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어빈 D. 얄롬 지음, 최윤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과 관계 맺기가 어렵다.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도 늘 혼자라고 느낀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문제는 있지만 해답은 없을지 모른다고 회의한다. 완전한 소멸을 두려워하면서도 종종 죽음에 이끌린다..... 이런 증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심리 분석이라든가 정신과 상담 같은 데 호기심과 관심이 있을 터이고, 그 관심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자기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와 사는 동안 잘 살고 싶다는 본능에 닿아 있을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 교수인 정신과 의사 Irvin D. Yalom이 자신의 치료 사례 열 가지를 묶어 낸 사례집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는 그런 욕구를 가진 사람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되는 동시에 진지한 성찰의 계기가 돼 주리라 믿는다. 
Yalom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들은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실존적 삶에서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겪는 실존적 문제들이란 이런 것들이다.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죽는다는 사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대로 우리 삶을 만들어야 할 자유, 궁극적으로는 혼자라는 것, 그리고 분명한 삶의 의미나 의식이 빠져 있다는 것. 우리 모두는 이 문제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Yalom 박사를 찾아와 상담했던 이들의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문제 중 어떤 부분은 놀랍게도 나의 그것과 비슷하게 닮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 사랑의 처형자 / "8년 전 나는 치료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이후로 내 마음에서 그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밖은 너무나 춥고 내 안은 텅 비어 있어요. 나는 한 번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뻔하다 살아났지만, 다음 번에는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 뚱뚱한 여인 / "무시무시하게 몇 달이 흘렀다. 그녀는 모든 걸 미워했다. 삶은 고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액체 다이어트 음식, 자전거 운동 기구, 기아의 고통, 사악한 TV 맥도날드 광고 그리고 냄새, 도처에 깔려 있는 냄새들... 극장의 팝콘 냄새, 볼링장에서 나는 피자 냄새, 상가를 지날 때 나는 빵 냄새......"

- 잃은 아이, 남은 아이 / "나는 세 아이를 가졌어요. 하나는 천사이고 나머지 둘은, 걔들을 봐요. 하나는 감옥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약물 중독에. 나는 세 아이가 있는데 죽어서는 안 될 엉뚱한 애가 죽었어요."

- 뜯지 않은 세 통의 편지 / "나는 편지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가서, 쓸데없는 우편물이 쌓여 있는 데로 던져 버렸어요. 아직 뜯어보지 않았습니다. 왜 열지요? 거기 뭐가 있는지 난 벌써 알고 있는데. 정확한 문구는 내 상처를 더욱 갈갈이 찢어놓을 뿐인걸요."

- 측은해지려고 태어나다 / "내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희망은 정신 병원에 있는 것이에요. 난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어요. 아이를 갖지도 않을 거예요. 난 친구를 만들 능력도 없지요. 내 생일이라고 전화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나의 어머니는 남을 괴롭히는, 미친 여성인데, 나는 매일 그녀와 비슷하게 되어 있어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상처를 갖고 있지만, 또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자리에 서있다. 너무나 많은 소망. 너무나 많은 갈망들.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그 소망들이 자기 삶을 압도하여 지배하는 상태.
나 또한 그런 시간들, 그런 경험들이 있었다.
이미 나를 떠나가 버렸거나 애초부터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대상에 집착하던 때, 사랑이란 낭만적 환상으로 숨어들어 현실을 직면하기를 회피하려 한 때, 나를 형성한 성장 배경 중 어떤 부분을 결코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친밀감을 맛보기 위해 나 자신을 속인 때, 또는 결국에는 다가올 헤어짐이나 공허가 두려워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꺼리는 것, 슬그머니 과거나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현재 이 순간을 회피하는 것......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 자기의 부모가 되거나 영원한 아이로 남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어느 쪽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물리적 나이와 육체적 나이듦과 상관없이 나 자신이 계속 성장하기를 바라고, 스스로 그 성장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공감을 나타내며 인용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말에 나 역시 밑줄을 긋는다. "책임이란, 각자가 자기 삶이라는 디자인에 '작가(be the author of)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삶을 책임지는 방법의 하나로, '검토하지 않은 채 사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한다.
그러나, 내가 더 큰 위안과 안도감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런 구절과 만났을 때였다. "인생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불안을 낳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안정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안의 파도 속에 잠기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자기 삶의 구조를 만든다는 것을 통찰하기란, 지독하게 어렵고, 두렵기까지 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서 조금의 연민도 없이 냉혹한 삶의 실존적 사실-- 죽음, 소외, 기댈 곳 없음, 무의미 등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거기엔 해결책도 없다. 몇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단호해지느냐(resolute)", "거기 빠지느냐(engaged)", 혹은 철학적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합리주의 정신을 포기하고 신비와 경외심을 가지고 신의 존재를 믿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 바로 내 인생의 길을 결정해 줄 것이다.

