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현명하지 않은데 어찌 복이 있겠는가!
분서갱유와 지록위마
천하의 근심은 토붕에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빗대어 '간축국서'라는 제목을 달아봤다.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법무장관 후보자인 조국 전 수석을 이제는 과감하게 물리치고 보다 널리 새로운 인재를 구하라는 철없이 순진한(?) 바램으로 써 본 글이다.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중국 진시황 시대에 활약했던 승상 이사가 쓴 명문장이다. 왕에게 올리는 건의를 담은 서간문 형식의 상서上書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역사는 『사기 본기』에 나오는 「진시황 본기」와 『사기 열전』에 나오는 「이사 열전」을 꼽을 만하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스타(!) 황제였던 진시황 시대의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상세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 말고도 '진시황 시대'를 빛낸 인물은 여럿 있지만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를 빼놓을 수 없다. 저 유명한 <분서갱유>와 <지록위마>의 고사가 이들 두 사람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사는 무명 시절 한비자와 함께 순자荀子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진시황을 도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나중에 진시황이 순행 도중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환관 조고'의 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어리석은 막내아들 호해(2세 황제)에게 황제 자리가 넘어가는 음모에 가담함으로써 진나라가 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2세 황제의 짧은 치세 동안에 환관 조고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끝내 자신의 집안사람들까지 몰살당하는 멸문지화를 입고 말았다.

 

이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동안에 '네 차례' 탄식한 일로도 유명하다. 처음엔 변소에서 사는 쥐와 창고 속에서 사는 쥐의 다른 환경을 보고 탄식했고, 두 번째로는 승상이라는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 탄식했고, 세 번째로는 진시황이 남긴 조서를 고칠 때 탄식했고, 마지막에는 오형五刑을 받을 때 탄식했다.

 

이 가운데 그가 맨 처음으로 탄식했을 때의 일은 지금 들어봐도 귀가 쫑긋해 진다. 여러모로 오늘날 우리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 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661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이런 고사를 읽고 나서도 새로운 법무장관 후보자가 언급했다는 그 유명한 '붕어, 개구리, 가재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큰 집에서 살며 돈과 지위와 권세를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온갖 치졸하고 부끄러운 짓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버젓이 저지르는 행태를 떠올리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쥐 얘기는 이쯤 하자. 때려잡고 싶은 쥐들이 설쳐댄 게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사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마침내 진나라로 떠났다. 이때 그가 스승에게 남긴 작별 인사는 이러했다.

 

"저는 때를 얻으면 꾸물대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만승의 제후들이 바야흐로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는 때여서 유세가들이 정치를 도맡고 있습니다. 또 진나라 왕은 천하를 집어삼키고 제帝라고 일컬으며 다스리려 합니다. 이는 지위나 관직이 없는 선비가 능력을 펼칠 때이며 유세가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 하여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낮은 자리와 곤궁한 처지로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의탁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닐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쪽 진나라 왕에게 유세하려고 합니다."(661∼662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그가 순자에게 고한 이런 '출사표'야말로 현실 정치 참여를 오래 전부터 열망하고 역설했던 조국 전 수석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듯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서울대 교수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민정수석에서 법무장관으로 또다시 자리를 옮기려는 행태를 두고 세간에서 폴리페서라는 비판이 일자, 자신은 '앙가주망'일 뿐이라고 역설했지만 그게 어느새 '조가주망'으로 조롱받는 형국이니, 그가 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비판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게 생겼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니 말이다.

 

이사가 진나라를 찾아가 승상 여불위를 만난 뒤 그는 진나라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장사長史라는 벼슬을 얻었다. 그가 떠맡은 역할은 이랬다. '제후국의 명망 있는 사람들 중 뇌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에게는 많은 선물을 보내 결탁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다.'

 

때마침 이웃나라의 유세객이 찾아와서 진나라를 교란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그 일 때문에 진나라 왕족과 대신들은 외부에서 영입된(?) 빈객들을 모두 내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이사도 '축출 대상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 때 이사는 저 유명한 「간축객서()」를 써서 자신이 탄핵당할 위기를 도리어 승진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사의 문장은 흔히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비교될 만큼 명문으로 인정받는다. 그의 재능과 모략과 지혜를 음미해 볼 수 있으므로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소 길게 인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신이 듣건대 관리들이 빈객을 내쫓을 것을 논의하고 있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목공은 인재를 구하여 서쪽으로는 융에서 유여를 데려왔고, 동쪽으로는 완에서 백리해를 얻었으며, 송에서 건숙을 맞이하였고, 진나라에서 비표와 공손지를 오게 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목공은 이들을 중용하여 스무 나라를 병합하고 드디어 서융에서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

