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부릴 실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바쳐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 밖에 몰랐고
 깨끗한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가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무디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때문에 결심했다 될수록이면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루오 할아버지같이 그렇게


 


 

 

 

 

 

 

 

 

 

 

 

 

 

 

 

Anna Gaskell, untitled wonder, 1996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유 형 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머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 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서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토끼의 집 위로는 먼 산이 흐릿했고 토끼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 십 년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 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唾具)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마즘재 너머 큰집의 건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오가 있는 방이었다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그 방에서 나는 양희은의 「작은 연못」과 들국화의 「행진」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한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 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신이현의 소설

 

 

Jane Birkin-Yesterday Yes A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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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거미줄처럼 걸려 있는 집의 기호에 대해서 

조 말 선

 

건축가가 되자 그녀는 우선 집에 갇힌 그녀부터 구하기로 했다. 현관을 부수었다. 문을 두드리던 손님들이 양떼처럼 쏟아졌다 창문을 깨버렸다 과묵한 가구들이 쨍그랑쨍그랑 재잘거렸다 지붕 위에서는 한 장 한 장 기왓장이 내던져졌다 아직도 그녀가 집에 갇혀 있잖아! 언제나 친절하던 벽이 그녀를 떠받쳐 주었다 벽에 기대어 그녀는 곰곰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꼼짝을 못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녀는 생각을 허물까 벽을 허물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친절한 벽을 오래오래 업어주고 싶었다 창조적인 생각으로 팔딱거리는 그녀의 유방이 점점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생각이 흰젖처럼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벽으로 된 집을 허공에 걸었다 기호만 남은 벽이 허공으로 실내장식을 했다 드디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건축가였다

 

 


 

 

 

 

 

 

 

 

 

 

 

 

Garry Moore - Empty Ro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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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3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벽한 앙상블입니다.
님은 잡지를 하나 창간하셔도 될 듯.
게리 무어도 오랜만이고 몽환적인 그림도 좋아요.^^

에레혼 2004-10-3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칭찬과 추천, 둘 다 고마워요!
요즘 님의 이미지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속에 따뜻한 웃음 한 조각 빼물게 됩니다^^
 

 

 

 

 

 

 

 

 

 

 

 


1. 세상에는 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이런 상투적인 이분법이 세상의 모든 감독이나 작가들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한다면.......[그런 의미에서 나는 거칠게나마 이런 인물의 댓구를 떠올려 본다. 김기덕은 우리 영화계의 장정일 또는 배수아이다! 그 독특한 문체와 감성을 좋아하고 옹호하는 매니아 그룹과 그를 '기본기'가 안 되어 있는 미성숙한 작가로 생각하는 비판적 수요자층으로 뚜렷이 양분된다는 점에서].
김기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화의 독특하고 강렬한 이미지와 대사 없이 영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법과 사회적 루저(loser)를 다루는 그의 고집스런 시선에 매료되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흔히 폭력성과 엽기성과 여성 비하적 시선을 지적한다.
 
나는 이제까지 김기덕 영화를 단 세 편 봤다. 초기작 <악어>, 한참 건너뛰어 <나쁜 남자>, 그리고 최근작 <빈 집>. <빈 집>은 김기덕의 열 한 번째 영화라고 한다. 열 한 편의 필모그래피를 가진 감독의 작품 중 단 세 편만을 띄엄띄엄 본 입장에서 이렇다 저렇다 단언하기는 좀 걸리지만, 김기덕에 대한 입장을 말한다면 아마 나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내가 가진 불만이랄까, 아쉬움은 김기덕은 남자의 심리를 아주 독특하고 예리하게 포착해 '자기 식의 붓질로' 그려내는 데 재능이 있는 데 반해[그가 그려낸 남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아우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여자를' 너무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을' 잘 모른다고 얘기해도 좋을까. 기본적으로 그의 영화는 사실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데, 내용 면에서 판타지에 가깝다. 헌데, 그 판타지는 언제나 남성의 입장에서 꿈꾸어지는 판타지이다. 남자의 욕망, 남자의 상처, 남자의 슬픔, 남자의 결핍이 만들어 내는 판타지. 그 남자조차 현실 속의 살아 있는 인물인지는 아리송하지만. 한쪽으로 기우뚱한 남자가 품는 판타지 속에 그려지는 여자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정적이고, 수동적이고, 관용적이다. 나약하고 그림 속 인물처럼 몽롱하게 아름다운 그녀들은 자기 밖에서 불현듯 날라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는다. 맞으면서 그 상처를, 그 멍을 자기 안으로 체화시킨다. 한없이 참고 말없이 응시하면서 구원을 기다린다. 자아가 없는 건지, 자아를 초월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여자들이 바라는 구원은 절대로 자기 안에서, 또는 자기 힘으로 찾을 수 없다. 그녀들을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종주먹을 들이대듯 불쑥 그녀의 세계에 침입한 '나쁜 남자'들이다.