마지막 사례에서 내담자의 회한 어린 말에(그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에...) Yalom
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대답은 나에게 힘을 준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보는 등대의 불빛처럼.
"나는 삶에서 내가 한 것, 아니 그보다는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회한이 많아요."
"우리가 너무 열심히 과거를 들여다보면, 후회에 압도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입니다."

 

사족 몇 가지.

1. 이 책에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는 다소 직설적인 제목이 붙게 된 배경(저자의 말) /
"나는 사랑에 빠져 있는 내담자와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나 역시 매혹적이고 싶은 부러움 때문일 것이다. 또는 사랑과 심리 치료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치료자는 어둠과 싸워 불빛을 찾는 것인데, 낭만적인 사랑은 신비로워야 지속이 되고 그 사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기루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2. 곳곳에서 멋지고 재치 있는 비유와 사고를 만나는 묘미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크게 해준다.
가령 이런 대목들 /
"가장 나의 심리적인 관심을 끄는 분야는 대부분,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생겨났다. 철학자의 사고 체계는 항상 자기 자서전에서 나온다고 니체도 주장했듯이 이는 모든 치료자-- 사실상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이야기이다.
................
하지만, 니체가 많은 부분에서 훌륭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대인 관계에는 지침이 될 수가 없다. 그보다 더 고독하고, 더 소외된 남자가 있었던가?(밑줄!!)"

"우정이나 결혼이 실패하는 까닭은, 관계를 맺고 서로 돌보는 대신, 한 사람이 상대방을 소외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무엇엔가 빠지는 것(falling)'이 아니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주는(giving to)' 존재의 한 방식이며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행동이 아니라 크게 관계 맺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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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0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도당했어요. 이 책과 리뷰의 무게에...^^

에레혼 2004-10-11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그리 무겁지 않은데, 그걸 가볍게 실어 나르는 법을 미처 제가 익히지 못했어요
아직도 앞마당을 천 일쯤 쓸고, 물동이를 삼천 동이는 져 날라야 하려나 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0-1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 이 책 보지 않았지만 아마 라일락와인님 리뷰가 더 훌륭할 거란 생각이 들어요.
감동스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전 아직도 상대방을 소외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군요. 게다가 크게 관계 맺는 방법은커녕 오직 한 사람에게도 정성을 다해 향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에레혼 2004-10-1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언제 마음이 動하면 한번 읽어 보세요.웬만한 소설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질병은, 이지러짐은,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만큼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요. 저 역시 많은 관계들이 소외와 쓸쓸함을 피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기능하고있는 것 같아요. 이 나약함, 이 본능적인 의존, 제대로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닫혀 있음을 어떻게 졸업할 수 있을지....... 알라딘 서재에서도 관계의 여러 모습과 자세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요즘....
 
 전출처 : 딸기 > 진주귀고리를 한 것들

 놀랍다...

나의 서재에도 들어오는 분들이 있었다!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왜 나만 몰랐지?

 나는 홈피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리고 책에 대한 열정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서재 인테리어에 몰두하기는 쫌 뭣하고. 하지만 손님이 있으면 일단 접대를 해야하니, 써~비스를 해놓고 넘어가자.

(손님들한테 왜 반말이냐고? 반말이 아니라 혼잣말이었다)

 

얼마전에 해봤던 장난질-- 작금 유행을 탔던 진주귀고리에 대한... 스토킹...

