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olas Poussin, Landscape with the Funeral of Phocion, 1648, Oil on canvas
44.88 x 68.90 inches / 114 x 175 cm, National Museum of Wales, Cardiff, Wales, UK>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자 푸생이 그린 <아테네에서 옮겨지는 포키온의 주검>은 언뜻 보면 한 폭의 고즈넉한 풍경화로 보인다.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산고 언덕, 나무, 내, 고대의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 풍경 속에 점점이 사람들이 박혀 있는데, 맨 앞쪽에 흰 천으로 덮인 시신을 나르는 사람들이 그나마 뚜렷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점경에 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그림을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거리' 혹은 '거리감'이다. 회화적 원근으로서의 거리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에 등장한 포기온은 아테네 출신의 의로운 장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가 엄청나게 팽창할 당시 아테네의 안위를 지켜야 했던 그는 아테네가 잔인하게 파괴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지혜로운 협상책을 도모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갑작스레 죽으면서 발생한 혼란의 와중에 아테네의 민주파에게 반역자로 몰려 처단당했고 그 주검조차 아테네 땅에 묻힐 수 없는 형벌을 받았다.
 
그림은 그의 시신이 쓸쓸히 아테네를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때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위해 사회장을 치러주었고 조각상을 세워 그의 명예를 영원히 기렸다.
 
그림만 보면 우리는 그 어떤 역사의 굴절이나 격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다. 매우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화일 뿐이다. 포키온과 관련된 인간사의 갈등을 이렇듯 작은 점경으로 축소하고, 큰 침묵으로 광대하고 유구한 자연을 표현한 푸생.
 
이 작품은 그가 포키온 사건으로부터 2000년 가량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시간의 거리'와 인간사야 어떻게 출렁이든 우주와 자연의 질서는 영원히 정연하다는 이성론자로서 그의 확신이 갖는 '인식의 거리'가 녹아든 결과이다. 그 거리는 사색의 공간을 제공했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깊이가 확연히 드러나도록 했다. 푸생에게 '철학자 화가'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처럼 '거리'를 표현할 줄 아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Nicolas Poussin, Landscape with the Gathering of the Ashes of Phocion

by his Widow, 1648, Oil on canvas, 116 x 176 cm,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Landscape with the Gathering of the Ashes of Phocion (detail)>
 
역시 포키온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포키온의 재가 있는 풍경>도 앞의 그림과 같은 깊이의 문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포키온의 시신이 메카라로 추방되었을 때 그의 주검은 매장되지 못하고 화장돼 버려졌다. 영혼마저 안식을 얻지 못하고 공중에 떠돌게 하려는 조처였다.
 
그는 누구도 손대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용감한 그의 부인이 그 재를 몰래 거두었다. 그림 앞쪽에 몸을 수그린 여인 바로 그녀이다. 남편의 의로움을 알고 그를 사랑하기에 그녀는 지금 어떤 형벌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여인이 그녀 곁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들 돕고 있으나 그 외의 풍경은 전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 풍경 역시 당사자의 분노나 공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평온하고 무심한 풍경일 뿐이다. 이러한 '거시적 시선'과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질서정연함을 추구하고 소중히 여긴다. 혼돈은 싫다.
어두운 그림자가 날빛에 대해 그런 것처럼,
혼돈은 나와 대립하는 것이고 나를 위협하는 것일 뿐이다."
 
역사의 크고 작은 그림자들은 언젠가는 진리의 햇빛과 막닥뜨리게 마련이다. 미시적인 접근은 혼돈과 격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거시적인 접근은 냉철한 이성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세계를 전체로서 통찰할 수 있다. 이성과 규범의 승리를 믿었던 푸생은 이 신앙으로 자신의 회화를 위대한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이주헌의 <신화, 그림으로 읽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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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sky 2004-09-22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푸생 참 좋아하는데.. ^^ 그림들을 모두 커어다란 원화로 보고 싶은 소원이 있답니다.

에레혼 2004-09-2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생을 좋아하시는군요, 스타리님
저는 푸생을 '글'로 처음 만났어요... 그림을 보기 전에 문자로 묘사된 그의 그림 세계가 참 궁금했었지요.
저에게 푸생을 만나게 해 준 그 소설, 필립 솔레르스의 <푸생을 읽다>를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지금 정리중이에요. 그거 올리고 나면 또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