 

 

 

 

 

 

 

 

 

 

2. <빈 집> 역시 김기덕 영화의 기본 문법에서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사람들이 비워 놓고 떠난 '빈 집'에 들어가 짧은 정주(定住)를 누린다. 그는 주인 없는 빈 집을 편안하게 맛보고 매만지고 음미한다. 그는 집주인들이 어질러놓은 집을 청소하고, 그들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속옷들을 정성스레 손빨래하고, 고장난 물건들을 깨끗이 고쳐 놓는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사진 앞에서 자신이 그 시간 그 '빈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증명 사진을 찍는다.
여자는 감옥 같은 자기 집을 떠나기를 간절히 꿈꾸지만, 자기 혼자 힘으로는 그 집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빈 집인 줄 알고 여자의 집에 들어온 남자를 여자는 물끄러미, 말없이 지켜본다. 남자가 제 몸 씻는 것을, 손빨래하는 것을, 샤워하고 나와서 몸무게를 달아 보는 것을, 고장난 체중계를 고치는 것을, 남자가 남편의 골프채로 스윙 연습하는 것을.......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따라 나선다. 집밖으로. 제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었던 닫힌 집의 안에서 '마음대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거리의 집들로.

남자는 감옥에서 끝없이 가벼워져서 자신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수련을 한다. 남자는 새가 되고, 그림자가 되고, 스스로의 시선 속에 숨는 비존재가 된다. 마침내 '보이지 않는',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존재....... 남자가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승화시킬 때까지 여자는 다시 예전의 자기 집에서 기다린다. 기약 없는 벗어남을. 하염없는 사랑을. 그러나 머지않아 구원될 그 날을 단단하게 믿으며. 남자는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다.......  

<빈 집>은 대사가 지워진 영화이다. 화면이 페이드 아웃될 때까지 남자의 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는 이 영화에서 여자는 딱 세 번 입을 열어 말하는데, 그 대사의 순서와 의미가 자못 상징적이다. 여자의 대사 : "아악!" -- "사랑해요, 여보" -- "식사하세요". 채 언어가 되지 못하는 비명 지름에서 출발해, 추상적이면서 이중적인 울림을 지닌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지나, 손에 잡히는 일상의 삶, 구체적인 자리에서의 발화로 이어지는. 갓 지은 밥 한 그릇 같은 일상의 시간 속으로 꿈처럼 들어온 여자와 남자는 같이 손을 맞잡고 체중계에 올라선다. 체중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 '0'......


3. 몇 가지 질문 또는 한숨으로 남은 것들.......

* 첫 번째 들어간 '빈 집'에서 남자가 고쳐 놓은 아이의 장난감 권총. 아이는 그 권총을 들고 장난으로 엄마에게 겨눈다. 처음엔 아빠를 향했다가 결국에는 엄마에게! 아마 그 아이의 엄마는 눈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왜 그녀는 눈을 잃어 버려야 했을까. '스위트 홈'의 신화가 깨지도록 '불화'를 일으키는 건 남편과 아내, 두사람 각각 절반씩의 책임이 있는데...... 어째서 남자는 고장난 총을 바로 고쳐 놓고, 그 총에 아이의 엄마는 세상을 보는 눈을 잃어야 했을까.
한편 남자는 감옥에서 자신의 손바닥에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을 그려넣는다. 그리고는 그 눈 뒤에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연습을 한다. 남자는 오랜 수련 끝에 자신은 명징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존재는 그림자가 되어 다른 이의 눈에서 사라지게 하는 경지에 마침내 다다른다.

* 거의 유일하게 대사를 많이 뱉어내는 역할인 여자의 남편은 어찌 그리도 질 낮은 상투성을 보이는지...... 그 대사들은 그를 너무도 우스꽝스러워서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하기는 여자와 남자를 뺀 나머지 인물들의 리얼리티는 현저히, 코믹하게 낮은 수준을 보여준다. 빈 집의 주인들, 남자를 취조하는 형사들, 다시 여자가 찾아간 한옥집의 부부........ 김기덕은 주인공만[그것도 남자 주인공만!] 독특하고 강렬하게 잘 그려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작품'이 된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 걸까.  