천천히 진주귀고리 소녀를 구경해보자.

문제의 진주귀고리 소녀는 이렇게 생겼다.



근데 소설을 보면, 화가는 소녀한테, 안보이는 쪽 귀에도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걸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바로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시메트리의 미학!




영화에서는 바로 요런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나보다.
(아직 영화 못 봤음)



근데 저 사진은 아무래도 넘 잘 나왔다.
실제 그 소녀는 못생겼었다는 소문이 있다.
바로 이렇게...



그리고 요건 몰랐지?
girl with a pearl earing 이라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girl without a pearl earing 이라는 그림도 있다.



그리트를 돌려가며 보면, 이렇게 생겼다.



덤으로, 진주귀고리를 한 아니카 소렌스탐...



진주귀고리가 없어 포도귀고리를 한 여인



포도귀고리를 하려다가 늘어나버린 귀





귀고리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베르메르 그림의 새로운 면모를 보아주자.




그 다음은 입체 화면으로 재구성한, 베르메르 작업의 진실...




자, 우리는 진주귀고리 소녀의 여러 면모를 감상했다. 그럼 이제부터 실습에 들어가자꾸나.

<진주귀고리소녀 색칠공부>



참고로, 아래 그림은 내가 색칠공부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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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10-10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칼렛 요한슨이란 배우가 진주 귀고리 소녀 역을 맡았다는 이유 때문에 저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 배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의 그 야릇한 미소를 잊기 어려운데, 그녀가 또 다른 영화 <판타스틱 소녀 백서Ghost World>의 그 엽기 발랄 소녀의 친구로 등장했었던 걸 떠올리면... 정말 매력적인 변신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딸기님 방에서 '진주 귀고리 소녀'에 관한 재미있는 잡담을 하나 만나서 내 방으로 가져왔다.

로드무비 2004-10-10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그 친구였던 배운가요?
저 그 영화 무지 좋아합니다.

에레혼 2004-10-1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좋아할 만한 영화이지요[마치 로드무비님의 취향에 정통한 듯!^^]
전 디브이디 타이틀을 갖고 있어요
마지막 그 버스 정류장에서의 노인 씬은 정말 여운이 남는 엔딩이지요......

2004-10-10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1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님, 행복한 소식이네요!
전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ㅋㅋㅋ
기다리는 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여라~~!
시 한 줄이 거저 나오는군요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 나비가 못 되었구나

-- 바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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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0-0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장욱. 난 이 시인을 잘 모른다. 간혹 어쩌다 그의 시를 만날 때마다 첫마디에 그의 목소리임을 알아들을 수 있을 뿐. 그의 시를 읽고 나면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뒤의 느낌과 비슷하다.

 

투명인간

  

문득 스스로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온다. 세면. 식사. 여자의 전
보. 이곳은 아름답군요 언제 서울로 돌아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
는 그대의 소식을 두고 외출한다. 등뒤에서 나의 몫으로 주어진
시간을 폐쇄하는 문. 여기가 문밖인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사물들. 아무렇게나 아름다운 것들, 가령 담배꽁초. 보도블럭. 초로
의 여자가 나누어주는 <일수돈 씀니다>.

 

어쩌면 몇 편의 죽음만으로 한 시대를 설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
다. 종로 2가의 가로수. 종로 1가의 바람. 크로포트킨 공작이 무의
미한 세계를 견디지 못해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광화문의 바람. 가로수. 다시 바람. 정신분석은 지겹다. 십
수 년 전 바움테스트에서, 나는 고의로, 부러진 나무를 그렸다. 의
사는 치유할 방도를 강구하자고 말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僞藥
이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와 친한 것들은 스스로를 오래 묵인하여 죽어
가는 것들이다. 가령 무언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열해 있는 간판
들. 시월의 태양 아래 혼자 끓는 육체. 손차양 사이로 문득 햇살이
무심하다. 이순신 상 곁을 날아가는 지중해行 종이 비행기. 생각난
다,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불긋한 색종이라도 접어 유장
한 강물에 배 한 척 띄웠을는지. 그 배 지금쯤 멕시코 만 어디서
좌초했을는지.

