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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이 아니면 언제?(Se non ora quando?)>는 번역된 프리모 레비의 책 가운데 유일한 소설이다. 한 블로거와 얘기도 나눴지만 레비의 소설은 수기에 비할 때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그것은 소설이란 갈래 자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레비가 지닌 소설을 다루는 힘이 약한 탓이기도 할테다. 허구라는 장치를 만들어 말을 건네기엔 작가 안에 담긴 슬픔과 괴롬이 너무나 많고, 그에게 남겨진 시간도 짧다. 그의 소설 두어 편이 번역중에 있다니 만나 보면 생각이 좀 더 정리될 듯 하다.
소설엔 파시즘과 싸웠던 유대인 빨치산 부대가 나온다. 실제 레비는 이탈리아 빨치산 부대에서 활동한다. 소설의 내용은 레비의 경험과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빨치산 부대의 이야기를 섞어 놓은 것이다. 레비는 소설의 내용과는 달리 빨치산 활동 중 나치에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진다. 소설의 결말은 어찌됐든 무난히 맺어진다.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나 이탈리아로 향한다. 빨치산 활동 중 아이를 가진 부대원 이시도르와 로켈레인데, 아내는 무사히 아이를 낳는다. 끝부분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소식이 전해지며 비극적 색채가 더해지긴 한다.
레비의 책들을 읽어가며 그가 지녔던 인간관이 궁금해진다. 전장과 수용소는 인간의 적나라함을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대머리는 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 포로인데, 100여 명의 유대인을 창고에 몰아넣고 석유를 뿌려 불태워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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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포라이터를 다시 대머리에게 건넸다. 대머리가 혹시 자기 손에 석유가 묻어 불이 옮아붙을까봐 옷자락에 손을 몇 번씩이나 싹싹 문지르며 닦았다. '탕! 탕!' 이 때 갑자기 귀를 찢는 두 발의 총소리가 나더니 대머리가 라이터를 떨어뜨리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 그녀는 수많은 동료유대인들이 갇힌 창고에 불 지른 대머리가 자기 몸에 불이 옮을 걸 두려워해 기름 묻은 손을 자꾸 닦고 닦는 모습이 너무나 역겨워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다."(319-3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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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포로들을 불태워 죽인 이가 자신의 몸에 불이 조금이라도 붙을까봐 안절부절하고 있다. 그 모습이 역겨운 빨치산 대원이 그를 사살한다. <휴전(La tregua)>에 등장하는 모르도 나훔의 말처럼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 이번엔 점잖은 늑대이다.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e' un Uomo)>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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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3층에 있는 내 침대에서 쿤 노인이 머리에 모자를 쓰고 상체를 거칠게 흔들며 큰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그 소리를 듣는다. 쿤은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하고 있다.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 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 오늘 벌어졌다는 것을 쿤은 모른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면 쿤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 쳤을 것이다.('1944년 10월', 198-199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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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아남았음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 쿤 노인이다. 동료를 죽이는 데 가담한 앞의 대머리보다 쿤 노인은 도덕적인가? 레비가 쿤의 기도를 신이 내동댕이 칠 것이라고 말하는 건 그렇지 않다는 뜻일 게다. 내동댕이 쳐질 것은 쿤의 기도만이 아닐 것이다. 지옥을 경험한 레비는 칸트의 이 같은 말도 내동댕이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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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은 오직 도덕적 악덕으로부터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인 소질은 선의 소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악덕의 최초 발생 근거로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마누엘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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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악덕이란 생각조차 불가능한데, 그 악덕은 순수 의지가 자신이 지닌 자유를 아무런 동기 없이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유를 포기한 자들과 숱하게 만난 레비에게 "당신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행복한 헛소리일 수 밖에 없다.
그럼 왜 숱한 사람들이 의지의 자유를 포기한 것일까? 철학자 김영민은 <동무론>에서 하이데거를 들어 한 가지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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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가 히틀러를 교양 없는 인간으로 비난했을 때, 하이데거는 교양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서 히틀러의 그지없이 우아한 손을 그 변명으로 내세운다.('회의와 신뢰의 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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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우아한 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우아한 손은 부하 아이히만에게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잡아가 절멸하라 명령한 손이기도 하다. 왜 그토록 위대한 철학자 하이데거에겐 그 손이 우아하게만 보였을까? 아니, 독일 국민 90%가 히틀러의 광기를 우아하고 위대하다 여겼을까?
프리모 레비가 빨치산과 수용소 생활 중 마주친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언제고 광기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자들이다. 소설에서 빨치산 대원 모텔이 유대인이 죽어간 수용소 담벼락에 'VNTNV'이란 단어를 적는다. 복수를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광기에 휩싸여 애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유대인을 보자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레비의 전언을 슬프게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