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사이에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갈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아베 총리는 주한 일본 대사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모양인데, 조만간 부임할 신임 대사의 프로필이 새삼 화제다. 그의 장인이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서의 신임 대사의 경력 보다는 그의 장인에 얽힌 이야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가면의 고백』, 『금각사』, 『우국(憂國)』 등을 쓴 미시마 유키오야말로 세계 대전에서 참패한 이후 극도로 억눌려 있던 '극우 일본'을 갑자기 깨어나게(?) 만든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한국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쓴 『우국(憂國)』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신경숙 작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마저 '자신도 모르게' 그의 글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겠는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는 솜씨로 말이다. 명백한 표절조차 순순히 인정하지 못했던 낯부끄러운 여류 작가의 '이중의 과실'을 여기서 새삼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일본이 점차 팽창하는 제국으로 변모하던 쇼와(재위 1926∼1989)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20대와 30대에 일찌감치 일본 문단의 최정상에 올랐다. 40대에 이미 두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불과 45세의 한창 나이에 느닷없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래 탐미주의의 극치로 평가받는 『금각사』와 같은 걸작을 남긴 천재 작가가 하루 아침에 (아베보다도 더 아베스러운) 꼴사나운 모습으로 '일본 자위대'를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할복 자살로 삶을 마감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느닷없는 행동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미시마 유키오의 극단적인 할복 자살에 얽힌 전후 사정들을 들여다 보기 전에, 그의 문학적인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의 갑작스런 우경화와 충격적인 자살이 그만큼 더 충격적으로 느껴질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세출의 걸작인 『금각사』를 발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문학 청년이었다. 그 무렵까지도 그는 31세의 노총각이었다. 금각사를 발표하고 2년이 지난 1958년에 결혼할 때 주례를 맡은 인물은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였다. 그런데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설국』의 작가로 귀착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그보다 앞서 세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다가 아깝게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다니자키는 1958년에는 펄 벅의 추천으로 노벨상 후보에 처음 올랐고, 1963년과 1964년에는 최종 후보까지 올라 수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수상에 실패했다.(1964년에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에게 밀려났다.) 결국 1965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1968년에 가와바타에게 노벨상이 돌아가자 "다니자키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은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지 5년 후인 1970년에 비극적인 자살로 마감했는데,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불과 2년 뒤인 1972년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하고 만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해인 1965년과 2년 후인 1967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의 문학 천재들은 모두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노벨상을 수상했고, 결혼식때 주례와 신랑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다시 미시마의 죽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자살은 당시에도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차제에 다시 한번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그의 죽음이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부활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966년 민병대 "방패의 모임(楯の會)'를 결성, 우익 정치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방패회는 무장 투쟁 훈련을 했다. 이는 이후 일본의 신우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시마는 1968년에 <문화방위론>을 간행했다. 이는 무질서할 정도로 자유롭게 전개되어 왔던 일본 문화의 정신과 '미의 총람자(總攬者)'로서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물질 문명의 더러움으로부터 구해내고, 또한 공산주의의 손으로부터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1969년 우익 운동가 에토 고사부로의 자결에 큰 영향을 받아 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들어가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과 면담하던 중에 가지고 간 일본도로 위협해 인질로 잡은 뒤 부하 8명을 부상하게 했다. 총감의 방 앞 발코니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향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 헌법 개정을 요구,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한 뒤 약 5분 후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출처 :위키백과)

 

미시마의 자살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내면에 끈끈히 흐르는 '침략 본성'이 어떻게 일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극우 본성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음은 누구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그의 자살 이후에 새로운 우익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흐름이 오늘날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자민당 정권에까지 깊숙히 스며있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그러니 미시마의 자살이 어찌 한낱 '극우 사상에 심취된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로 간단히 치부될 수 있겠으며, 그의 맏사위가 차제에 신임 주한 일본 대사로 부임하는 일이 어찌 우연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이미 49년 전에 죽은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을 둘러싸고 오늘날의 우리가 그의 죽음을 너무 과장해서 새삼 돌이켜 보고 예민하게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또한 그의 죽음보다 14년이나 앞서서 발표된 『금각사』라는 걸작 소설 속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극우 사상의 씨앗들'을 새삼 꼬치꼬치 찾아내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을 지도 모른다. 굳이 맹자나 순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인간에게는 누구한테나 타인을 지배하려는 나쁜 욕망이 내재되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결합하게 되면 더욱 맹렬하게 불타 올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어느 시대에나 능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각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건축물이 되었고, 그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한해 수백 만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 건축물이 지어진 해가 공교롭게도 1397년이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해보다도 딱 1년이 앞섰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 소설 속에 미국과 맞서 싸우던 '군국주의 일본'이 자주 등장하고, 금각사가 실제로 '방화범'에 의해 완전히 전소된 때가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정확히 7일이 지난 때였고, 작품 속의 주인공이 한국전쟁 때문에 금각사를 불태우려는 결심을 더욱 앞당겼다는 사실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 금각사(출처 : 위키백과)

 

 

6월 25일, 한국에 동란이 발발했다. 세계가 확실히 몰락하고 파멸하리라는 내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서둘러야 한다.(342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제9장>

 

 

소설 『금각사』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극우주의 아베 정권을 강력하게 이어주는 뚜렷한 연결고리들은 그런 사소한 우연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웃 국가에 대한 악랄한 식민 지배뿐 아니라, 가장 추악한 범죄인 2차 대전 당시의 끔찍한 만행들까지도 뉘우치지 못하고, 도리어 멀쩡한 평화 헌법을 개정하지 못해 저토록 안달하는 아베 정권의 추악함은 어쩌면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훨씬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욕망하지만 차지하지 못하고, 행위하지 못하고, 지배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해코지 본성' 또는 '파괴 본성'이 아닐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완성한 이후로 죽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에 급속도로 '우경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숙아로 태어난 미시마는 어려서부터 육체적인 열등감에 몹시 시달렸던 탓에 12세까지도 할머니 밑에서 양육되었으며, 또래 소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거나, 혹은 조모가 지정해 준 이웃집 여자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런 열등감이 얼마나 지독했겠는가. 그가 마침내 그런 열등감을 극복한 계기가 『금각사』를 연재하는 동안에 병행했던 '육체미 운동'이었다.

 

 

"이러한 열등감을 30년이나 짊어지고 온 것이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로 어리석게 여겨진다."

 

미시마가 육체미 운동에 열중하여 하루하루 근육이 붙어나가는 동안 『금각사』의 주인공인 미조구치 또한 '말더듬이'이자 '행위 불능자'(그는 대학교에 다니는 건강한 청년이었지만 '동정'을 떼는 데 여러 번 실패한다.)에서 차츰 벗어나 마침내 '미의 화신'인 금각사를 불태우는 대담한 행위를 열망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육체적인 열등감으로부터 탈피한 작가 미시마와 금각에 방화하여 행위의 세계로 뛰어든 미조구치는,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는 마지막 문구에 공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시마는 『금각사』에 '개인의 소설'이라는 별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면의 테마'에 중점을 두고 『금각사』를 평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다. 젊은 시절 특유의 어두운 고뇌와, 그 고뇌를 극복하며 성장하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이 작품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401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작품 해설> 불후의 명작 《금각사》의 테마는 무엇인가 

 

 

 소설 『금각사』는 명백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며,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개인의 소설'이라는 사실이 새삼 우리에게 크게 부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금각사』를 읽는 독자가 오늘날 '아베 정권'으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들의 추악한 본성을 소설 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고, 그러한 재발견이야말로 미시마 유키오가 그토록 치열하게 그려내고자 애썼던 『금각사』 방화범의 행위와 극우파 아베 정권의 폭주를 연결시켜주는 '비밀 통로의 발견'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 방화범에 얽힌 실화'를 자신의 '고백 소설'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자료 조사에 매달린 기간만 무려 5년이었다. 그는 방화범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해 일부러 '수기 소설' 내지 '고백 소설'의 형식을 취했으며, 바로 그 점이 독자들을 강력하게 몰입하도록 만든다.(특정한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끝끝내 그 대상을 파괴하고야 만다는 이야기가 '수기' 형태로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금각사』는 언뜻 『롤리타』를 연상시키키도 한다. 롤리타에 집착한 주인공 험버트의 수기 속에 작가 나보코프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겹쳐져 있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롤리타』는 『금각사』보다 1년 앞선 1955년에 출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조구치가 '말더듬이'라는 육체적 결함 때문에 겪는 극심한 열등감은 차츰 '아름다움을 향한 구애의 좌절'로 이어진다. 자신의 이상형이나 마찬가지였던 우이코를 만나러 새벽녘에 골목길에서 숨어 기다렸다가 막상 마주치고 나자 입도 뻥긋 못하고 망신만 당한 게 대표적이다. 그런 좌절들은 나중에 성인이 된 뒤로도 줄곧 이어진다. 대학 동창생인 가시와기가 거듭 여친들을 소개해 주지만 미조구치는 거듭 '행위의 문턱'에서 좌절을 겪는다.