 

이러한 사실을 보면 빈객이 어찌 진나라를 저버린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이 네 군주가 일찍이 빈객을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선비를 멀리하여 등용하지 않았다면 진나라는 부유하고 이로운 실익이 없고 강대하다는 명성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곤륜산의 이름난 옥을 손에 넣고, 수씨氏의 진주와 화씨氏의 구슬을 가졌으며, 명월주를 차고 명검 태아阿를 지니고, 섬리離의 준마를 타며, 취봉鳳의 기를 세우고 영타의 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보물은 하나도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데 폐하께서 그것들을 좋아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는 것이라야 한다면 야광주로 조정을 꾸밀 수 없고, 코뿔소 뿔이나 상아로 만든 물건을 가지고 즐길 수 없을 것입니다. 정나라와 위衛나라의 미인은 후궁에 들어올 수 없고, 결제騠라는 준마가 바깥 마구간을 채울 수 없으며, 강남의 금과 주석은 쓸 수 없고, 서촉의 단청으로 채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후궁을 장식하고 희첩을 꾸며너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반드시 진나라에서 난 것이라야 된다면 완주의 비녀, 부기의 귀걸이, 아호縞의 옷, 금수의 장식도 폐하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세상의 풍속에 따라 우아하고 아름답게 차린 조나라의 여인은 폐하 곁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물동이를 치고 부缶를 두드리며 箏을 퉁기고 넓적다리를 치면서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참다운 진나라의 음악입니다. 정鄭, 衛, 상간間, 昭, 虞, 武, 象은 다른 나라의 음악입니다. 지금 물동이를 치며 부를 두들기는 것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며, 쟁을 퉁기는 것을 물리치고 소와 우의 음악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당장 마음을 즐겁게 하고 보기에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을 뽑아 쓰는 데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물의 사람됨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고 굽은지 곧은지를 말하지 않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물리치고 빈객이면 내쫓으려 합니다. 그런즉 여색이나 음악이나 주옥은 소중히 여기되 사람은 가벼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군림하며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이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인구가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도 용감하다."라고 합니다. 태산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으므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왕은 어떠한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는 사방의 구분이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의 차별이 없으며, 사계절이 조화되어 아름답고, 귀신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이 오제와 삼왕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는 백성을 버려 적국을 이롭게 하고 빈객을 물리쳐 제후를 도와 공적을 세우게 하고, 천하의 선비를 물러나 감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며 발을 묶어 진나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도적에게 군사를 빌려 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대체로 진나라에서 나지 않은 물건 가운데 보배로운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인재 가운데 충성스러운 인물이 많습니다. 지금 빈객을 내쫓아 적국을 이롭게 하고 나라 밖으로 제후들에게 원한을 사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기를 바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664∼667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진나라 왕은 이사의 계책을 받아들였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승상 이사는 지나치게 권력을 추종한 끝에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악랄한 언론 탄압 정책을 건의하고 실행하는데 앞장섰고, 2세 황제 때에는 환관 조고와 권력 다툼을 벌인 끝에 결국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승상 이사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이사를 엄하게 꾸짖는 까닭은 간단하다. 당대 최고로 뛰어난 두뇌와 게책으로 무장한 그가 백성들의 삶에는 아랑곳 없이 오로지 진시황 곁에서 온갖 권모술수로 권력과 출세만을 추구한 끝에 결국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고 나라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이사는 여염집에서 태어나 제후들에게 유세하다가 진나라로 들어가서 진나라 왕을 섬겼다. 열국 사이에 틈이 생긴 기회를 타서 시황제를 도와 마침내 진나라의 제업을 이루게 했다. 이사는 삼공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높은 자리에 등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는 육경의 근본 뜻을 잘 알면서도 공명정대하게 정치를 하여 군주의 결점을 메워 주려 힘쓰지 않고 높은 작위와 봉록을 누리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주에게 아첨하고 좇으며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기만 했다. 조칙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의견을 따라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제위에 오르게 했다. 제후들이 이미 뒤돌아선 뒤에야 비로소 군주에게 충고하려 했으니 때가 너무 늦었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오형을 받고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세속의 말과는 다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사의 공은 주공이나 소공과 어깨를 겨룰 만하였을 것이다."(698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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