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끝없이 다시 돌아 내려가야 할 것 같은.

시월의 마지막 밤이 가고, 아직 입에도 설고 마음에도 선 11월의 첫날이 오고, 그 사이 알라딘 사이트는 개편을 하느라 아주 느린 동작으로 문을 열어줬다 안 열어줬다 한다. 꼭 해야 하는, 불가피한 변화가 아니라면 이제는 변하는 것들, 새로운 변화라는 것이 편치 않다. 굳이 의식하려 들지 않지만, 미미한 두려움도 거기 섞여 있음을 안다. 
어쨌든 내가 원치 않은 이런 변화가 없었다면, 나는 그 시간쯤이 되면 꼭 커피를 한잔 마셔 줘야 하는 것 마냥 어느새 몸에 붙은 습관으로 몇 개의 페이퍼를 설렁설렁 올려놓았을지 모른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또 다른 형태의 도망은 아니겠지.
지금, 잠시, 숨 멈추고 걸음을 쉬고 있는 자신을, 낯선 눈으로 바라본다.

물기 없이 축축한, 온기 없이 다정한 그 기운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바라보는 눈길에서, 아니면 그 눈에 비쳐지고 있는 타인 같은 자신에게서.

다시 가자. 저 한없는 미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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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03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라일락와인님. 문을 열어줄까 말까 약올리는 것처럼......
피를(?) 토하는('')(..) 듯한 리뷰나 페이퍼는 당분간 안 써야겠어요. 히히~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지러워요. 그냥 커피 마시며 얘기나 나누는 게 어때요?^^

물만두 2004-11-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워요... 저 공포증있다구요 ㅠ.ㅠ

2004-11-03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1-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 먹고 와서 코멘트 답니다. 라일락와인님이랑 맨 꼭대기에 같이 올라가서 우스갯소리 같이 해보고 싶어요. 아~ 어지러워, 이럼서요. ^^

에레혼 2004-11-0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냥 커피 마시며 하는 얘기, 실은 거기에 내공의 진수가 있을지도 몰라요^^ 물만두님, 문득 히치콕의 '현기증'이 떠오르네요, 추리소설 매니아인 님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니...... 귓속말의 오즈마님, 아아, 그 주소는 바로 저희 앞집 주소이군요, 내일 아침에 앞집에 가서 물어 봐야겠네요...... 프로포즈를 할 기회, 아주 멀어져 버린 건 아닌 듯! 이게 얼마만에 온 설렘인데, 그냥 놓쳐 버리겠어요? 그럴 순 없지요. 이 안님, 우리 꼭 한번 그래요,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서이든, 63빌딩의 꼭대기에 올라서이든...... 무거운 얘기 말고, 우스갯소리로요! 아, 어지러워, 이러면서..... 아니면 우리 번지점프라도 함 할까요?
 

 

몸무게를 달아보니

65킬로그램

먼지의 무게가 이만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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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1-0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먼지가 아니라 풍요의 무게겠지요^^

2004-11-02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1-0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글(!)과 사진이네요. 라일락와인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이젠 며칠 못 보면 퍽 오랫동안 적조한 것 같다니깐요. ^^

에레혼 2004-11-1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풍요의 무게가 아니라 풍만의 무게, 아닐까요^^

귓속말님, '라와'라는 약칭으로 불러주시니, 또다른 뉘앙스가 생긴 듯합니다. '나와 ...(me & ...)'라는 의미 또는 '나와(come out)'라는 의미..... 이렇게 갖다 붙이면서 잠시 말장난을 해봤답니다.

새벽별님, 공감의 표시이겠지요(특히 체중의 숫자!)?^^

이 안님, 그렇죠? 가만히 꼽아 보면 며칠 안 됐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그냥 흘러간 것 같이 느껴져요. 적조함... 이 '시간의 상대적이고 심리적인 측량'은 아마도 서재폐인의 한 증상이겠지요?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제 4권 <호수의 여인>(북하우스)이 출간되었다.

<하이 윈도> <빅 슬립> <안녕, 내 사랑>에 이은 네 번째 책......