 

가시와기는 나를 인생으로 재촉해주는 친절 또는 악의를 내가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말한 바와 같다. 중학교 시절에 선배의 단검 칼집에 흠을 냈던 나는, 인생의 밝은 표면에 대한 무자격을 이미 내 자신 위에 명확히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시와기는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친구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꿔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았다.(180∼181쪽)

 

 

인식이나 욕구가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는 극단적인 좌절감은 마침내 '금각사'로 전이된다. 금각사야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줄곧 '완벽한 미의 화신'이자 '우이코의 물질화된 대상'이었음에도 그는 금각사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줄곧 바라만 본다. 오매불망 '금각사와의 합일(合一)'을 꿈꾸던 그는 금각사 주지로부터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한 일을 계기로 학업마저 포기한 끝에 출분((出奔)하고,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마음 먹는다.

 

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했던 그 말이.

……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276∼277쪽)

 

 

"내가 인생에서 최초로 부닥친 난관은 아름다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회상한 〈나〉는 2차 대전 중의 종말관 속에서 '금각사와 함께 불에 타 죽는 생의 결정적 순간'을 바랬지만 전쟁은 허망한 패망으로 끝나고, 전후의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주인공 미조구치의 이런 정신 편력이야말로 '먼 훗날 극우의 상징'이 된 미시마의 정신 편력에 다름 아니다. '극우'란 무엇일까. 결국 '화창한 봄날' 같은 따사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상태도 포함하는 개념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의 참화와 함께 불타오르는 금각을 보지 못하고 절망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좌절감이야말로 오늘날 '극우 일본'의 상징이 된 아베의 어두운 내면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극우가 극단에 이르러 결국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게 결국 '금각사에 대한 방화'이고, 자위대에 무단 침입하여 '자위대여, 무장하라'고 외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고, 미우나 고우나 이웃으로 서로 공생하며 살아온 이웃나라를 다시금 힘으로 짓밟으려는 '아베의 폭주'가 아닐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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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8-18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란 일본 작가는 70년대에 나온 부도덕 교육강좌란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시니컬한 그의 독설에 맘에 들어 그에 대해 알아보니 지위대에 무력 봉기를 선동하다 할복 자살을 한 극우 인사란 것을 알게되고 그에 대해 관심을 끈 기억이 나네요ㅡ.ㅡ

oren 2019-08-18 23:40   좋아요 0 | URL
<부도덕 교육강좌>라는 책도 있었군요!
그런데 목차를 찾아 보니 참 꺼림칙한 내용들이 많네요...
아베스러운 치졸한 것들도 많고요...
* * *
남에게 폐를 끼치고 죽어라··28
친구를 배신하라··76
약자를 괴롭혀라··82
자만심을 가져라··89
약속을 지키지 마라··106
“죽여버려!”라고 소리쳐라··112
죄는 남에게 덮어씌워라··129
은혜는 잊어라··159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165
악덕을 많이 쌓아라··171
죽은 뒤에 험담하라··215
끝이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405

청아 2020-05-0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출판하셔도 될만큼 훌륭한 글입니다. 덕분에 놀라운 사실들을 알았네요. 최근에 어찌어찌해서 배우게 된 일본 작가들이 마침 저렇게 연관되어져 있다는 것도 신기하구요. 역시 더 찾아보고 공부할것이 많구나 결론 내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올려주세요. 틈틈히 oren님의 다른 리뷰들도 읽어볼께요!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 니체

 

 * * *

 

어느날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핫이슈로 떠오른 한일 간의 갈등을 통해 새롭고도 뚜렷하게 목도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과잉'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삼키는 게 과연 얼마만큼 가치있는 일인지를 우리는 너무 쉽게 불문에 부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 책임은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간악무도한 '아베 일당'에게 따지고 묻는 게 맞다. 그는 태생적으로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고약한 피를 지닌 극우 이데올로기로 찌든 인물이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 크게 확산된 혐한 분위기마저도 아베 정권 출범 이후에 두드러졌다는 분석도 있는 걸 보면 그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이 얼마만큼 작위적인 것인지를 새삼 돌아볼 필요도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태생적인 성향과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한국 때리기에 유난히 골몰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이토록 치졸하고도 무모한 도발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본의 경제 보복을 둘러싼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이러다간 우발적인 무력 충돌까지도 우려된다'는 식으로까지 무분별하게 확산된 건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방심과 과잉 대응이 단단히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반복하기도 지겨운 레토릭이 되어 버린 죽창가와 의병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언급부터 과잉이었다. 그런 말들을 재빨리 꺼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사태에 대해 최일선을 떠맡은 고위급 핵심 당사자들이었다. 그 정도의 수사로도 부족했는지 곧바로 성웅 이순신의 12척의 배가 소환되었고 신흥무관학교와 헤이그 밀사 파견까지도 뉴스에 오르내렸다. 기야 한미일 군사동맹의 중요한 고리 가운데 하나인 지소미아 파기가 검토 단계를 넘어 실행 압박에까지 이르렀고, 올림픽 보이콧 문제와 도쿄 여행 금지 구역 선포가 언급되는가 싶더니, 마침내 'No Japan' 깃발이 서울 한복판을 삽시간에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이토록 무분별한 '과잉 대응'이 어디에 있는가.

 

이토록 무책임하고도 자극적인 대응이야말로 우리의 지혜 부족과 경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소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죽창가가 지배계층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끝내 맥없이 쓰러지고 만 민초들의 최후의 저항을 상징하고, 의병 운동조차 국가적인 대재앙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조정과 관군 부족 때문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초들의 항일 구국 운동이었음을 왜 모르는가. 신흥무관학교나 헤이그 밀사 파견 또한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나 간절한 노력을 상징하는 아픈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토록 아픈 과거의 역사가 왜 하필 이런 시점에 빠짐없이 다시 불려나와야 하는가. 국민들의 삶이 정부의 거듭된 외교적 무능과 경제 실정 등으로 하루하루 나락에 빠져드는 데도 정부에서는 스스로 수습할 능력이나 대책이 없어 애꿎은 국민들을 '한일 경제 전쟁의 최일선'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왜인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단 이틀 만에 75조원이나 사라지고, 원화의 가치가 수년래 최저치로 급격하게 추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일본의 경제 침공'에 놀라 허둥대며 다급하게 죽창가와 의병과 이순신의 12척부터 호출한 무능한 지배층의 언급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정말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정부라면 '일본의 경제 침략'을 맞아 황급하게 '의병'부터 찾을 게 아니라 튼튼한 관군부터 내세워 수비를 단단히 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도모할 게 아니라 일본의 불의와 우리나라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공식 외교 특사들을 내세워야 마땅한 게 아닌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나라마저 빼앗겼던 100년 전의 그토록 나약하고 가련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소미아 파기도 그렇다.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갈등 때문에 일본이 치졸한 경제 보복으로 나온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우리가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상대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거사 갈등의 경제 보복 무기화에 맞대응해 우리가 경제 문제를 안보 문제로까지 확대시킨다면 국제적인 '아베 비난 여론'이 순식간에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한미일 안보동맹이 크게 흔들리는 마당에, 한일 사이의 과거사 갈등과 경제 보복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안보 협정까지 끌여들여 우리의 유일한 군사동맹국인 미국까지 자극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일본에 보복하기 위해서라면 미국과의 관계는 이럴 때 적당히 훼손시켜도 좋단 말인가. 이런 일이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울 한복판에 내걸린 '일본 보이콧 깃발'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켜켜이 쌓인 과거의 앙금들 때문에 이 사단이 났는데, 정부와 여당이든 지자체든 국민이든 어느 누구라도 하루 빨리 이 갈등을 슬기롭게 치유하고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모두에게 '최선'이 아닌가. 모든 정책 목표는 마땅히 거기에 맞춰져야 올바른 일 아닌가. 도대체 중구청장은 '무엇을 위해' 그런 깃발을 서울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 우득부득 내걸어야 했는가. 집권당의 '반일 캠페인'에 더욱 큰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반일 무드가 나부끼는 깃발 덕분에 더욱 드높아지면 문제 해결이 더욱 앞당겨지는가.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며 생업에 몰두하는 서울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일본의 지자체 공무원들은 급감한 방일 관광객 때문에 항공 노선 감축에 나선 국내 항공사까지 직접 찾아와서 '노선 유지'를 간곡히 당부하는 마당에, 어떻게 중구청장의 머리 속에는 그런 상식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일 무드 고취'에만 그토록 정신이 팔려 있는가. 이런 마인드라면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입국부터 미리 막아야 옳은 일 아닌가.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일본과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도쿄를 여행 금지 구역으로 검토해야 된다는 주장이나 올림픽 보이콧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옳다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어떻게 꾀를 내도 죽을 꾀만 낸다는 말인가. '일본 경제 침략 특별 대책 위원회'라는 곳에서는 마치 한일 사이의 온갖 잠재된 갈등 요소를 이번 기회에 최대한으로 부각시키고 극대화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활동하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여행객만이 아님은 새삼 물어볼 필요가 없다. 정말로 도쿄의 방사능 오염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가 미리 나설 필요조차도 없다. 다른 선진국들이 어련히 알아서 그런 문제점을 제기하고 조치를 취할까. 때는 이때다, 마침 잘 됐다 하고 우리나라가 떡 하니 도쿄를 여행금지구역으로 정말로(!) 설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멀쩡한 이웃나라의 수도까지도 자국 국민들의 여행을 통째로 금지시키는 나라가 등장했다고 얼마나 비웃겠는가. 설마, 이번 참에 정부에서 '도쿄 여행 금지 조치'를 내리게 된다면 눈치 빠르고 똑똑한 우리 국민들은 미리 알아서 '도쿄'뿐만 아니라 일본까지도 여행금지 국가로 찰떡같이 알아 듣고 거국적으로 일본 여행을 기피할 줄 기대했는가. 