* 남자 역을 맡은 '재희'라는 이 젊고 낯선 배우의 눈빛이 강렬하다. 감독에게는 저런 얼굴을, 저런 눈빛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동물적 감각이 있는 모양이다. <2046>이 장쯔이의 매력을 한껏 살려준 영화라면, <빈 집>은 배우 재희를 탄생시킨 영화일 것이다. 요즘 젊은[어린] 남자의 눈에서 저런 표정이, 저런 광선이 나오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

* 한때 파리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는 김기덕의 미적 감각은 흡인력 있는 영상을, 매혹적인 화면을 펼쳐 보여준다. 현실적인 배경 속에 도드라지는 초현실주의적 영상. 그 영상에 푹 잠겨 들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빈 집>을 볼만한 이유가 된다.
이 영화의 음악 선곡 역시 왕가위의 감각을 뛰어넘는 '예술가적 취향'이 듬뿍 배어 있다. 매혹적인 김기덕표 그림과 그림 사이를 흐르며 스며드는 음악이 아주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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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10-30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느냐 안 좋아하느냐의 구분은 분명 이분법적이지만 실상 그렇게 선연히 구분되기도 하는 듯해요. 전 어쩌면 김기덕 감독은 여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합니다. 근거를 대라, 고 하신다면 뭐 웅얼웅얼 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사회에서 처진 자를 눈여겨보는 걸 보면, 또 그 처절하게 웅크린 사람의 모습만을 유독 골라내 그리 위로하지도 않는 듯한 그의 손길을 뻗치는 걸 보면, 그런 의구심이 자연 들더군요.
그래서 전 여자를 짐짓 모르는 척하는 감독, 이라고 자꾸만 생각이 되어서 나쁜남자도 사마리아도 안 봤어요. 이상하게도 이젠 영화에서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드는 터라 매번 그의 영화는 제게서 뒤로 처지더군요. 그래도 봄여름가을겨울은 썩 괜찮다고 추천해주신 서재지인이 계셔서 그건 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그의 영화를 느린 템포로 세심히 이야기해주신 라일락와인님의 글을 보니 김기덕 감독의 매혹적인 초현실주의적 영상이란 부분에 자꾸 눈이 걸리네요. 아마 님의 글 때문에 빈집은 보게 될 것 같아요. ^^

로드무비 2004-10-3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집'이라는 제목이 참 매력적이지요.
김기덕의 영화는 모두 극장에서 보다가 언젠가부터 보지 않게 되었네요.
그의 불량한 목자가 처음엔 매혹이더니 나중엔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곤경에 처한 이승연에게 제일 먼저 손을 내밀었던 김기덕 감독.
그것이 과연 그의 휴머니즘일까요? 그렇겠죠?
아무튼 전 그에 대한 흥미를 잃었어요.
라일락와인님의 리뷰는 전문가의 그것을 능가하는군요.
재희라는 배우의 눈빛이 보고 싶네요.하도 매력적으로 묘사해 놓으셔서......

에레혼 2004-10-3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김기덕은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 말고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님의 표현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어요. '여자'를, 자신이 체득한 것과 다른 지점의 세계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모른 척한다...... 그는 고집스럽게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같은 얘기를, 같은 메시지를 반복 심화시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작가가 평생을 걸고 탐색해 가는 일관된 주제 의식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상처와 슬픔을 치유해 가며 성장해 가는, 깊어지는 과정이 아니라면 또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작품으로서는 좀 소모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김기덕에게 비판적이든 애정을 갖고 있든 간에, 그의 작품은 그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와 얘기할 거리를 던져 주니, 이런 감독이 우리에게 있는 건 그 나름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요. 어쨌든 그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어요.
이 안님에게도 <빈 집>은 그저 후벼파기만 하는 거칠고 아픈 영화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보시기를.

로드무비님, 님도 저와 같은 대열에 서 계시는군요. 조금 다른 이유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빈 집>을 보고 나오면서 문득 <섬>이란 영화를 찾아 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더군요. 김기덕이 그리고 있는 '관계'[남자와 여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지형도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나와 코드가 잘 맞지 않지만, 분명 헛점과 결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선과 목소리에는 거친 진정성이랄까, 어떤 진한 울림이 담겨 있어요. 그건 한 사람의 작가로서 아무나 지닐 수 없는 큰 미덕이지요.
이미 그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님과는 달리 저는 뒤늦게, 애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묘한 매력과 이끌림이 생겼어요, 김기덕의 세계에 대해.

