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yla / Eric Clap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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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2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4-09-2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아저씨, 이렇게 생겼군요. ^^ 옆집 아저씨 같은데.

에레혼 2004-09-2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거기에 이 이름이 나오는군요, 에릭 클랩톤이 친구의 아내를 사랑해 지었다는 노래....
학교 때 한 선배의 이름은 '지나'였는데, 그 아버지가 젊을 때 '지나 롤로브리지드'를 좋아해 첫딸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요. 남자들이 의외로 감상적인 부분이 참 많지요, 그런 걸 보면......
미세한 겹침... 그런 것 저도 제멋대로 느끼곤 하는 편인데, 어떤 순간에 자의적이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게 누군가의 삶 속에 무례하게 뛰어들고 간섭하는 식이 아니라면 삶을 덜 지루하게 해주는 작은 묘미 아닐까요. 굳이 참지 마세요, 님...
 

 
 
 
 
 
 
 
 
 
 
 
 
 
 
 
 
 
 
 
 
 
<Nicolas POUSSIN, Winter, 1660-64, Oil on canvas, 118 x 160 cm, Musée du Louvre, Paris>

 

위 그림은 푸생의 작품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을 담은 연작 <4계> 중 <겨울>이다. 이 장면은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를 주제로 하고 있다.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다녔으며..."(창세기7:17~18)

 

왼쪽 화면 절벽 위의 나무 밑으로 으스름한 달이 보이고, 바로 그 아래로 정처 없이 물 위를 떠다니는 방주의 모습이 보인다.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에 오르매(...)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세기7:19~22)

 

화면 오른쪽 절벽을 보라. 차오르는 물을 피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땅에 기는 모든 것" 중의 한(=뱀)가 보인다. 겨울에 왜 홍수가 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유럽에선 가끔 겨울에도 홍수가 난다. 자, 오른쪽 화면 절벽 위로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를 보라. 거기서 좀더 오른쪽으로 가면 조그만 나무가 또 한 그루 보인다. 올리브 나무다. 비가 멎고 노아가 날려 보낸 첫 번째 새는 물이 채 빠지지 않았는지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돌아왔고, 두 번째 새는 하루 종일을 헤매다 결국 이 나무의 잎사귀를 물어 왔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올리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창세기8:11)

 

물론 이 사건이 있었던 근동지방에는 사계절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도 이 대홍수의 장면을 우리가 <겨울>의 정경으로 읽어야 한다. 왜? 바로 이 올리브 나무 때문이다. 즉 꽃(봄), 보리(여름), 포도(가을), 올리브(겨울). 이것들은 과거의 예술가들이 사계절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던 관습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어느 조그만 방, 사방으로 뚫린 통로 때문에 피자 조각처럼 네 조각난 원호형 방의 네 벽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장면이 서로 마주보며 걸려 있다. 그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다. 117*160cm 그러니까 웅장한 규모의작품은 아니다. 게다가 푸생의 고요한 고전주의적 터치는 달빝에서 우러나오는 조용한 모노크롬의 색채와 합쳐지면서 대재앙의 아우성을 고요히 잠재운다. 심지어 왼쪽 화면 위쪽에서 대각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벼락의 소리마저도 우리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온갖 잔혹하고 요락한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 현대인의 감정일 뿐, 당시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푸생의 마지막 예술적 유언이었던 이 작품. 처음 이것이 공개되었을 때, 이를 보러 온 당신의 관객과 비평가들은 이 작품 앞에서 마치 얼음처럼 그 자리게 얼어붙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과거에 자연은 신의 피조물. 아무리 난폭해도 그것은 창조주인 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 그리하여 신의 자녀들은 창조주를 통해 자연의 폭력을 조정할 수 있었다. 기도의 힘으로. 물론 그 시대라고 하늘에 올리는 기도로 자연을 통제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연을 신의 종교적, 주술적 통제 아래 놓고, 창조주와의 신앙적 일치 속에서 자연의 푹력을 적어도 심리적으로나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석 같은 신앙이 약화되는 시기엔? 자연의 폭력 앞에 벌거벗은 인간은 무기력을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저 자연의 폭력 앞에 압도당하여 얼음기둥처럼 그 자리게 얼어붙었던 게 아닐까? 알 수 없다.

 

 

 

 

 

 

 

 

 

 

 

 

<Summer (Ruth and Boaz), 1660-64, Oil on canvas, 118 x 160 cm, Musée du Louvre, Paris>

 
 
 
 
 
 
 
 
 
 
 
 
 
 
 
 
 
 
 
 
 
 
 
 

<Autumn, 1660-64, Oil on canvas, 118 x 160 cm, Musée du Louvre, Paris>

 

진중권의 <앙겔루스 노부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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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s Poussin, Landscape with the Funeral of Phocion, 1648, Oil on canvas
44.88 x 68.90 inches / 114 x 175 cm, National Museum of Wales, Cardiff, Wales, UK>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자 푸생이 그린 <아테네에서 옮겨지는 포키온의 주검>은 언뜻 보면 한 폭의 고즈넉한 풍경화로 보인다.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산고 언덕, 나무, 내, 고대의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 풍경 속에 점점이 사람들이 박혀 있는데, 맨 앞쪽에 흰 천으로 덮인 시신을 나르는 사람들이 그나마 뚜렷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점경에 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그림을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거리' 혹은 '거리감'이다. 회화적 원근으로서의 거리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에 등장한 포기온은 아테네 출신의 의로운 장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가 엄청나게 팽창할 당시 아테네의 안위를 지켜야 했던 그는 아테네가 잔인하게 파괴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지혜로운 협상책을 도모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갑작스레 죽으면서 발생한 혼란의 와중에 아테네의 민주파에게 반역자로 몰려 처단당했고 그 주검조차 아테네 땅에 묻힐 수 없는 형벌을 받았다.
 