 

엊그제는 우리가 그토록 가슴 절절히 불러 왔던 애국가마저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한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인물이니 전혀 근거없는 문제 제기는 아닌 셈이다. 그 문제는 과거에도 이미 충분히 다뤄졌고, 가슴 절절한 애국심을 고취시킨 애국가의 기나긴 역사에 비춰봐서도 그걸 새삼스럽게 부정할 까닭이 없다는 쪽으로 정리된 터였다. 그런데도 왜 하필 이럴 때 애국가가 또다시 문제인가. 아무리 일본과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쳐도 수천만 동포들에게 그토록 가슴 뜨거운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애국가마저 '친일'이라는 이름 앞에 간단히 내동댕이쳐져야 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고 버려야 할 하찮은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친일이 그토록 문제가 된다면 같은 우리 민족에게 탱크와 총칼로 무참히 짓밟고 수백 만의 생명까지 앗아간 북한에게는 왜 그토록 너그러운가. 일제의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최악의 만행을 저지르고 전국토를 잿더미로 바꾼 걸로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철책 너머로 무시무시한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연거푸 쏘아대는 북한을 무턱대고 감싸고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는 '친북파'들은 도대체 어떤 형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다는 말인가.

 

애국가를 지은 작곡가의 친일 행위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는 거기에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 마땅하고, 한번 친일 행위를 했으면 영원히 그에 상승하는 대접을 받아도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 사람이 가슴 절절한 애국심으로 애써 지어 만들었고 지금까지 물경 수억 명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겹게 불러온 애국가마저 부정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무분별하게 과거에 매몰되고 집착하고 떠받드는 자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친일이 그토록 중차대한 흠결이라면 친일 행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던 조상을 둔 후손들은 지금이라도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고,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해야 옳은 일 아닌가. 또한 독립 유공자나 전쟁 유공자의 후손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이 부여되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전사들의 고귀한 희생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제발 정신들을 좀 차리자. 과거의 역사는 영광스러운 것도 있을 수 있고,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도 있을 수 있다. 영광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기리면 된다.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반성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바탕으로 삼으면 족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과거사에 집착하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만큼 침식당하고 억눌리기 때문이다. '역사의 과잉'은 어쩌면 철학의 빈곤으로부터 느닷없이 끌려나온 부끄러운 사생아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와 미래의 삶이 중요하다면 '역사의 과잉'은 그만큼 절제될 필요가 있다.

 

반일 열기가 한여름 폭염만큼이나 뜨거운 이 때 이토록 고리타분한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반시대적 고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가 지닌 무게를 그에 합당한 만큼 지혜롭게 다루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침식하지 않도록 슬기롭게 다루는 문제에서 니체만큼 깊게 천착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 * *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름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 보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밎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망각이 내재한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속하듯이.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292∼293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성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찍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천성의 뿌리가 강할수록, 그가 과거로부터 습득하거나 갈취하는 것은 더 많아진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천성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은 역사적 의미가 너무 무성해서 유해한 영향을 끼질 수 있는 한계가 그 천성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천성은 자기 것이든 가장 낯선 것이든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집어삼켜서 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 천성은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안다.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평은 닫혀 완전하며, 동일한 인간의 저편에 열정, 학습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이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3∼294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이제 여기서 각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관찰을 제시할 것이다. 한 개인이 가진 역사적 지식과 감각은 아주 제한적이고 그의 지평은 알프스 골짜기의 주민처럼 매우 협소하며, 그는 얼마든지 부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모든 경험에서 최초의 경험자라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ㅡ 모든 부당함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으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반면 그의 바로 옆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학식 있는 사람이 병약하고 쇠약한 상태로 있다. 그것은 그의 지평에 보이는 선들이 불안하게 항상 이동하기 때문이며, 그는 훨씬 더 부드러운 자신의 정의와 진리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와 억센 의지와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우리는 동물을 본다. 동물은 완전히 비역사적이며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지평 속에 산다. 그러나 동물은 적어도 권태와 왜곡이 없는 생활 속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그 안에 놓여 있는 한 그렇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고, 이 분위기의 파괴와 더불어 다시 사라진다.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 먼저 비역사적인 것의 안개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제 비유는 제쳐두고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자. 여자나 위대한 사상에 대한 격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그의 세계는 그에게 얼마나 달라졌는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자신이 맹목적이라 느끼고, 옆의 낯선 사람의 말을 들어도 그는 그저 둔탁하고 무의미한 음향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가 지각할 수 있다 한다 해도, 마치 모든 감각으로 동시에 포착하듯이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지각하지는 못하며, 화려한 색채를 느끼지도 못하고, 미세한 음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지각하지는 못한다. 모든 가치 평가는 변했고, 가치가 없어졌다. 그는 이제 느낄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을 이제 소중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문한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낯선 말과 낯선 의견을 지닌 바보였는가 하고. 그는 자신의 기억이 지치지 않고 하나의 원을 돌지만 너무 약하고 너무 피곤해 이 원 밖으로 한 걸음도 뛰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상태이며, 과거에 대해서는 편협하고 배은망덕하며, 위험에 대해 맹목적이고 경고에 귀를 막는 것이며, 밤과 망각의 죽은 바다에서 생동하는 작은 소용돌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ㅡ 철저하게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이지만 ㅡ 부당한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행위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비역사적인 상태에서 먼저 갈망하고 추구하지 않고는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그림을, 어떤 장군도 승리를, 어떤 민족도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행위자는, 괴테의 표현에 따르면, 양심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그는 아는 것도 없다. 그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그가 아는 유일한 권리는 이제 생겨나야 할 것의 권리다. 그렇게 모든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받아 마땅한 정도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최고의 행위는 그처럼 사랑의 충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행위의 가치가 다른 면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294∼296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어떤 사람이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이런 비역사적 분위기를 수많은 사례들 속에서 건조시켜서 나중에 흡입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마 인식하는 존재로서 초역사적인 관점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니부어가 언젠가 역사적 고찰의 가능한 결과로서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적이 있다. "명철하고 면밀하게 이해한다면 역사는 적어도 한 가지 일에 쓸모가 있다. 우리 인류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인물의 경우에도, 우연히 그들이 눈이 형식을 받아들여 이 눈을 통해 보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볼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강제적인 것은 그들의 의식의 강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다. 이를 확실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주어진 형태에 최고의 열정을 불어넣는 하나의 강력한 정신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 관점을 초역사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역사와 협력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그는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 관점은 초역사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함으로써 더 살고 싶은 유혹과 역사에 함께 참여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병으로부터도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인간에게나 어떤 체험에서, 그리스인에게서든 터키인에게서든, 또는 1세기나 19세기의 어느 시간에서든,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자신의 친지들에게 그들이 지난 10년 또는 20년을 다시 한번 살고 싶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은 그들 중 누가 저 초역사적 관점의 모법이 되는지를 쉽게 인식할 것이다. 그들이 모두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있지만, 왜 아닌지에 대한 이유를 각기 다르게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 20년은 더 좋아질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근거를 댈 것이다. 그들은 데이비드 흄이 이렇게 조롱했던 사람들이다.

