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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임철우는 신간을 챙겨보는 몇 안되는 작가이다. 임철우를 왜 좋아하게 됐을까? 한 비평가가 그를 두고 '순한 마음'을 지닌 작가라 말했는데, 난 그 표현이 참 좋았다. 난 아직 순함과 착함을 사람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한다. 임철우를 아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내가 자란 곳을 집요한 문제 의식을 지니고 그려왔기 때문이다.
임철우가 1985년에 펴낸 소설집 <그리운 남쪽>에는 <사산(死産)하는 여름>이란 단편이 있다. 소설은 80년 광주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을 처음 대했을 때 낯이 간지러웠다. 소설의 공간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소설속엔 향민의원과 돌고개가 나온다. 실제 광주의 돌고개 근처엔 양민의원이 있었다. 내가 알기론 광주에서 돌고개란 고유명사-일반명사로서의 돌고개야 숱하겠지만-를 쓰는 곳은 내가 지냈던 곳이 유일하지 않은가 한다. 돌고개를 넘기 바로 전 양민의원이 있다.
오월 광주를 문학적 고향으로 삼은 임철우는 1998년 <봄날>을 완성하곤 갈 길을 못 찾는 듯 했다. 전에 냈던 자전적 소설(<등대 아래서 휘파람>, 1993, <등대>, 2002)을 손 보기도 하고, 현대사를 갈무리하는 소설(<백년여관>, 2004)을 내기도 했다. <묘약-황천읍 이야기3>(<문학동네>, 2008년 봄호)에선 형식적 실험도 감행하는데, 난 '잘 하고 있나?'하는 일종의 걱정을 했다.
<이별하는 골짜기>를 읽으며 그 동안의 걱정이 기우임을 알았다. 비평가 신형철의 말대로 '이 작가는 변하지 않는다.'('신형철의 문학사용법', <이별하는 골짜기> 서평) 임철우를 처음 알던 그 시절과 지금의 내가 같지 않아서일까? 난 아마 그에게 '이제 그만'이란 말을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선한 마음자리가 어디 가겠는가? 그것이 오월이든, 한국전쟁이든, 상처 입은 이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따스하다.
KTX 같은 자본과 시선의 맹렬한 속도 앞에 이젠 자신의 상처입은 몸과 마음을 말하기조차 겁이나고 미안해지는 시대에 임철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 아프게 듣고, 대신 말을 꺼낸다. <이별하는 골짜기> 속에 그려진 인물 누구 하나 미움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위안부 여인들로 돈을 벌던 악마 같은 조선인 출신 남정네들도 그들이 개처럼 처참히 죽어갔음을 목격할 땐 그들이 불쌍했다. 이별을 겪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삶과의 이별이 죽음일진대, 이별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을테다. 어떤 삶이든, 이별 앞에선 마음이 아파온다.
임철우를 처음 알던 시절의 나를 만나고파 <사산하는 여름>을 다시 꺼내본다. 소설은 오월 이후 사람들이 역한 악취를 맡고 있다고 말한다. “그(김씨)는 손바닥으로 둥지를 틀어 물을 받는다. 그리고는 코를 들이대고 흠흠 물냄새를 맡아본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비릿하고 역겨운 악취. 김씨는 가벼운 구토증을 느낀다.” 김씨는 거짓 냄새를 맡고 있다. 김씨 뿐만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나지도 않은 냄새를 진짜인양 맡고 있다.
그 냄새의 정체는 무얼까? 데리다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폭력의 시대를 가능케 했다고 말한다. 폭력은 이념을 위해 기능한다. 상습화된 폭력에 병든 이들은 이성의 정점에 광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깨닫는다. 감각적이다. 감각이 아니고선 깨닫지 못한다. 광서형의 절규이다. “내 손, 내 뼈, 내 옆구리, 내 어깨, 내 손톱, 내 콧구멍, 내 입, 내 혀 ․․․․․․ 하느님이 주신 내 유일한 확신인 나의 육신 ․․․․․․ 나는 물건이 아니에요.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이성이 육체를 지배했을 때 우리에게 돌아온 건 광기에 젖은 폭력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감각을 되살려야 한다. 감각으로 부딪쳐야 한다. 이 도시의 시민들이 나지 않는 냄새, 들리지 않는 소리(광서형, “소리. 목소리.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어.”)를 듣고 있다는 것은 감각적 차원에서 진실을 향한 이들의 힘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이별하는 골짜기>에서도 상처입은 이들의 이야기가 모아지고 있다. 종군위안부 할머니, 자살한 탈영병의 아들, 인생의 저주 앞에 고통하는 외로운 여인, 이들 역시 외친다. "나는 물건이 아니에요.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임철우(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