재희라는 배우는, 나중에 홍보물에 보니 <학교>라는 TV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신인만이 지닐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과 어딘지 겉도는 듯한 자기 몰두의 분위기가 매력적이었어요. 어쩌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젊음의 기운에 끌린 것일지도 모르고.......
 

 

<돕페르겐가 탐정국·조사보고>
의뢰주:라일락와인 씨 19**연 *월 *일 태생



 라일락와인 씨의 분신은, 현재, 시드니의 수족관에서 , 강치 쇼의 사회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마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가 , 정확히 1년 전 , 당신은 자고 있을 때에, 우연히 ,우에노의 사이고씨의 포즈를 취했습니다. 그것은 , 확실히 분신을 낳는 마법의 잠 자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결과 , 당신의 분신이 태어나 버렸습니다.

 당신의 분신은, 당분간의 사이 , 근처의 라면집에서 구운 돼지고기를 전문에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후, 「라일락와인」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장식 구슬 발의 수행을 위해서(때문에) ,뉴질랜드에 가 , 현지의 목욕탕에서 후지산의 다시 그림을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벌면서 ,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 그 후 ,부스럼에 걸렸던 것이 계기로 인생관이 바뀌어 , 반 년 전에 「피버라일락와인」에 개명해 , 현재는 시드니의 수족관에서 , 강치 쇼의 사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이의 쌀겨 담그고를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도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가까이의 집의 뜰에서 닭을 기르고 있으므로 , 그 니오이가 매우 수상해서 창을 열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분신은, 27년 후의 ,대형의 태풍이 지나가 버린 날의 밤 ,선전광고쟁이씨의 것인지 이렇게를 해 ,코끼리의 등를 타 , 당신에게 둘러싸 만나기 위해서(때문에) 옵니다.

 현재는 , 분신이 , 당신보다 , 7%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분신의 고기의 가격···100그램 당 850엔

 당신의 분신의 이성의 친구의 수···15인

 그녀(으)로부터 , 당신에게로의 메세지
「상가의 제비뽑기로 , 나의 두 명 앞에 줄지어 있던 사람이, 일등의 하와이 여행을 맞혀 버렸습니다. 나는 수세미 한 개였습니다. 분해서 밤에도 잘 수 없습니다. 」


 당신의 분신을 찾아내기까지, 178날 걸렸습니다. 다음 의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근거 레스개 점이기 때문에 ,
이상한 결과가 나와도 웃어 허락해 주세요
 
 
 
 

 
 
 
 
 
 
 
 
 
 
 
 
 
 
 
 
 
 
 
 
 
 
 
 
 
 
 
 
 
 
 
'오마루 점 랜드'라는 데를 우연히 알게 돼서 들어가 봤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넣으면 이른바 점괘가 나오는데, 그 결과가 희안한 '암호의 바다' 같은 문장이다. 아마 베이직 폼에 단어를 넣고 돌리는가 본데, 거기에 한글 맞춤법기까지 가관인 지경이다.
헌데 다시 한번 찬찬히 읽다 보니, 이 덜 떨어진 문장 속에 깊은 상징과 암시가 담겨 있는 듯한 묘미가 있더란 말이다.
 
 
부스럼이 걸렸던 것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다!
시드니의 수족관이라... 거기에서 강치 쇼의 사회를 보다!
어쨌든 현재 나의 분신이, 나보다 7%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게다가 그 분신의 이성(당연히 異性이겠지?) 친구가 열 다섯 명이나 되다니!
 
분해서 밤에도 잠을 잘 수 없는 지경 아닌가!
 
 
 
 
호기심과 궁금증이 있는 분은 여기를
 
 
http://j2k.naver.com/tbs/tbs.php/korean/omaru.cside.tv/pc/dopperu.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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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2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이거 재밌군요.
읽으면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제법 고민했다구요.
저도 링크하신 사이트 들어가 봤는데, 뭐라뭐라 떠들어서 그냥 나왔습니다.
아, 왜 이리 귀찮은 걸 싫어하는지...

로드무비 2004-10-2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라일락와인님이 아침부터 한잔하신 줄 알았어요.
저도 해봤는데요.
저의 분신은 알래스카에 가 현지의 라면집에서 돼지고기를 전문에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대요.
그리고 나보다 2프로 고생하고 11인의 이성친구가 있다고.^^

hanicare 2004-10-29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강치에 시드니(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시드니 그린스트리트) 이거 하루끼풍의 분신이쟎아요.거 참.분신도 되게 문학적이셔.(괜히 흥.)