 

최초의 힘찬 흐름이 줄 수 없었던 것을

인생의 찌꺼기로부터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296∼29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라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신은 너희가 저 목표를 향한 유랑을 처음 시작할 때 너희에게 신탁을 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것은 어려운 신탁이다. 저 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감추지도 선포하지도 않고, 단지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에, 다시 말해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남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며 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교양"은 오히려 오랫동안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으며, 그들의 종교는 전 오리엔트 신들의 투쟁이었다. 이는 지금 "독일의 교양"과 종교가 모든 외국들과 전체의 전(前) 시대들이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는 카오스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화는 저 아폴론의 신탁 덕분에 집합체는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차차 카오스를 조작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자신을 소유했다. 그들은 전체 오리엔트의 유산을 잔뜩 짊어진 상속인이나 아류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키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며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387∼38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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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의 대표가 일식집에서 낮술을 먹은 걸 두고 논란이 뜨겁다. 그 날이 하필이면 '일본의 제2차 경제 침략'이 자행된 날이었으니 국민들의 펄펄 끓는 분노 게이지가 한 순간에 불끈 솟구치지 않았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일 터이다. 폭염만큼이나 짜증나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워낙에 시국이 엄중한 때인지라 자칫 사소한 일이 크나큰 빌미가 되어 '천하에 몹쓸 짓을 한 사람'으로 내몰려도 할 말을 찾기 어려운 형국인데, 그걸 둘러싼 공방이 더욱 한심스럽다.

 

물론 대범하게 보자면 사과 한 마디쯤 건네고 그칠 일로 치부할 수도 있을 사안이다. 그런데 방귀 낀 놈이 성낸다고, 비난 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지 싶은 사람을 편드느라, 물불 안 가리고 마구 뛰어들어 온갖 궤변을 늘어 놓는 사람들의 언행들이 분노를 더욱 솟구치게 만든다. 일식집에 가서 사케 한 잔 먹는 것도 못마땅하냐? 그러면 일식집은 다 망하라는 말이냐? 하고 안하무인 식으로 상대편을 무턱대고 나무라고 도리어 꾸짖는 태도를 어느 누가 곱게 봐줄 수 있겠는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요, 아전인수와 견강부회가 따로 없다.

 

이번 무역 갈등 사태가 확전일로로 치달은 데에는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더라도) 현 정부와 집권당에게 일말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일본이 아무리 치졸하고 부당하게 도발했더라도 양국 사이의 갈등을 최대한으로 누그러뜨리고 지혜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정부와 여당몫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번 사태를 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사코 갈등을 부추기고 이만큼이나 일을 키워 온 데 대해 선봉장 역할을 떠맡아온 당사자들이 '일식당에서 사케 한 잔 먹은 게 무슨 잘못이냐'는 식으로 비판자들을 향해 도리어 도끼눈을 뜨고 달려드니 기가 막힐 뿐이다. 이보다 더 황당하고 오만한 자세가 어디에 있는가.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에 가장 많이 언급된 '사자성어'가 하나 있다면 그게 바로 '내로남불'이다. 내로남불도 사자성어로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내로남불은 우리말의 '단순한 축약형'이지만, 고사성어에서 유래된 비슷한 뜻을 지닌 말들도 아주 많다. 대표적인 게 아전인수, 견강부회, 적반하장, 지록위마 등이다. 아전인수의 반대말이 역지사지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니, 내 논에만 물을 끌어대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견강부회나 지록위마에 담긴 뜻에도 '억지를 부린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옳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틀렸다는 생각이야말로 초딩들에게나 어울리는 한심스런 생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제발 좀 억지와 변명은 이제 그만 부리고 대범하게 위기를 풀어내는 쪽으로 머리를 맞대 보라. 백성들의 삶은 하루 하루 나락으로 내몰리는 판국인데, '사케 한 잔' 먹고 나서도 반성할 줄은 모르고, 도리어 비판하는 국민들과 상대편들을 향해 거센 언사들을 총동원해 이토록 뻔뻔하게 우길 참인가.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는 정부의 고관대작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벼슬이 꾸며주는 위세에 도취된 채 꼴사납게 으시대는 오만방자함을 날카롭게 꾸짖는 내용이 나온다. 어느 날 우연히 함께 휴가를 얻어 궁궐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의 고관대작은 혹시라도 저잣거리에 '성인 같은 사람이 숨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함께 수레를 타고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때 만난 인물이 점 집 주인인 사마계주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과연 한마디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 두 사람은 관의 끈을 고쳐 매고 옷깃을 여민 뒤 똑바로 앉아서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 * *

 

 

사마계주는 이렇게 말했다.

 

어진 이의 행동은 도를 바르게 실천하여 바르게 충고하고, 세 차례 충고해도 듣지 않으면 [벼슬에서] 물러납니다. 남을 칭찬할 때에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을 미워할 때에는 원망을 돌아보지 않으며, 나라에 편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을 임무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벼슬이 자기에게 알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며, 봉록이 자기 공로에 알맞지 않으면 받지 않습니다. 바르지 못한 사람을 보면 그가 비록 귀한 지위에 있더라도 존경하지 않으며, 오점이 있는 사람을 보면 비록 그 사람이 높은 신분이라도 몸을 굽히지 않습니다. 벼슬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벼슬에서 물러나도 원통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몸이 묶이는 치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들께서 말하는 어진 사람이란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 자입니다. 몸을 낮추어 앞으로 나아가고 지나치게 겸손하게 말하며, 권세로 서로 끌어들이고 이익으로 서로 이끕니다. 도당을 만들어 바른 사람을 배척함으로써 높은 영예를 구하고, 나라의 봉록을 받고 있으면서 사사로운 이익만을 꾀하며, 나라의 법을 어기고 농민들을 착취합니다. 관직을 위세 부리는 수단으로 삼고 법을 무기로 삼아 이익만을 찾아 포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행하니, 비유하자면 흰 칼날을 잡고 사람을 위협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처음 벼슬에 나갔을 때에는 교묘한 수단으로 실력을 두 배로 보이게 하고, 있지도 않은 공적을 꾸며 말하며, 있지도 않은 일을 문서로 만들어 임금을 속입니다.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있는 것을 좋게 여겨 벼슬에 임명될 때 어진 사람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습니다. 공적을 말할 때에는 거짓을 보고하기도 하고, 사실을 과장하기도 하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기도 하고, 적은 것을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권세와 높은 지위를 구합니다. 그리고 주연과 놀이를 일삼으며 미녀와 노래하는 여자를 좇느라 부모를 돌보지 않고, 법을 어겨 가며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텅 비게 합니다. 이것은 창과 활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도둑질하는 것이고, 칼을 쓰지는 않지만 남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속였지만 아직 그 벌을 받지 않고, 임금을 죽였으나 아직 그 벌을 받지 않은 것뿐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높고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무리는] 도적이 일어나도 막을 수 없고,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도 평정할 수 없으며, 간사한 일이 생겨도 막지 못하고, 관직의 기강이 어지러워져도 다스릴 수 없으며, 사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해도 조절할 수 없고, 그해의 곡식이 흉년이 들어도 조절할 줄 모릅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국가에 대한 불충입니다. 능력도 없이 관직에 앉아 위에서 주는 봉록만을 탐하고 어진 사람을 방해한다면 이는 벼슬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도당을 거느리고 있는 자가 등용되고, 재물이 있는 자를 예우하는 것은 거짓된 행위입니다. 공들께서만 유독 올빼미(소인)와 봉황(군자)이 함께 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십니까? 난, 지, 궁, 궁藭 같은 향기로운 풀은 넓은 들판에 버려지고, 蒿와 蕭가 숲을 이룹니다. 군자가 물러나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는 자들은 바로 공들 같은 사람입니다. (773∼775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일자 열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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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꼴이 너무나 엉망진창이다. 고작 이런 꼴을 볼려고 촛불을 들었나 싶은 자괴감이 들던 때도 잠시였다. 내우외환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싶다. 거의 모든 경제 지표는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가 경제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주식시장이 '금융위기 수준'의 한국 경제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코스피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0.92% 하락, 2018년 1월 최고치 대비 20.74% 하락

코스닥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23.36% 하락, 2018년 1월 최고치 대비 30.84% 하락

다우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91.52% 상승, 2009년 저점 대비 320.29% 상승

나스닥 :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최고치 대비 191.11% 상승, 2009년 저점 대비 558.24% 상승 

 

국가의 지도자는 거듭된 실책과 외교적인 무능으로 일관한 채 거의 모든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점점 더 악화일로로 내몰고 있다. 중국으로부터는 안보 목적의 사드 배치를 계기로 치욕스러운 '삼불 정책'까지 약속하고도 여전히 보복으로 억눌린 채 도리어 중국으로부터 '사드 문제 해결'을 공식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상태다. 러시아로부터는 명백히 영공을 침범당하고도 도리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느라 쩔쩔 매다가 국가적인 망신만 초래했다.