 

교보빌딩 화장실 변기 위에 달린 자동 감지기. 내가 다가가면 붉
은 등을 켜는, 내 유일한 존재 증명. 그대가 서울에 없으니까 죽도
록 쓸쓸하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고 나는 전보를 치지 않는다. 거
리에 도열한 간판들은 고의로 부러진 나무들처럼 고요하다. 또 위
약이군, 중얼거릴 때 내 몸을 가볍게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지워가는 사물들과 더불어, 다만 어느 날, 투명한
지중해의 햇빛 속을, 산보라도 할 것.

  

 


 

 

 

 

 

 

 

 

 

 

 

 

 

 

 

 

 

 

 

 

개인적인 불행


내 몸은 낯선 구름 위에. 네가 다른 시간의 너인 듯 나를 지나간
후 자꾸 뒤돌아보는 버릇이 생겼어. 가을 단풍이 추락하고 난 새
벽의 횡단보도, 바로 그 자리를 시속 120킬로로 통과한 왜건에 의
해 한 사내, 문득 정지 포즈로 허공에 떠 있었지.

 

그건 내가 우연히 밤하늘을 바라볼 때 이백오십만 년의 어둠을 지
나와 내 눈에 꽂혀버리는 별빛 같은 것. 누군가 나를 불러 뒤돌아
보면, 누군가 그의 기나긴 내력을 찬찬히 얘기해 줄 것 같아. 허공
에 떠 있는 사내는 아직도 어제 본 동물도감의 짐승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새벽과 또 머나먼 가을 사이에 떠 있던 그 사내, 나는 오늘도 저
오래 전의 별빛과 온전히 무관하네. 그 빛이 우연히 나를 통과하고
간 후 나는 잠시 뒤돌아보았을 뿐. 그러므로 모든 것은 개인적인
불행, 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보면 그곳은 텅 비어 떠 있기 좋은 허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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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10-0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또 크로포트킨인가요? 이 양반 이름이 맘에 들어서 차용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무슨무슨 이즘 따위와는 별 상관없는 인간인 터라 kropotkin에 r을 붙여서 kroportkin으로 거듭(?)났더랬지요. 그러고보니 시와는 상관없는 뻘소리만(원래 이게 제 주특기랍니다).
그거 아세요? 최근 라일락님 방에서 덧글 최고로 많이 남기는 거.

에레혼 2004-10-09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장욱의 시에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명한 현실의 배경에 기묘한 추상화가 덧칠돼 있는 듯한..... 그러므로 당신이 느끼는, 지금 막 떠오르는 그 말을 하면 돼요, 나는 크로포트킨이 누구인지 몰라요, 전함 포테킨이 떠올라요, 마녀물고기의 이미지는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를 연상시켜요......

여기에 덧글을 자주 남기는 건, 그 동안 그대가 너무 오래 침묵했기 때문.....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hanicare 2004-10-0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참. 내가 쓴 것이란 영화제목이 떠오르더군요. 거울을 비춰보는 느낌.

에레혼 2004-10-0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영화, 참 인상적이었지요. 기록된 것과 진실 사이의 거리..... 전 또 이 시들 앞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떠올렸더랬는데, 하니님은 <내가 쓴 것>을 끄집어 내셨군요. 어떤 대목에서 거울에 님의 모습이 비치던가요?
 

 

