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on in the Neighbourhood of Moscow by Ivan Shishkin

같이 걸을까요? 날도 이렇게 좋은데......

벨 소리가 울려 문을 여니, 문 앞에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서 있다. 자주색 츄리닝 차림에 조금은 파리한 낯빛. 말없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내 표정에 수줍음 반 망설임 반인 목소리로 "저, 앞집인데요" 한다.
의아함과 가벼운 경계심을 풀고 나도 멋적게 "아, 네......"하고 말을 받는다.
"산에 같이 안 가실래요?"
여자는 한번 입을 떼자 그때부터 갑자기 말문이 터진 명랑한 계집아이처럼 경쾌해진다.
"어제 남편이랑 같이 요 앞 산에 올라갔다 왔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코스도 다양하게 있어서 그 날 그 날 상태에 따라서 골라서 올라가면 될 것 같아요. 저, 지금 한번 가보려는데, 같이 안 가실래요?"
"아, 네......"
나는 그것 말고는 적당한 응대의 표현을 알지 못한다는 듯 또 그렇게 말을 받고는 잠시 궁리한다.
"저도 요 며칠 저녁때마다 동네 한 바퀴씩 돌다 오곤 했는데, 참 좋더군요. 근데 오늘, 내일은 좀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시간 맞춰서 같이 한번 가도록 해요."
"네, 그럼 그렇게 해요...... 집에만 있으면 너무 아깝잖아요. 날도 좋고, 가까이 산도 좋은데......."
여자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가볍고 발랄하게 목례를 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간다.
 
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조금 후에 나가 봐야 할 일이 있긴 했다.
허나 그럴 계획이 없었다 해도 선뜻 내가 여자의 제의를 받아들여 운동화를 꿰신고 나서게 됐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자의 제안 자체는 신선하고 유쾌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사와서 나누는 첫 인사가 접시에 담긴 떡 돌리기인 것에 비하면, 이 편이 훨씬 귀엽고 정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곧 이어 며칠 뒤 앞집 여자와 산행을 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뚜렷한 불안과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동안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하지. 나이, 취미, 남편의 직업, 또는 자신의 일, 지금까지 살아 온 대략의 이력, 요즘 관심 있어 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 이야기...... 아마 그런 얘기들을 하게 되겠지.
나는 이웃이라든가, 동년배 그룹이라든가, 학부모 모임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엮인 사람들과 그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직, 늘, 여전히 서툴고 어색하다. 무엇을 어느 선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어법으로 말해야 서로 부담 없이 편안한지, 그런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소통을 공유할 수 있는 건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공감하는 주제는 어떤 것인지....... 그런 것에 관한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한번 후루룩 훑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문제는 나 자신이 내 또래의 여자들이 갖고 있는[갖고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주제들에서 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는 것, 늘 현실 속에 두 발을 균형 있게 딛지 못하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부유하고 있다는 자의식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자의식쯤이야 내가 우려하는 것처럼 그리 기이하거나 특이한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 안의 소심함과 예민함은 앞지른 우려를 하게 만든다. 가끔 나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결혼을 하고 살림이란 걸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세웠던 생활의 원칙(?) 중에 하나는 아침마다 식구들 다 나가자마자 "커피 한잔 하러 와"하며 줄창 내 집 네 집 넘나들며 일상을 같이 나누는 '모닝 커피 친구' 즉, 동네 아줌마 친구는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가족처럼 지내는 이웃'이란, 생활의 편의를 공유하는[서로 돕고 사는] 친밀감과 정을 나눈다는 장점에 비례해, 무심한 간섭과 침해가 수시로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폭력'이 내재해 있는 관계인 것이다. 나는 내 일상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런 친밀한 관심과 무분별한 침해가 두렵고 끔찍했다. 수시로 드나들며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같이 시장을 보고 목욕을 가고 같이 TV를 보고 서로 반찬 접시를 들고 오가며 간간이 같이 놀러도 다녀야 하는 그런 관계의 지형학........ 또 다른 혈연 관계와도 같은 의무와 책임과 관습이 부과되는.......

'모닝 커피 친구'를 두지 않겠다는 나의 원칙이랄까, 그런 자기와의 약속은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를 '혼자 잘 노는 사람'으로 강화시켜 준 대신에 일상의 친구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나는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니며, 혼자 쇼핑을 하고, 혼자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간다. 혼자여서 간혹 심심하거나 외로울 때도 있지만, 대개는 편안하고 익숙하고 평온하다. 누구와 시간을 맞추거나 내키지 않는 상황에 마음을 맞춰야 할 일이 없으므로. 그리고, 혼자 있어서 느끼는 심심함이나 외로움은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서 느끼는 지루함과 피곤함보다는 더 심신에 유익하다고 자위한다.