 

오래도록 혈맹 관계였던 미국과는 '대북 제재 해제 문제' 하나만 두고도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다가 차츰 더 멀어지는 형국이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부당한 경제 보복을 당하는 데도 '적극적인 중재'에는 명백하게 거리를 두는 모습이 단적인 사례이다. 지난주에 또다시 쏘아 올린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에 대해서는 아예 '미국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라며 태연자약하게 무시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미국과는 도대체 얼마나 소원해진 것인가.

 

한국과 일본 사이는 어떤가. 수십 년 동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고, 지금도 G2 다음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세계 3위의 기술 초강대국을 상대로 우리는 뾰족한 대책도 없이 소모적이고 무분별한 갈등을 확산시키고 있다. 정말로 일본이 우리에게 적대국인가? 세계적인 경제 대국과 무역을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후발 경제 강국이 서로를 이웃나라로 둔 잇점을 오랫동안 향유해 온 공생 관계가 아니었던가? 이런 이웃나라를 두고 양국의 통치자들이 벌이는 얄팍한 정치 싸움에 경제와 민생이 희생되어서 결코 좋을 리 없다. 국민들은 나날이 시름만 깊어가는데 이 싸움을 주도하는 양국의 집권 세력들은 국민들을 싸움판에 내모는 데 정신이 온통 팔려 있다. 그들의 강공 논리는 너무나 저열하고 매국적이다. 이번 싸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하는 게 대표적이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북한과의 관계는 어떤가. 전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세습 통치자가 대한민국의 통치자와 국민들을 능멸하는 수준의 망발을 연일 쏟아내는 데도 통치자는 며칠째 오불관언 입을 꾹 닫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무반응'이야말로 국가의 안위와 국민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 지도자의 신성한 책무를 함부로 내팽개치고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도대체 어쩌다가 나라가 이런 우스운 꼴로 추락하고 말았는가. 경제 상황은 나날이 나빠지고 국민들의 삶은 점점 더 바닥으로 내몰리는 데도 집권자들의 '뻔한 선수 교체' 행사에서는 함박웃음과 격려와 칭찬 일색이다. 국민들의 비판과 야유에는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닫겠다는 심산인지, 그런 '비판과 야유'마저도 '애국심의 발로'로 받아들일 만큼 '포용 국가'의 진면모를 발휘하겠다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는 '토붕'이 '와해'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흔히 토붕와해(解)로 함께 묶여서 쓰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경중은 무시될 때가 많다. 말 그대로 '흙이 붕괴되고 기와가 깨진다'라는 뜻으로, 사물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궤멸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그런데 왜 사마천의 책에서는 와해보다 토붕이 더 무섭다고 했을까. 와해는 수습할 수 있지만 토붕은 수습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 * * 

 

 

이때 조나라 사람 서악徐樂과 제나라 사람 엄안嚴安도 글을 올려 각각 당면한 정사를 한 가지씩 말했다. 서악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건데 천하의 근심은 토붕土崩에 있지 와해瓦解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토붕이라고 합니까? 진나라의 말세가 이것입니다. 진섭陳涉은 천승의 높은 지위에 있지도 않았고 땅도 한 자 없었습니다. 신분도 왕공이나 대인이나 명족의 후손이 아니고, 향리에서도 명예가 없었으며, 공자나 묵자나 증자 같은 현인도 아니고, 도주陶朱나 의돈猗頓 같은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난한 골목에서 일어나 갈래 진 창을 휘두르며 한쪽 팔을 걷어붙이고 큰소리로 부르자, 천하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리듯이 그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백성이 괴로워해도 군주가 그들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아랫사람이 원망해도 위에서는 알지 못하고, 풍속이 이미 어지러워져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가 진섭의 밑천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토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근심은 토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와해라고 합니까? 오, 초, 제, 조나라의 반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곱 나라가 대역을 도모하고 저마다 만승의 천자라 일컬으며, 무장한 병사가 수십만 명이고, 위세는 그들의 영내를 압도할 만하며, 재력은 사민士民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쪽으로 한 자 한 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중원에서 사로잡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의 권위가 보통 남자보다 가볍고 병력이 진섭보다도 약했던 탓이 아닙니다. 당시만 해도 선제(한나라 고조)의 은택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며, 그 땅에서 안주하여 풍속을 즐기는 백성이 많았기 때문에 제후들에게는 밖에서 도움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와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근심은 와해에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보면 천하가 진실로 토붕의 형세로 기울면 지위나 벼슬도 없이 궁핍하게 지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악한 짓을 하여 천하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진섭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하물며 삼진의 군주와 같은 [천자의 자리를 탈취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천하가 아직 잘 다스려지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토붕의 형세가 없다면 강한 나라와 강한 병사가 있을지라도 발뒤꿈치를 돌릴 겨를도 없이 사로잡힐 것입니다. 오, 초, 제, 조나라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하물며 신하나 백성이 어떻게 난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 중요한 두 가지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명백하고도 긴요한 일이니, 현명한 군주라면 여기에 뜻을 두고 깊이 살핍니다.

 

요즈음 관동에서는 오곡이 잘 여물지 않아서 연간 수확이 예전처럼 회복되지 못해 백성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변방에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리에 따라 살펴보면 백성 중에 그곳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편안하게 여길 수 없으면 동요하기 쉽습니다. 동요하기 쉬운 것은 토붕의 형세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만물 변화의 근원을 살펴서 국가 안위의 기틀을 분명히 하고 조정에서 이것을 해결하여 우환이 드러나기 전에 없애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천하에 토붕의 형세가 없도록 하는 것뿐입니다.

 

(434∼435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평진후 · 주보 열전> 중에서


 

 * * *

 

 

엄안은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건대 주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잘 다스린 것이 300여 년인데 성왕과 강왕 때에 가장 융성하였으며 ……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큰 무리가 작은 무리를 학대하며 …… 이로부터 백성의 괴로움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강한 나라는 침략을 일삼고 약한 나라는 지키기에 급급하여 혹은 합종을 하고 혹은 연횡을 하며 바퀴를 부딪치며 수레를 달리니, 투구와 갑옷에는 이가 들끓건만 백성은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진나라 왕은 천하를 서서히 집어삼켜 전국戰國을 아우르고 황제라 일컬으면서 천하의 정권을 잡고, 제후의 성을 파괴하고, 그들의 무기를 녹여서 종과 종틀을 만들어 다시는 무기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선량한 백성은 이제는 전국의 불안에서 벗어나 현명한 천자를 얻었다고 하며 저마나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진나라가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부세를 줄이고 부역을 덜어 주고, 인의를 존중하고 권세와 이익을 가볍게 여기며, 독실하고 돈후한 것을 숭상하고 교활한 지혜를 나쁘게 여기고, 좋지 못한 풍속을 바꿔서 천하를 교화시켰더라면 대대로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교風敎를 실천하지 않고 옛날 습관대로 교활한 지혜와 권세와 이익을 좇는 자는 끌어다 쓰고, 독실하고 돈후하며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자는 물리치며, 법은 엄중하고 정치는 준엄했습니다. 아첨하는 자가 많아 황제는 날마나 자신을 찬미하는 말만 듣다 보니 야심이 커지고 마음이 교만해져서 천하에 위세를 마음껏 떨쳐 보고 싶어졌습니다. … 이때 진나라의 화는 북쪽으로는 흉노 땅에 걸치고, 남쪽으로는 월나라에 뻗쳐 군대를 쓸모없는 곳에 주둔시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십여 년간의 싸움에 장정들은 갑옷을 입고 여자들은 물자를 실어 나르느라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삶을 마다하고 스스로 길가의 나무에 목을 매어 죽는 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천하에 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진陳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무신과 장이는 조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항량은 오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  심산유곡에서까지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났으므로 다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작이나 후작의 후손도 아니고 장관의 아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 한 자 한 치의 조그마한 세력도 없이 거리에서 일어나 갈래 진 창을 잡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모의하지 않았지만 함께 일어났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함께 모였으며, 점거한 지역이 점점 커지고 넓어져서 패왕覇王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당시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

 

 지금 중국은 개 짖는 소리에 놀랄 일이 없을 만큼 태평스러운데, 나라 밖 먼 곳의 수비에 얽매여 국가를 황폐시키는 것은 백성을 자식처럼 여겨야 하는 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끝없는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음껏 행동하여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화가 맺혀 풀어지지 않고 전쟁이 그쳤는가 하면 다시 일어나, 가까이 있는 자는 걱정하고 괴로움을 겪을 것이며 멀리 있는 자는 놀랄 테니 이것은 천하를 오래도록 지탱하는 길이 아닙니다.