나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도 쿨한 농담과 적절한 비유를 빼놓지 않는 필립 말로에 기꺼이 매료당한다.

실제로 그와 같은 사람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그 오만함과 냉소적 태도에 밥맛 없어할지 모르겠지만, 챈들러가 그려낸 필립 말로는 '스타일리스트'이고 '쿨 가이'이다!

[챈들러의 독특하고 뛰어난 묘사에 대해서는 5월 29일 '독서일기' 에 적은 바 있다.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525710]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

챈들러의 에세이 <간단한 살인 기술>에 나오는 이 문구는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은 이 구절에서 따와 <비열한 거리>를 자신의 영화 제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은 웹에서 이런 글을 찾았다.

이 글은 하루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에 대한 오마쥬로 쓴 글이라고 한다.

 

 

 

 

 

사우스베이 스트리트「サウスベイストラット」

 

<캉가루 날씨 (カンガル-日和)>(1983, 헤이본샤(平凡社)

 

무라카미 하루키

 

 

 

남캘리포니아의 대부분의 지역이 그러한 것처럼, 사우스베이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물론 전혀 내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비가 내린다는 현상이 어떤 반응을 수반하는 기본적 관념으로써 사람들 속에 깊이 스며들 만큼 내리지는 않는다. 즉 보스턴이나 피츠버그에서 온 누군가가 "정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지긋지긋하군" 하고 말했다고 해도, 사우스베이 사람들이 그 뉘앙스를 이해하는 데는, 남들보다 반 호흡 정도 시간이 더 걸린다는 말이다.

남캘리포니아라고 해도, 사우스베이에는 서프 포인트도 없고, 핫 로드 코스나 영화 배우의 저택도 없다. 단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뿐이다.

이 도시에는 레인코트보다는 불량배가 훨씬 많고, 우산보다는 주사기의 수가 더 많다.

만의 입고 부근에서 근근히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 새우잡이 어부가 가슴에 45구경 총알 세 발을 맞은 사체를 끌어올렸다고 해도, 그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니며, 롤스로이스를 탄 흑인이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해도, 게다가 그가 은빛의 시가렛 케이스로 젊은 백인 여자를 후려치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다지 보기 드문 풍경이 아니다.

요컨대 사우스베이는, 젊은이들이 영원히 젊고 그 눈동자는 바다 색과도 같은 블루라는, 그러한 타입의 남캘리포니아는 아닌 것이다. 우선 사우스베이의 바다는 푸르지 않다. 거기에는 중유가 떠 있고, 선원들이 내던진 담배꽁초 때문에 때아닌 바다의 불길을 구경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영원히 젊다고 할 만한 것은 죽은 젊은이들뿐이다.

물론 나는 관광을 하러 사우스베이를 찾아온 게 아니며, 모럴을 구하러 찾아온 것도 아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사우스베이 시티보다는 오클랜드의 시립 동물원으로 가는 편이 훨씬 낫다.

내가 사우스베이를 찾아온 것은, 한 젊은 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그 일을 의뢰한 사람은 로스엔젤레스의 교외에 살고 있는 중년의 변호사며, 내가 찾는 젊은 여자는 이전에 그의 비서였다. 그녀는 어느 날 몇 장의 서류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는데, 그 서류에는 매우 개인적인 한 통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흔히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1주일 후에, 그 편지의 복사본과 조심스러운 요구라고는 보기 어려운 액수의 돈을 요구하는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에는 사우스베이 시티의 소인이 찍혀 있다. 변호사는 그 정도의 돈이면 지불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5만 달러 정도의 돈 때문에 세계가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편지의 원본 자체가 되돌아왔다 하더라도 협박자에게는 아직 몇 다스의 복사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흔히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립 탐정이 고용된다. 하루에 120달러와 필요한 경비, 그리고 2000달러의 성공 보수가 주어지는 싼 일거리다.