그림은 그의 시신이 쓸쓸히 아테네를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때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위해 사회장을 치러주었고 조각상을 세워 그의 명예를 영원히 기렸다.
 
그림만 보면 우리는 그 어떤 역사의 굴절이나 격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다. 매우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화일 뿐이다. 포키온과 관련된 인간사의 갈등을 이렇듯 작은 점경으로 축소하고, 큰 침묵으로 광대하고 유구한 자연을 표현한 푸생.
 
이 작품은 그가 포키온 사건으로부터 2000년 가량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시간의 거리'와 인간사야 어떻게 출렁이든 우주와 자연의 질서는 영원히 정연하다는 이성론자로서 그의 확신이 갖는 '인식의 거리'가 녹아든 결과이다. 그 거리는 사색의 공간을 제공했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깊이가 확연히 드러나도록 했다. 푸생에게 '철학자 화가'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처럼 '거리'를 표현할 줄 아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Nicolas Poussin, Landscape with the Gathering of the Ashes of Phocion

by his Widow, 1648, Oil on canvas, 116 x 176 cm,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Landscape with the Gathering of the Ashes of Phocion (detail)>
 
역시 포키온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포키온의 재가 있는 풍경>도 앞의 그림과 같은 깊이의 문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포키온의 시신이 메카라로 추방되었을 때 그의 주검은 매장되지 못하고 화장돼 버려졌다. 영혼마저 안식을 얻지 못하고 공중에 떠돌게 하려는 조처였다.
 
그는 누구도 손대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용감한 그의 부인이 그 재를 몰래 거두었다. 그림 앞쪽에 몸을 수그린 여인 바로 그녀이다. 남편의 의로움을 알고 그를 사랑하기에 그녀는 지금 어떤 형벌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여인이 그녀 곁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들 돕고 있으나 그 외의 풍경은 전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 풍경 역시 당사자의 분노나 공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평온하고 무심한 풍경일 뿐이다. 이러한 '거시적 시선'과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질서정연함을 추구하고 소중히 여긴다. 혼돈은 싫다.
어두운 그림자가 날빛에 대해 그런 것처럼,
혼돈은 나와 대립하는 것이고 나를 위협하는 것일 뿐이다."
 
역사의 크고 작은 그림자들은 언젠가는 진리의 햇빛과 막닥뜨리게 마련이다. 미시적인 접근은 혼돈과 격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거시적인 접근은 냉철한 이성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세계를 전체로서 통찰할 수 있다. 이성과 규범의 승리를 믿었던 푸생은 이 신앙으로 자신의 회화를 위대한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이주헌의 <신화, 그림으로 읽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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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sky 2004-09-22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푸생 참 좋아하는데.. ^^ 그림들을 모두 커어다란 원화로 보고 싶은 소원이 있답니다.

에레혼 2004-09-2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생을 좋아하시는군요, 스타리님
저는 푸생을 '글'로 처음 만났어요... 그림을 보기 전에 문자로 묘사된 그의 그림 세계가 참 궁금했었지요.
저에게 푸생을 만나게 해 준 그 소설, 필립 솔레르스의 <푸생을 읽다>를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지금 정리중이에요. 그거 올리고 나면 또 들러주세요.
 

[인간이란 이런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습격을 계획하고,

돼지를 잡고, 함선을 지휘하고, 건물을 설계하며,

시를 쓰고, 장부를 정리하고, 담을 쌓고,

부러진 뼈를 맞추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안하며,

명령을 따르고, 명령을 내리고, 협조하고,

단독으로 행동하고, 방정식을 풀고,

새로운 문제를 분석하며, 퇴비를 뿌리고,

컴퓨터를 프로그램하고, 맛있는 식사를 요리하고,

효과적으로 싸우고, 당당하게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전문화란 곤충들이나 하는 것이다. ]

 

 

───로버트 하인라인

 


Abraxas - Pokuszenie(Live In Memori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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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9-2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군요... 이 사람이 제시한,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과 당당하게 죽는 일은 처음과 끝으로 배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에레혼 2004-09-21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글귀의 몇 가지는 마음에 들고, 몇 가지는 또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지막 말: '전문화란 곤충들이나 하는 것'이란 주장에 공감했습니다. 어떤 전문성도 갖지 못한 이의 자기위안일까요.....

hanicare 2004-09-22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저 역시 그 귀절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습니다.

에레혼 2004-09-2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하니케어님....
(씁쓸한 웃음의 표기는 어떻게 해야 그 느낌이 살아날까요?)
 
 전출처 : 하이드 > 책 읽는 그림 모음


 

 

 

 

 

 

 

 

 

 

 

 

 

 

 

 

 

 

 

 

Delphin Enjorlas, The Letter


 

 

 

 

 

 

 

 

 

 

 

 

 

 

 

 

 

 

Evening study - Christophe Vacher


 

 

 

 

 

 

 

 

 

 

 

 

 

 

 

Jessie wilcoxsmith , Good Housekeeping Nov 1921


 

 

 

 

 

 

 

 

 

 

 

 

 

 

Jessie wilcoxsmith , Books in Winter

 

 

 

 

 

 

 

 

lucmelanson

 



 

 

 

 

 

 

 

 

 

 

 

 

 

 

Maurice Sendak-reading is Fun


 

 

 

 

 

 

 

 

 

 

 

Yoshitomo Nara


 

 

 

 

 

 

 

 

 

 

 

 

Mark Ryden, Reader


 

 

 

 

 

 

 

 

 

 

 

 

 

 

Henry Lamb , The R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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