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사는 이 도시는 이즈음 축제 중이다. 며칠 전 저녁에 강변에 펼쳐진 유등 축제를 구경하러 가는 길에 동춘 서커스단을 만났다. 서커스. 서커스...... 그때 나를 관통해 가던 단상들...... 오늘 내내 '서커스'가, 삶의 '마술 같은 순간들' 이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강변은 어느새 희미하고 뿌연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노랑, 빨강, 파란 색 줄이 굵은 소나기줄기처럼 번갈아 내리쳐져 있는 높은 천막 옆을 지나쳐 갈 때, 무슨 짐승의 것인지 모를 오줌 냄새가 지독한 열기처럼 훅 달려든다. 천막 옆 간이 테이블에 누군가가 나와 앉아 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반짝거리는 체조복에 하얀 타이즈를 갖춰 입은 소녀와 소년이라기에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내. 나는 별 도리 없이 그들을 흘끔거린다. 나와 다른 종족의 풍모, 냄새, 분위기가 그들에게 있다. 나는 기껏해야 막후(幕後)의 사정이나 궁금해하며 정작 무대 앞에서는 쉽게 감동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구경꾼일 뿐이다. 쭉 그래 왔고, 아마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찌 하여 무대 위에서, 아니 흙바닥 위나 공중에서 자기 몸의 기량을 하나의 작품으로 내보이는, 매 순간에 절정과 위기 사이를 오락 가락하는 팽팽한 긴장과 우수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추락과 비상이 한 줄에 놓여 있는. 정말 날마다 식초를 한 병씩 마시는 거래..... 어릴 적 반신반의했으면서도 또 누구나 알고 있는 보편적인 원리인 양 깊게 각인돼 버린 그 유연함의 비법(秘法). 그 비법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그들의 특별한 삶의 내력도 실상은 크게 남다를 것 없이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열린 물길을 따라 흘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춘 서커스. 중국 하북성의 곡예단과 협연. 프로그램 완전 교체했습니다. 재미없으면, 웃지 못하면 입장료 반환해 드립니다.
확성기에서는 녹음된 '손님 모으는 소리'가 몇 분 단위로 되풀이해 외쳐지고 있었다.
재미없으면...... 웃지 못하면....... 나는 그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입안에서 몇 번 굴려 본다. 재미없으면...... 웃지 못하면........ 한수산의 <부초>를 떠올렸던 게 이때였는지, 조금 전 그들을 봤을 때였는지 잘 모르겠다. 인생이 재미와 웃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에, 우리에게 서커스라는 또 다른 페이소스가 필요했던 걸까. 존재와 기억과 꿈을 마술처럼, 공중 곡예처럼 한 순간에 새기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은 천막 옆에 질러놓은 횃대의 원숭이들과 노니작거린다. 원숭이들은 아직 그런 건드림에 완전히 심드렁해지지는 않았는지, 악의 없는 아이들에게 가끔 사나운 심경을 날쌔게 드러내 보이곤 한다.
그러는 사이 한 회 공연이 끝났는지, 천막을 걷고 사람들이 줄지어 나온다. 그들의 얼굴에는 채 가시지 않은 웃음기와 발그레한 열기가 하품 뒤 눈물처럼 흐릿하게 매달려 있다. 서커스에 잠시 홀딱 빠져서 바닥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인생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들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에서 그들은 알게 된다. 자신들이 오늘 낸 입장료는, 매몰된 나날의 모호한 매혹을 환기시켜 주는 데 지불된 것임을.
서커스를 본 그들인지, 서커스단의 천막 주위만 빙빙 돈 나인지, 누구인가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다. 오늘밤은 잘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Cirque du Soleil - Vare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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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10-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동춘 서커스를 보고 싶었어요. 저 나이브한 천막 속에 앉아 있으면
막 길을 나선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에레혼 2004-10-09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그런 느낌일 것 같지요.... 저도 한번쯤 그 천막 안에 들어가 볼까 잠시 마음이 흔들리더군요. 그 마음의 動因은 무엇일까요. 향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그리움, 색다른 군것질거리, 아니면 '유랑의 삶'에의 희미한 이끌림......

선인장 2004-10-09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오래 전에 저 천막을 본 기억이 있는데, 기웃거리기만 하고 들어가보진 못했지요. 저도 한번쯤 저 천막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요.

에레혼 2004-10-0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다들 비슷한 인종인가봐요..... 천막 안에 들어가 직접 만나기보다는 천막 주위만 빙빙 돌며 혼자 생각에 잠기는...... 빛도, 빚도 못 되는 생각 따윈 접어두고 일단 지르고 보는 거야!하고 천막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날이 언젠가 오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