남캘리포니아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여자의 사진을 손에 들고, 사우스베이 일대의 바와 클럽 등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이 도시에서 재빠르게 누군가를 찾아내고 싶으면,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프스테이크를 한 쪽 손에 들고 상어의 무리 속을 걸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반드시 누군가가 덤벼들게 마련이다.

그 반응은 기관총의 총알일지도 모르고, 도움이 되는 정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반응인 것은 분명하고, 내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사흘 동안 돌아다니면서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의 이름을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다음에, 방에 틀어박혀 캔 맥주를 모조리 비우고 45구경 권총을 소제하면서 그 반응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반드시 무엇인가가 찾아온다는 것을 직업적인 직감력으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틀이나 사흘 동안 방안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신경이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데서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세상 사람들을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주의 사립 탐정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기다렸다. 나는 서른 여섯 살이라 아직 죽기는 이르고, 그리고 적어도 사우스베이의 소변 냄새가 풍기는 골목 안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사우스베이에서는 사체보다는 손수레가 더 정중히 다루어진다. 일부러 그러한 거리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반응은 사흘째가 되는 날 오후에 나타났다. 나는 테이블 뒤에 45구경 권총을 껌 테이프로 부착하고, 소형 리볼버를 손에 들고 방문을 2인치쯤 열었다.

"양손을 방문에 대고 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일찍 죽고 싶지는 않다. 비록 싼 일거리긴 해도, 나는 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인간인 것이다.

"알았어요, 쏘지 말아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방문을 열어, 여자가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에 문을 잠갔다.

사진과 같은, 아니 사진 이상으로 멋진 여자였다. 근사한 금발과 로켓과도 같은 유방 --- 중년 남자가 열중해 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녀는 몸에 꼭 맞는 원피스 차림에, 구두 뒤축이 6인치나 되는 하이힐을 신고, 에나멜 핸드백을 손에 든 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버본밖에 없는데 마시겠어요?"

"마시겠어요."

나는 손수건으로 잔을 닦은 다음, 거기에 올드 크로우를 절반쯤 따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한 모금을 맛보고는 절반쯤 쭉 마셨다.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인가요?"

"그러면 좋겠지만 우선 편지 이야기를 합시다"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 편지 이야기요. 로맨틱하군요. 하지만 대체 무슨 편지에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당신이 훔쳐가고, 그것을 증거로 삼아 누군가를 협박한 편지말이오. 아직 생각나지 않나보죠?" "생각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편지 따위를 훔치지 않았는데요." "그럼 로스엔젤레스의 변호사 밑에서 비서로 일한 적도 없어요?" "물론이에요. 나는 다만 이리로 와서 당신과 좋은 일을 하면 100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검은 덩어리가 내 위의 입구로 치밀어 올라왔다. 나는 여자를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테이블 밑의 45구경 권총을 뜯어내고, 침대 밑에 엎드렸다. 이와 거의 동시에 기관총의 총알이 진 크루퍼의 드럼롤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문을 부수고, 잔을 깨고, 벽지를 찢어 버리고, 꽃병의 조각들을 방 안에 흩뜨리고, 매트리스를 솜사탕처럼 만들어버렸다. 톰프슨 기관총풍 세계의 재구축인 셈이다.

그러나 기관총이라는 것은, 그 요란스러움에 비해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기를 다지는 데는 적합하지만, 사람을 정확히 죽일 수 있는 무기는 아니다. 말이 많은 여자 컬럼니스트와도 같다. 요컨대 경제 효과의 문제다.

총알이 다 떨어져 철컥 소리가 나는 걸 확인한 다음에 나는 일어서서, 황홀하리만큼 재빠른 속도로 잇달아 네 번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은 반응이 있었지만, 나머지 두 발은 빗나갔다. 5할의 확률이면, 다저스 팀의 4번 타자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의 사립 탐정 노릇은 할 수 없다.

"썩 잘하는군" 하고 방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야 알겠군. 협박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편지 이야기도 거짓말이구. 제임슨 사건과 관련하여 내 입을 막고 싶었던 것뿐이지." "그렇소. 머리가 잘 도는군. 당신이 입을 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지지. 그래서 당신은 사우스베이의 싸구려 호텔에서 매춘부와 함께 죽어야 하는 거야. 틀림없이 좋지 않은 소문이 나겠지."

