까지 밀고 가서 장로의 항복을 받았다. 장로는 성에서 물러나 농성을 하였지만 그의 소유물을 공동의 것이라고 해서 굳이 태워 없애버리지 않고 모두 남겨놓았다. 이러한 태도를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장로에게 정중한 말로 항복을 권유하였고 상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기회에 아예 촉까지 밀고가 유비까지 뿌리를 뽑아내자는 주변의 권유를 조조는 득롱망촉이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을 남기며 물리친다. 덕분에 유비는 싸움을 피하고 힘을 비축해서 나중에 한중까지 밀고 올라올 있었다. 조조가 다시 군대를 몰고 나와 직접 상대했지만 유비 또한 지리적 우세함을 이용해서 방어진을 치고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조조의 아쉬움은 컸지만 제법 커버린 유비의 군대를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계륵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를 빌미 삼아 양수를 처형하면서 물러선다.

 

어쨌든 운명의 시간은 되고 조조도 이상 수명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거부할 없었다. 마지막 가는 대목에서 조조는 한번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 무덤을 만들면서 절대로 재물을 같이 묻지 말라고 했다. 고대 군왕들의 무덤이 거의 대부분 도굴 것을 알고 있던 그에게는 굳이 그런 일로 자신의 잠자리까지 어지럽혀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유사하게 천하통일을 성취했던 진시황이나 한왕조의 극성기의 위업을 이룬 무제가 영원히 살기 위한 약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민력을 소모했던 점을 보면 조조의 이런 조치가 백성을 위하는 진보적인 정책이었다는 느낌을 적지 않게 받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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