 

지금 천하는 갑옷을 단단히 입고 칼을 갈며 화살을 바로잡고 활줄을 매며 군량을 나름에 쉴 새가 없으니, 이것은 천하 사람이 모두 우려하는 바입니다. 대체로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복잡해지면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 또 최근에 진나라가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그 법령이 지나치게 엄하고 욕심이 커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 태수의 권세는 육경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땅이 사방 천 리쯤 되는 것은 [진승 등이] 마을을 근거로 삼은 것에 비할 바가 못 되고, 갑옷과 무기도 정교하여 갈래 진 창의 쓰임에 비할 바가 안 됩니다. 만일 만세의 큰 변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상서가 천자에게 올려지자 천자는 세 사람을 불러 보고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소? 어째서 이토록 늦게 만나게 되었단 말이오!"(437∼441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평진후 · 주보 열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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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축국서(諫逐國書)
    from Value Investing 2019-08-25 17:00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빗대어 '간축국서'라는 제목을 달아봤다.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법무장관 후보자인 조국 전 수석을 이제는 과감하게 물리치고 보다 널리 새로운 인재를 구하라는 철없이 순진한(?) 바램으로 써 본 글이다.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중국 진시황 시대에 활약했던 승상 이사가 쓴 명문장이다. 왕에게 올리는 건의를 담은 서간문 형식의 상서上書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역사는
 
 
북다이제스터 2019-07-28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융 현황이 나라 현황의 척도가 아니라 보입니다. ^^

oren 2019-07-28 20:42   좋아요 1 | URL
한 사람의 체온만 가지고 그 사람이 건강한지 쇠약한지를 판단하기 어렵듯이, 한 국가의 종합적인 건강 상태를 단지 주가지수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 봅니다. 국가 재정 상태, 무역 수지, 외환보유고, 국방력, 실업률, 환율은 물론 국민들의 통합 정도까지도 두루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마땅할 테니까요.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증시 상황이야말로 한 국가의 경제 상황이 좋고 나쁨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바로미터(‘척도‘가 아니라 ‘온도계‘) 가운데 하나‘라는 뜻입니다. 증시 지표가 한 국가의 모든 걸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측정하는 ‘만물의 척도‘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 슬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과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

 - 사마천, 『사기』 중에서

 

 * * *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를 읽는 동안에 우리가 처한 눈 앞의 현실을 겹쳐 떠올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역사의 거울'에 비춰 보면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일들이 뜻밖에도 몹시 선명하게 그 본질을 드러내 밝혀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때에도 그랬다. 그때 읽었던 역사책들 속에서 박근혜 정부의 잘못이 얼마만큼 더 뚜렷하게 드러났는지를 이제 와서 새삼 들춰낼 필요가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온갖 실정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다 드러나고 말았을 때, 국민들이 한겨울 추위를 마다 않고 저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외친 단 하나의 구호는 '이게 나라냐'는 거였다. 그만큼 국민들은 대통령의 '제멋대로식 권력 행사'에 대해 거센 분노를 쏟아냈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은 통치자에게 그런 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라고 나라를 맡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가 그때만큼 절절하게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 든 적도 일찌기 없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할 줄 몰랐다. 수차례에 걸친 대국민 담화와 변호인의 기자 회견과 특검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과정에서 '일관되게' 국민들에게 보여준 것이라고는 '거짓과 변명' 뿐이었다.

 

요즘 푹 빠져 읽고 있는 역사책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인데, 이 유명한 역사책을 읽는 동안에도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의 사건들이 너무 자주 오버랩된다. 사마천의 책은 기원전 91년에 완성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110년 전에 나온 셈이다. 이토록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인데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며, 21세기에 우리들의 목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까지도 명쾌하게 비춰주는 거울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처절한 생존 투쟁과 인간의 변치 않는 본성들이 그 책 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책은 온갖 권모술수가 '역사상 유례가 드물 정도로 난무하던' 저 유명한 춘추전국시대를 주된 시대 배경으로 다루는 데다가, 그 당시 전국 7웅(戰國 七雄)이라고 일컬어지던 일곱 나라가 국가의 존망을 둘러싸고 온갖 비상한 책략과 술책을 총동원했던 까닭에, 오늘날 총성 없는 전쟁이나 마찬가지인 '국가 간의 무역 전쟁'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특히나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절박한 과제로 불쑥 떠오른 '한일 무역 전쟁'을 둘러싼 양국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보노라면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이야기들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더군다나 이번 무역 전쟁이 어느새 '통상적인 무역 분쟁'이 아니라 '어느 한쪽은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르다'는 식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중차대한 전쟁'으로 차츰 확대되고 변질되는 모습은 자못 이채롭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이같은 사건 전개 양상이 양쪽 집권 세력의 교모하고도 주도면밀한 전략 또는 다소 고의적인 상대방 무시 전략 때문에 빚어졌다는 의심까지 불러일으키는 형국에 이르렀고, 이번 분쟁을 둘러싼 온갖 해법과 논쟁과 해석들이 백가쟁명식으로 쏟아지는 것도 모자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무역 전쟁의 원인과 대응 방식'을 놓고 서로 치열한 세력 다툼까지 벌이는 지경에 이르고 보니, 이래저래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처지에 놓인 국민들로서는 그저 황망할 뿐이다.

 

이 문제가 양국 사이의 '불행한 과거사' 때문에 빚어진 일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한 양국 사이의 정치외교적인 갈등 때문에 빚어진 문제를 치졸한 '경제 보복'으로 옮겨 간 아베 정권의 잘못을 부인할 사람도 우리나라 국민들한테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 정부의 대응은 근본적인 사태 해결 방식인 '외교적인 접근'은 등한시한 채 '무역보복의 부당성'에만 촛점을 맞추는 것인가.

 

물론 처음엔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기습적으로, 그것도 몹시 치졸한 방식으로 '급소'를 아주 세게 얻어맞았으므로 거기에 마땅한 거센 분노를 터뜨리고, 일본을 부리나케 찾아가서라도 따지고 항의하고, 국제 여론에도 이번 조치의 부당성을 구구절절 호소하고, 세계 만방에 우리의 억울함을 알리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도 마땅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일본의 기습적인 '무역 보복' 조치가 발표되고도 무려 일주일 가까이 침묵했더랬다. 몹시 기이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기나긴 침묵' 자체가 이번 사태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한편의 무언극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뭔가 몹시 걱정하고 우려하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는데, 정작 그 일을 당하고 나니 너무나 당혹스러운데다가 막상 뚜렷한 대응방법조차 없어서 몹시 당황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과연 그랬다. 대통령도 일본의 보복 조치 이후 최초의 공식적인 대응에서 분명하게 밝혔듯이, 이번 문제는 결국 외교적으로 푸는 게 최선인데도, 도무지 그 해법이 마땅치 않아서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번 사태가 치졸한 무역 보복으로까지 비화한 데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귀책 사유가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마땅한 어휘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귀책 사유'라고 표현했지만 우리에게 무슨 크나큰 잘못이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이 강력하게 항의할 만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의미로 쓴 단어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책 사유란 폭넓게는 1965년의 한일협정까지도 포함될 수 있으며, 좁게 보자면 박근혜 정부에서 졸속으로 처리한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 2018년 10월에 내려진 대법원의 배상 판결, 대법원의 판결이 필연적으로 몰고 올 '일본과의 외교 마찰'에 대한 대처 부족,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 등까지도 두루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귀책 사유가 없었더라면 일본이 어떻게 저토록 무모하게 '반도체 핵심 소재'를 무기 삼아 우리의 목줄을 비틀듯이 대담하게 공격할 수 있었겠으며, 우리 정부 또한 기습 공격을 당하고도 무려 일주일 가까이 침묵한 끝에 '외교적인 해법이 최선'이라는 말부터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겠는가.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번 사태가 갑자기 엉뚱한 쪽으로 비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아무리 비난하고 욕을 해도 시원찮을 족속인) 일본이 감히 우리에게 부당한 '경제 침략'을 벌일 수 있느냐는 격앙된 반응이 급속히 확산된 것이다. 좀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다짜고짜로 일본을 향해 거세게 덤벼드는 '총반격 모드'로 돌변했다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의병 운동이 일어나야 마땅하다'는 격한 반응이 뒤따랐고(도대체 '관군'은 어디서 무슨 전투를 벌이고 있었길래!), 청와대 핵심 참모의 SNS에서는 '죽창가'가 올라오더니, 국가 안보실 고위관계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언급할 정도로 사태가 급박하게 '항일 운동'으로 비화되었다. 때마침 지방행사에 참석했던 대통령은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까지 불러냈다. 그러나 이토록 가열차게 전쟁을 독려하는데도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점점 더 요원해 보이고, 날이 갈수록 이번 무역전쟁이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마땅히 정치외교적으로 풀어야 마땅할 문제임은 누구라도 빤히 아는 상식일진데, 정부 당국자들의 입에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공허한 얘기만 쏟아져 나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랜 원한 관계가 쌓인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통치자들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부침을 겪게 마련이다. 때로는 누그러지고 때로는 격화된다. 이건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가 그랬고,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제후국들이 그랬다. 섶에 누워 자거나 쓸개를 씹으면서 복수심을 키우다가도(와신상담) 같은 배를 타고(오월동주) 다른 나라를 치기 위해 동맹을 맺는 게 일상 다반사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에서야 한일 사이의 갈등이 언필칭 해방 이후 최고조로 나빠졌을까.