* 내가 사는 이 도시는 이즈음 축제 중이다. 며칠 전 저녁에 강변에 펼쳐진 유등 축제를 구경하러 가는 길에 동춘 서커스단을 만났다. 서커스. 서커스...... 그때 나를 관통해 가던 단상들...... 오늘 내내 '서커스'가, 삶의 '마술 같은 순간들' 이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강변은 어느새 희미하고 뿌연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노랑, 빨강, 파란 색 줄이 굵은 소나기줄기처럼 번갈아 내리쳐져 있는 높은 천막 옆을 지나쳐 갈 때, 무슨 짐승의 것인지 모를 오줌 냄새가 지독한 열기처럼 훅 달려든다. 천막 옆 간이 테이블에 누군가가 나와 앉아 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반짝거리는 체조복에 하얀 타이즈를 갖춰 입은 소녀와 소년이라기에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내. 나는 별 도리 없이 그들을 흘끔거린다. 나와 다른 종족의 풍모, 냄새, 분위기가 그들에게 있다. 나는 기껏해야 막후(幕後)의 사정이나 궁금해하며 정작 무대 앞에서는 쉽게 감동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구경꾼일 뿐이다. 쭉 그래 왔고, 아마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찌 하여 무대 위에서, 아니 흙바닥 위나 공중에서 자기 몸의 기량을 하나의 작품으로 내보이는, 매 순간에 절정과 위기 사이를 오락 가락하는 팽팽한 긴장과 우수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추락과 비상이 한 줄에 놓여 있는. 정말 날마다 식초를 한 병씩 마시는 거래..... 어릴 적 반신반의했으면서도 또 누구나 알고 있는 보편적인 원리인 양 깊게 각인돼 버린 그 유연함의 비법(秘法). 그 비법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그들의 특별한 삶의 내력도 실상은 크게 남다를 것 없이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열린 물길을 따라 흘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춘 서커스. 중국 하북성의 곡예단과 협연. 프로그램 완전 교체했습니다. 재미없으면, 웃지 못하면 입장료 반환해 드립니다.
확성기에서는 녹음된 '손님 모으는 소리'가 몇 분 단위로 되풀이해 외쳐지고 있었다.
재미없으면...... 웃지 못하면....... 나는 그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입안에서 몇 번 굴려 본다. 재미없으면...... 웃지 못하면........ 한수산의 <부초>를 떠올렸던 게 이때였는지, 조금 전 그들을 봤을 때였는지 잘 모르겠다. 인생이 재미와 웃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에, 우리에게 서커스라는 또 다른 페이소스가 필요했던 걸까. 존재와 기억과 꿈을 마술처럼, 공중 곡예처럼 한 순간에 새기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은 천막 옆에 질러놓은 횃대의 원숭이들과 노니작거린다. 원숭이들은 아직 그런 건드림에 완전히 심드렁해지지는 않았는지, 악의 없는 아이들에게 가끔 사나운 심경을 날쌔게 드러내 보이곤 한다.
그러는 사이 한 회 공연이 끝났는지, 천막을 걷고 사람들이 줄지어 나온다. 그들의 얼굴에는 채 가시지 않은 웃음기와 발그레한 열기가 하품 뒤 눈물처럼 흐릿하게 매달려 있다. 서커스에 잠시 홀딱 빠져서 바닥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인생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들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에서 그들은 알게 된다. 자신들이 오늘 낸 입장료는, 매몰된 나날의 모호한 매혹을 환기시켜 주는 데 지불된 것임을.
서커스를 본 그들인지, 서커스단의 천막 주위만 빙빙 돈 나인지, 누구인가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다. 오늘밤은 잘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Cirque du Soleil - Vare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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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10-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동춘 서커스를 보고 싶었어요. 저 나이브한 천막 속에 앉아 있으면
막 길을 나선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에레혼 2004-10-09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그런 느낌일 것 같지요.... 저도 한번쯤 그 천막 안에 들어가 볼까 잠시 마음이 흔들리더군요. 그 마음의 動因은 무엇일까요. 향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그리움, 색다른 군것질거리, 아니면 '유랑의 삶'에의 희미한 이끌림......

선인장 2004-10-09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오래 전에 저 천막을 본 기억이 있는데, 기웃거리기만 하고 들어가보진 못했지요. 저도 한번쯤 저 천막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요.

에레혼 2004-10-0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다들 비슷한 인종인가봐요..... 천막 안에 들어가 직접 만나기보다는 천막 주위만 빙빙 돌며 혼자 생각에 잠기는...... 빛도, 빚도 못 되는 생각 따윈 접어두고 일단 지르고 보는 거야!하고 천막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날이 언젠가 오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