에레혼 2004-10-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이거 올리고 샤워 한판 하고 왔더니, 그새 다들 점집에 다녀오셨군요?

블루님, 님은 확실히 쿨한 사람! 어제 문득 님의 모습을 혼자 머릿속으로 그려봤는데요, 이런 것도 귀찮아서 그냥 나와 버린다고 하는 걸 보면 그 그림과 일치하는 데가 분명 있단 말입니다......

로드무비님, 시드니보다 알래스카 쪽이 훨씬 구미에 맞는데요! 님은 분신마저도 요리 솜씨가 좋은 모양이네요[ㅎㅎㅎ, 하지만 그 대목은 저랑 같은 과정을 거치게 돼 있구만요...]

하니님, 제가 쫌 그렇습니다, 아무리 티를 안 내려 해도 어디에선가 꼭 냄새를 피우고 말지요, 그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도 제 몸에서 '우아와 감성의 내음'이 풍기는지 어쩐지... ㅋㅋㅋ

2004-10-29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4-10-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거요^^

조선인 2004-10-29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알라딘에 광풍을 일으킨 게 바로 라일락와인님이었군요.
지금은 열정의 라일락와인이라니 저에 비해 지나치게 멋집니다. ㅎㅎㅎ
그런데 여행 티켓에 당첨되었다면 저의 분신을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아쉬워요.
제분신은 하와이에서 만담중이거든요. ㅋㅋㅋ

내가없는 이 안 2004-10-30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이거 해봤어요. 저는 히로시마에서 잉어의 먹이를 제조하고 있다네요. 낯선 도시에서 제 분신이 어찌 그리 생소한 일을 한다지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저 '인 사발'을 선택했거든요. 그게 뭐죠? ^^
참, 이 그림 으스스합니다. 그림 설명 좀 해주세요. 알고 싶어요오~

에레혼 2004-10-3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님, 님의 취향에도 이게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님의 고민거리[거리의 음악가 때문에 밤잠을 설치다니.... 꽤나 낭만적인데요]나 분신의 행복 지수가 눈에 띕니다^^, 님의 분신뿐 아니라 지금, 여기 머물러 있는 님에 대해서도 저는 궁금해요. 조만간 님의 서재 구경도   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물만두님, 퍼가는 대신에 '퍼거'면 어떻게 되는 건지요^^;;

조선인님, 이 괴상망측한 점괘 덕분에 제 방까지 들러주셨군요.  근데 어제 알라딘에 광풍이 불었었나요? 저도 여행 티켓, 그게 참 놓친 물고기처럼 아쉽기는 했지요, 하와이라...... 우리의  분신들은 머나먼 곳에 서로 떨어져 나름대로 제삶을 꾸려가고 있으니, 우리는 여기 알라딘에서나 자주 만나 놀기로 하지요, 뭐.

이 안님, 잉어의 먹이가 특별히 '제조'해야 하는 걸까요? ㅎㅎㅎ 그리고, '인 사발'이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는데...... 좋아하는 메뉴 선택을 말씀하는 건지...... 저는 한번은 소고기덮밥을, 또한번은 카레밥을 선택했습니다만... 근데 님은 잘 모르면서 왜 그걸 고르셨는지^^

그림은 말이지요, 아 학생들은 꼭 선생이 그냥 넘어가고 싶어하는 것만 잘도 알고 콕콕 집어 질문하지요, 넷상에서 무단으로 퍼올린 것이어서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습니다, 다만 이 페이퍼의 분위기에 걸맞는 것 같아 걸어놓은 것뿐..... 내 그림창고에 저장할 때는 제멋대로 '복사 소녀들'이란 제목을 붙여 놓기는 했더랬지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불리하고 더 많이 고통받게 마련이다.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 Jancis Harvey
 
 
 

Lori Lieberman이 부르는 같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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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강렬합니다.
음악과 함께 퍼갈게요. 오랜만에 들어요.^^

2004-10-29 0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29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가 들은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감미로운 창법이었어요, 오랜만에 들으니 좋죠?

... 님, 그러신 줄(!) 알았어요, 그럴 때가 있지요, 마음과는 달리 몸이 빠릿빠릿하게 안 움직여 줄 때..... 외가가 이쪽이었다니, 유년 시절의 추억은 저보다 더 많이 갖고 계시겠네요, 님에게 특별한 곳이었다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