 

나는 그 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양국 통치자의 상반된 이념적 편향성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극우 성향의 아베 정권은 헌법을 고쳐서라도 전쟁 가능 국가가 되려고 혈안이다. 문재인 정권은 진보 정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좌파 정권에 가깝다. 일본에 대해서는 엄연한 안보 우방국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 비해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는 한없이 나약하거나 지나치게 너그럽다. 우리의 정당한 안보 주권에 관한 문제엿던 '사드 배치' 때만 보더라도 그렇다. 중국이 거세게 반발하자 주권 포기에 가까운 '삼불 정책'을 선뜻 약속했기 때문이다.

 

양국의 지도자 사이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대법원 판결' 이후로 얼마든지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할 수 있었을 테고, 아베 정권이 저토록 치졸한 '무역 보복'을 감행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문재인 정권에서도 이토록 가열차게 앞뒤 가리지 않고 '반일 투쟁'을 독려하지도 않았을 테고, 심지어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을 파기하겠다는 식의 '자해 소동'에 가까운 무리수를 꺼내들지도 않았을 테고, 이번 무역 보복의 궁극적인 목적이 '문재인 정권 끌어내리기'라는 섬뜩한 주장이 우리의 귀에까지 들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상관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 문제가 풀릴 테고, 그때 아무쪼록 우리가 보란듯이 일본을 확실하게 눌러 이겼으면 좋겠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로서는 용서하기 힘든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역사의 죄인'이자 불구대천의 원수임이 명백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꺼림칙한 의문은 남는다. 이번 사태가 악화되면 될수록 가장 큰 피해는 결국 우리나라의 기업들과 국민들에게로 귀착될 게 너무나 빤한 데도 도대체 왜 집권 여당에서는 '궁극적인 해법'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면서 오로지 '반일 운동'으로 똘똘 뭉치는 것만이 최선책인 것처럼 이번 사태를 호도하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조항이 그토록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지는 데도,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의 피해가 날이 갈수록 확산될 게 뻔한 데도, 이번 사태를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국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서둘러 해결하려는 노력은 갈수록 뒷전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사태가 자꾸만 이상하게 꼬이다 보니 기어이 엉뚱한 데서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현 정권의 2인자나 마찬가지인 청와대 핵심 참모가 이번 대법원 배상 판결에 비판적인 국민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어느 국민이 자기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부당한 보복을 당하는 처지를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현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민들을 하루 아침에 '친일파'로 몰아 세우고, '애국자' 아니면 '매국노'일 수밖에 없다고 규정해 버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죽창가를 부르며 일본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어 싸워야만 '애국자'인가. 차분하고도 냉정하게 양국의 갈등을 해소할 묘책은 없을까 고민하고 모색하는 사람들까지도 한사코 '친일파'로 규정하고 낙인찍어야 옳을 일인가. 국민들은 다만 양국 사이의 싸움이 커질수록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두려울 뿐이다. 그래서 일본이 저토록 길길이 날뛰는 까닭이 무엇인지 그 연유를 살펴 보고, 혹여 우리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여지라도 찾아낼 수 없을까 하고 살필 따름이다. 그래서 사법부의 판단이나 정부의 후속 대응에 대해서도 혹시나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살피면서 이런 저런 견해를 밝힐 뿐이다. 그런데 정권의 2인자가 '죽창가'를 내세우면서까지 전투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도 부족해서, 현정부의 대처 방식을 비판하는 국민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하겠다니 이런 억지와 오만이 어디 있는가.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고달프고 힘겨워 하루라도 빨리 궁극적인 해법을 모색해 달라거나, 일본과 정치적으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여지는 없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봐 달라는 요구가 그렇게도 못마땅한가. 현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는 국민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낙인찍고 한켠으로 따돌린다고 해서 도대체 사태 해결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그저 매국노일 뿐인가. 느닷없는 무역 보복 때문에 날로 시름이 깊어가는 데도 그저 가만히 앉아서 피해만 당하는 국민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비록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훗날의 역사가들은 청와대 민정 수석의 이번 '친일파' 발언을 '문재인 정권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망언'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왠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토록 황당한 주장이 뉴스를 장식할 무렵에 내가 펼쳐든 역사책의 대목이 하필이면 <이사 열전>이었다. 이 열전은 사기에 담긴 70편의 열전 가운데서도 특히나 명문으로 꼽힌다. 이 열전의 핵심은 둘이다. 그 중 하나는 육경(六經)에 통달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던 승상(권력의 2인자) 이사가 황제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선비들을 탄압하는 계책을 올린 데서 비롯된 '분서갱유' 이야기다. 두 번째는 경쟁자이던 이사를 모함하고 제거한 끝에 2인자로 등극한 '환관 조고'가 무소불위의 권력에 취해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지경에 이른 '지록위마'에 얽힌 이야기다. 진시황때 일어난 이 유명한 일화가 오늘날의 사태에 비춰봐서도 그리 동떨어진 얘기는 아니라는 느낌은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혹시나 싶어 '지록위마'의 뜻을 다시 찾아봤다. 이 말은 윗사람을 농락하여 자신이 권력을 휘두른다는 뜻도 있고, 억지를 부림으로써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도 있단다. 청와대 핵심 참모가 이번 사태에 비판적인 국민들을 '친일파'로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억지'를 부림으로써 국민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 *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람은 그 유명한 진시황이었다.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널리 인재를 구한 덕분이었다. 그런 인재들 가운데에는 진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음모를 꾸미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나중에 승상에 올라 진시황의 핵심 참모로 일했던 이사도 한때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그때 이사는 진시황에게 장문의 글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대변했다.(이것이 저 유명한 「간축객서()」다. 「간축객서」는 간절한 구직서일 뿐 아니라 이사의 재능과 모략과 지혜가 담긴 명문이다.)

 

신이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인구가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도 용감하다."라고 합니다. 태산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으므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왕은 어떠한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는 사방의 구분이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의 차별이 없으며, 사계절이 조화되어 아름답고, 귀신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이 오제와 삼왕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666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진시황은 빈객을 내쫓으라는 명령을 거둬 들이고, 이사의 관직을 회복시켜 그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고, 이사는 승상이 되었다.