나의 사정이 이러한 터라, 앞집 여자의 가볍고 유쾌한 산행 제안 뒤에 나의 마음은 사뭇 복잡하고 꼬인 행로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말마따나 "날도 좋고, 산도 좋으니까" 그 좋은 것을 같이 나눠 가지면 그야말로 '행복이 두 배'가 되는 것 아닌가.
어쩌면 며칠 뒤 나는 옆집 여자와 도란도란 무언가를 얘기하며 낮은 산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산길에는 그런 '관계의 시간'이 생각보다 제법 유쾌하고 가뿐했다는 느낌에 몸도, 마음도 발그레하게 상기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산책은, 내가 이끌리는 걷기는 바로 이런 모습, 이런 풍경이다. 혼자서 낯모르는 사람들 사이로 처음 온 거리를 걷듯이 낯선 눈으로 기웃거리며 천천히 거니는 것. 그리하여 내가 풍경 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가고,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점차 저무는 풍경처럼 내가 엷어지고 지워지면서 경계가 지워져 가는 것, 더 이상 나를 들여다보지 않게 되는 어떤 지점, 어떤 순간........

 

 Street in Venice by John Singer Sargent

혼자, 낯선 사람들 속을, 처음 온 거리인 듯, 그렇게 기웃거리며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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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04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우리는 각각 혼자 같이 걸읍시다.^^

2004-11-04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인장 2004-11-0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한 선배가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함께 오르는 지인과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고, 그저 서로의 생각에만 빠져 있었지요. 그러나 둘의 간격이 벌어지면 그저 한쪽에서 가만히 기다려만 주고. 옆에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친구,그저 옆에 있다는 것만 이따금 확인하면 그것으로 족한 친구. 전 혼자보다는 그런 이와 함께 걷고 싶어요.

urblue 2004-11-04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 속의 여자, 라일락와인님 같습니다.

2004-11-05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1-0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각각 혼자 같이.... 그런 현명한 방법이 있었는데 말이지요^^ 지금 우리처럼!



선인장님, 옆에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친구,그저 옆에 있다는 것만 이따금 확인하면 그것으로 족한 친구...... 그런 벗을 곁에 두고 있다면 참 잘 살아 온 삶이 아닐까 싶어요. 하기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벗이 돼 줄 수 있느냐 아니냐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듯..... 전 '관계'에서는 자신에게 늘 평균치 이하의 점수밖에 줄 수가 없어서..... 그런 친구를 바라는 것이 제게는 과욕이 아닌가 싶어요.



유아블루님, 느낌이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에레혼 2004-11-0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 하신 분이 두 분이라....... 차례대로, 그 님들은 알아보시겠지요?^^



...... 님, 저는 일찌기 알아봤는걸요. 님이 나와 同種의 사람이라는 걸...... 전 받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늘 불쑥 '침입'하듯 울려오는 전화도 '공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긴요한 용건이 있는 경우 말고는 전화로 그저 수다를 떠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지인들은 그런 절더러 가끔 손가락이 부러졌냐고도 한답니다. 실은 커피도 혼자 마시는 커피가 맛있고, 영화도 혼자 보는 영화가 맛있어요! 제대로 음미할 수 있지 않나요? 그 순간의 맛을, 그 순간의 그것과만 독대함으로써....... 이 아침에 님도 혼자 커피를, 저도 혼자 커피를 마시며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이도 나름대로 조용한 '소통의 시간'이지요!



...님, 언젠가부터 저에게 님은 '모닝 커피 친구'처럼 느껴져요. 좋은 의미에서요...... 이만큼의 거리와 친밀감이 서로에게 쾌적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적당히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구요^^ .

이웃집 '아줌마 친구'가 없으면 생활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있기는 해요, 그때그때 유용한 살림 정보를 귀동냥할 기회도, 물건을 싸게 '공동 구매'할 기회도 없고, 인근의 새로 생긴 맛집이나 찜질방 같은 데도 잘 모르게 되구요......

그래도 이젠 혼자 슬슬 걷는 방식이 몸에 익어서 누군가와 동행하는 산책이 좀 부담스럽고 난감하게 느껴지니, 어쩔 수 없지요.

님의 방에 마실 갈 생각에 마음이 설렙니다, 건강 해치지 말고 일 부지런히 마치시고 서재에 초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