꽤 훌륭한 계획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대사가 너무 길었다. 나는 방문을 향해 45구경 권총의 나머지 세 발을 쏘아댔다. 한 발만 반응이 있었다. 3할 3푼 3리 ---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 누군가가 15달러짜리 화환쯤은 보내 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납의 샤워가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두 개의 총성이 진 크루퍼와 버디 리치의 드럼 배틀처럼 서로 겹쳐졌고, 10초 후에 모든 일이 끝났다. 일단 유사시에는 경찰의 행동이 빠르다. 유사시가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제 안 오는 줄 알았어" 하고 나는 외쳤다.

"물론 오지. 단지 조금 지껄이게 하고 싶었던 거야. 자네는 정말 훌륭하게 해냈네." 하고 오보니언 경위는 말했다.

"상대는 누군가?"

"사우스베이의 대수롭지 않은 불량배야. 누구의 부탁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내가 있는 힘껏 자백시켜 보겠네. 로스엔젤레스의 변호사도 붙잡을 거고. 기대해도 좋네." "꽤 열심이군 그래."

"사우스베이도 이제 산뜻해질 때가 되었으니까. 자네가 어떻게 증언하느냐에 따라 시장의 의자마저 흔들릴 거네. 자네 취향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매수당하지 않는 경찰도 있지."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의 사건이 함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네. 자네는?"

"나는 의뢰인을 의심하지 않네. 그 점이 경찰과 다른 점이지."

그는 히죽 웃으며 방을 나갔다. 경찰의 웃는 모습은 언제나 똑같다.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람만이 그런 식으로 웃는다. 그가 나간 뒤에는 나와 여자와 수백 발의 납으로 된 총알만이 남겨졌다.

사우스베이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사체보다는 손수레가 더 정중히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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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7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부릴 실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바쳐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 밖에 몰랐고
 깨끗한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가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무디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때문에 결심했다 될수록이면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루오 할아버지같이 그렇게


 


 

 

 

 

 

 

 

 

 

 

 

 

 

 

 

Anna Gaskell, untitled wonder, 1996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유 형 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머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 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서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토끼의 집 위로는 먼 산이 흐릿했고 토끼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 십 년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 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唾具)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마즘재 너머 큰집의 건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오가 있는 방이었다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그 방에서 나는 양희은의 「작은 연못」과 들국화의 「행진」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한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 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신이현의 소설

 

 

Jane Birkin-Yesterday Yes A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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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거미줄처럼 걸려 있는 집의 기호에 대해서 

조 말 선

 

건축가가 되자 그녀는 우선 집에 갇힌 그녀부터 구하기로 했다. 현관을 부수었다. 문을 두드리던 손님들이 양떼처럼 쏟아졌다 창문을 깨버렸다 과묵한 가구들이 쨍그랑쨍그랑 재잘거렸다 지붕 위에서는 한 장 한 장 기왓장이 내던져졌다 아직도 그녀가 집에 갇혀 있잖아! 언제나 친절하던 벽이 그녀를 떠받쳐 주었다 벽에 기대어 그녀는 곰곰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꼼짝을 못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녀는 생각을 허물까 벽을 허물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친절한 벽을 오래오래 업어주고 싶었다 창조적인 생각으로 팔딱거리는 그녀의 유방이 점점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생각이 흰젖처럼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벽으로 된 집을 허공에 걸었다 기호만 남은 벽이 허공으로 실내장식을 했다 드디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건축가였다

 

 


 

 

 

 

 

 

 

 

 

 

 

 

Garry Moore - Empty Ro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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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3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벽한 앙상블입니다.
님은 잡지를 하나 창간하셔도 될 듯.
게리 무어도 오랜만이고 몽환적인 그림도 좋아요.^^

에레혼 2004-10-3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칭찬과 추천, 둘 다 고마워요!
요즘 님의 이미지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속에 따뜻한 웃음 한 조각 빼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