 

시황제 34년에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풀었을 때, 순우월이 황제에게 간언한 적이 있었다. "어떤 일이든 옛것을 본받지 않고 오랜 시일 이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옛날의 좋은 제도는 다시 되살려 복원하자는 말이었다. 시황제는 이 건의를 승상 이사에게 검토하도록 했다. 이사는 순우월의 견해가 황당하다며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옛날에는 천하가 흩어지고 어지러워도 아무도 이를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나란히 일어났고, 말하는 것마다 옛것을 끌어내어 지금의 것을 해롭게 하고, 헛된 말을 꾸며서 실제를 어지럽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배운 것을 옳다고 여기고 조정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하였습니다. …… 그들은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어 비방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이루어질 테니 금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청컨대 모든 문학과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것을 없애도록 하고 이 금지령을 내린 지 삼십 일이 지나도 없애지 않는 자는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하여 성단(사 년 동안 새벽부터 일어나 성 쌓는 일을 하는 죄수)으로 삼으십시오.(668∼669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시황제는 그 제안을 옳다고 여겨 제자백가의 책들을 몰수하고 모든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천하에 그 누구도 옛것을 끌여들여 지금 세상을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 이른바 분서갱유의 시작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이듬해(BC 212년) 시황제는 함양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시황제는 세상을 두루 돌아보러 궁궐을 떠났다가 그만 객사하고 만다. 시황제가 병이 위독할 때 환관 조고에게 부탁한 일은 '맏아들 부소에게 후사를 맡기노라'는 편지를 맏아들에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황제의 곁에는 막내 아들 호해와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있었다. 이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죽음을 한동안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일을 꾸몄다. 환관 조고의 주도 하에 맏아들 호해가 태자로 오르게 만든 것이다. 시황제가 맏아들 부소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이 조작됐다.

 

"지금 너는 장군 몽염과 함께 군사 수십만 명을 이끌고 국경 지방에 두준한 지 십여 년이 지났으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병졸을 많이 잃었을 뿐 한 치의 공로도 세운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글을 올려 직언하고 비방하고, 지금의 직분을 그만두고 돌아와 태자의 지위에 되돌아갈 수 없음을 원망하고 있다. 너는 아들로서 불효하여 칼을 내리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든 부소는 사람됨이 어질었기 때문에 부하 장수인 몽염이 말리는데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자는 2세 황제로 즉위하였고, 조고는 2세 황제를 모시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어린 황제는 한가한 틈에 조고를 불러 물어보았다.

 

"사람이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준마 여섯 필이 이끄는 수레가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오. 이제 황제로서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으니 귀로 듣고 싶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모두 즐기고, 종묘를 편안히 하고 많은 백성을 즐겁게 하고 천하를 길이 소유하고, 타고난 내 수명을 누리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겠소?"

 

조고가 대답했다.

 

"법을 준업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며, 죄 있는 자는 연좌제를 실시하여 죄를 지으면 그 일족을 모조리 죽이고, 선제 때의 대신들을 물러나게 하고 폐하의 형제들을 멀리하며,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고 천한 자를 높여 주십시오. 선제의 옛 신하를 모두 제거하고 폐하께서 믿을 수 있는 자를 새로 두어 가까이 하십시오. 이렇게 하신다면 숨어 있던 덕이 폐하에게로 모이고 해로운 것이 없어지며, 간사한 음모는 막히고 신하들은 폐하의 은택을 입고 두터운 덕을 입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며,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습니다."(679∼680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2세 황제는 조고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죄를 짓는 자가 있으면 조고에게 맡겨 조사하도록 했고, 왕자 열두 명을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죽이고, 공주 열 명을 두에서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그들의 재산은 모두 거둬들였다.

 

법령에 따라 죽이고 벌하는 일이 날로 더욱더 가혹해지자 여러 신하가 스스로 위험을 느껴 모반하려는 자가 많아졌다. 또 황제를 위하여 아방궁을 짓고 곧게 뻗은 큰길과 넓은 길을 만드느라 세금이 더 무거워지고 변방 부역에 징발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초나라 수비병 진승과 오광 등이 반란을 일으켜 산동에서 일어나니 호걸과 날랜 사람들이 다 일어나 스스로 제후가 되고 왕이 되어 배반했다. 그 반란군은 홍문까지 진격했다가 물러날 정도로 거셌다.(681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승상 이사는 여러 번 황제에게 시국 수습책을 간언하려 했지만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이사를 문책했다. 이사는 벼슬과 봉록을 소중히 여겨 황제의 비위만 맞출 뿐이었다. 이리하여 처벌을 더욱더 엄격히 하고, 백성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는 자를 현명한 관리라고 했다. 2세 황제가 말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처벌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길에 다니는 사람 중 절반은 형벌을 받은 자이고, 형벌을 받아 죽은 자가 날마다 시장 바닥에 쌓여 갔다. 그리고 사람을 많이 죽인 관리를 충신이라고 했다. 2세 황제는 말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처벌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87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승상은 나중에 조고를 견제하기 위한 계책을 꾸미다가 도리어 환관 조고로부터 역습을 당해 황제로부터 신임을 잃고 만다. "조고가 아니었다면 승상에게 속을 뻔했소." 조고는 이사와 그의 아들 이유의 모반에 관한 진술서를 마음대로 꾸몄고, 황제는 이사에게 오형을 갖추어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허리를 자르도록 하였다. 이사가 죽고 나자 조고는 중승상으로 승진했고, 크든 작든 모든 일은 조고가 결정했다. 이 당시 조고의 위세를 상징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지록위마' 사건이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무거운 줄을 알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사슴이지?"

 

좌우에 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입니다."

 

2세 황제는 놀라서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태복(점을 치는 관리)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그러자 태복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봄가을로 교사(제왕이 교외에서 천지에 올리는 제사)를 지낼 때 종묘 귀신을 모시면서 재계가 석연치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덕을 많이 쌓아 재계를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696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2세 황제는 나중에 환관 조고가 꾸민 일에 속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고는 황제의 옥새를 꺼내어 찼지만 곁에 있던 신하 가운데 아무도 따르는 자가 없어 시황제의 손자 자영을 불러 옥새를 주었다. 자영은 즉위한 지 세달 만에 유방의 군대가 쳐들어 오자 옥새가 달린 끈을 목에 걸고 항복했다. 유방은 자영을 관리에게 넘겼으나 초나라 항우가 와서 목을 베었다.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이사는 삼공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높은 자리에 등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는 육경의 근본 뜻을 잘 알면서도 공명정대하게 정치를 하여 군주의 결점을 메워 주려 힘쓰지 않고, 높은 작위와 봉록을 누리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주에게 아첨아고 좇으며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기만 했다. 조칙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의견을 따라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제위에 오르게 했다. 제후들이 이미 뒤돌아선 뒤에야 비로소 군주에게 충고하려 했으니 때가 너무 늦었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오형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세속의 말과는 다르다.(698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 * *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읽는 동안에 자주 떠올린 말은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이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난 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툴 때의 일화 하나가 그걸 깨우친다.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초나라 항우를 무찌른 데에는 역이기(역생)의 공도 컸다. 그는 초나라 왕이 오창(오산에 세워진 식량 창고)을 소홀히 다루는 걸 보고 항우가 천자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고조 유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있고,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없다. 왕 노릇 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라고 합니다. 오창에는 천하의 곡식을 날라다 놓은 지 오래되었는데, 신은 그곳에 쌓아 놓은 식량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초나라 군대가 형양을 함락시키고도 오창을 굳게 지키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면서 죄를 지어 변방으로 쫓겨나 병사가 된 자들에게 성고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한나라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초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쉽게 취할 수 있을 때인데, 한나라가 도리어 물러나는 것은 스스로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입니다." (64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역생 · 육고 열전> 중에서

 

또한 사마천의 책에는 정치와 외교와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화식 열전>이다. 화식 열전의 핵심 사상 또한 '입고 먹는 것이 다스림의 근원이다'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잘 다르려지는 시대는 이웃 나라끼리 바라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은 제각기 자신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나라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기 나라의 습속을 편히 여기고, 자신들의 일을 즐기며,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837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화식 열전> 중에서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신농씨 이전의 일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시경』과 『서경』에서 말하는 우나 하나라 이래의 것을 보면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따위의 좋은 맛을 다 보려 하며,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권세와 유능하다는 영예를 자랑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풍속은 백성의 마음속까지 파고든 지 이미 오래여서 미묘한 이론을 가지고 집집마다 깨우치려 해도 도저히 교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고, 가장 정치를 못하는 것은 백성과 다투는 것이다."(837∼838쪽)

 

 - 사마천, 『사기 열전_2』, <화식 열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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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축국서(諫逐國書)
    from Value Investing 2019-08-25 16:58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빗대어 '간축국서'라는 제목을 달아봤다.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법무장관 후보자인 조국 전 수석을 이제는 과감하게 물리치고 보다 널리 새로운 인재를 구하라는 철없이 순진한(?) 바램으로 써 본 글이다.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중국 진시황 시대에 활약했던 승상 이사가 쓴 명문장이다. 왕에게 올리는 건의를 담은 서간문 형식의 상서上書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역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