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밑줄긋기)

 

고상하고도 미묘한 내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영예

 

내 작품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도대체 다른 책들을 더 이상은 견뎌낼 수 없게 된다. 철학 책이 가장 심하다. 고상하고도 미묘한 내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영예이고 ㅡ 그러려면 결코 독일인이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누구든지 다 얻었어야만 하는 영예인 것이다. 자기의 의지의 높이에 의해 나와 비슷하게 되는 자는 그러면서 배움의 진정한 황홀경을 체험한다 : 나는 어떤 새도 이르러보지 못했던 높은 데서 왔고, 어떤 발도 길을 잃어보지 못한 심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내 책 중 어느 하나를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고 ㅡ 내가 밤의 휴식마저 설치게 한다고 말했다 ······ 내 책보다 더 긍지에 차 있으면서 동시에 더 세련된 종류의 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이 책들은 여기저기서 지상에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것에, 냉소에 이른다 ; 내 책들은 가장 부드러운 손가락에 의해, 그리고 가장 용감한 주먹에 의해 정복되어야 한다. 영혼의 온갖 허약함은 관여하지 못하며, 온갖 소화불량증마저도 영원히 배제된다 : 사람들의 신경은 튼튼해야 하고, 문제 없는 아랫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영혼의 빈곤이나 영혼에 있는 엉터리 공기도 관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비겁이나 불결, 내장 속에 들어 있는 비밀스러운 복수욕은 더더욱 관여하지 못한다 : 내 말 한마디가 나쁜 본능을 죄다 쫓아낸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 책들에 대한 여러 반응들을, 아주 교훈적인 다양한 반응들을 나로 하여금 명백히 알게 하는 다양한 실험용 짐승 같은 면이 있다. (중략) 완벽하게 악습에 빠져 있는 '정신들', 철저하게 허위인 '아름다운 영혼들'은 내 책들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ㅡ 따라서 그들은 이 책들을 자기 밑에 있다고 얕잡아보며, 이런 일은 온갖 '아름다운 영혼들'의 그럴싸한 수미 일관함인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멍청이들은,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들은 죄다 독일인들인데, 내 의견에 항상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떤 경우에는 동의하기도 한다고 암시한다 ······ 《차라투스트라》에 대해서조차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전부가, 남자들이 주장하는 페미니즘도 내게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다 : 그것은 대담무쌍한 인식의 미궁 속으로 결코 진입할 수 없게 한다. 엄격하기만 한 진리들 속에서 기분 좋게 명랑함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습관들을 엄격하게 대해야만 한다. 완벽한 독자의 모습을 내 머릿속에 그려보면,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이 되고 만다. 게다가 그는 탄력 있으면서도 꾀가 많은 신중한 자이며, 타고난 모험가이자 발견자이기도 하다. 결국 : 내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만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것보다 더 표현을 잘할 수는 없다 : 차라투스트라가 누구에게만 자기의 수수께끼를 던지는가?

 

 

너희, 대담한 탐험가, 모험가들. 그리고 언젠가 영민함의 돛을 달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한 적이 있는 자들에게, ㅡ

 

너희, 수수께끼에 취해 있는 자들, 불투명함을 즐기는 자들, 피리 소리로도 온갖 미궁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그런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

 

 ㅡ 그것은 너희가 겁먹은 손으로 한 가닥 실을 찾아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너희는 추측할 수 있는 곳에서는 추론하려고 하지 않는다 ······

 

           

             * 역자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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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3-12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도, 첫 문장에 빵 터졌습니다. 죄송해요, 그런데 니체의 이런 모습, 자신에 찬 모습이 너무 놀라우면서도 신기합니다.

˝내 작품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도대체 다른 책들을 더 이상은 견뎌낼 수 없게 된다. 철학 책이 가장 심하다. 고상하고도 미묘한 내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영예이고..... ˝

저는 고병권님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만 읽어보았고, 위의 원전은 아직 도전 생각은 못 하고 있어요. 그 책에서도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라는 제목을 보고 혼자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oren 2016-03-12 18:02   좋아요 0 | URL
니체의 책들에 재미를 붙이면 `다른 책들`은 너무 시시껄렁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요. ㅎㅎ

그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쇼펜하우어 등등 무수한 `철학의 대가들`을 예리한 필봉으로 무참히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알파고의 바둑`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거든요. 마치 알파고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올린 바둑의 역사`를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뜨린 것처럼 말이지요. 플라톤의 이데아니, 칸트의 정언명령이니,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이니,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온갖 신성한 교리들조차 니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형국이었으니, 그가 토리노의 알베르토 광장에서 졸도하기 직전에 썼던 <이 사람을 보라>에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내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무조건적인 발언의 자유를 만끽해왔다`고 자신에 차서 말했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싶습니다.^^
 

 

 

(밑줄긋기)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ㅡ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여기에 적절한 만큼만 다루겠다 :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ㅡ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ㅡ 나 자신에 의해서도. ㅡ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삶에서 '악의'는 거의 입증되지 않는다 ; 문학적 '악의'에 대해서도 나는 그 어떤 경우도 말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순수한 바보는 너무도 많이 들어 있다 ······ 누군가가 내 책 한 권을 손에 든다는 것,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한 존경 표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ㅡ 그가 그런 표시를 하기 위해 신발조차 벗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ㅡ 장화는 말할 것도 없고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 * *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

 

그래서 더 나는 설명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ㅡ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가장 단적인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책이 자주 일어나거나 아니면 드물게라도 일어나는 경험의 가능성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치자 ㅡ 일련의 새로운 경험들에 대해 처음으로 말하고 있다고 치자 ㅡ 이런 경우에는 전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청각적 착각이 인다 ······ 이것이 결국 내 평균적인 경험이며, 원한다면 내 경험의 독창적인 면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에 대해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믿던 자가 했던 일은, 나에게서 자기의 상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ㅡ 나와는 반대되는 것을, 이를테면 '이상주의자'를 만들어내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 내게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자는 내가 도대체 고려할 만한 대상이라는 점을 부정해버렸다. ㅡ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인, '선한' 자,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ㅡ 도덕의 파괴자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아주 숙고할 만한 말이 된다. 그런데 거의 모든 곳에서 그 말의 가치가 차라투스트라의 형상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순진하게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반은 '성자'고 반은 '천재'인, 좀더 고급한 인간의 '이상적'인 유형으로서 말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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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선된 귀를 가진 자들에게 한마디

 

 ㅡ 가장 정선된 귀를 가진 자들에게 한마디 더 하겠다 : 내가 음악에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 나는 음악이 10월의 오후처럼 청명하고 깊이 있기를 바란다. 음악이 개성 있고 자유분방하며 부드럽기를, 비열과 기품을 모두 갖춘 달콤한 어린 여자이기를 바란다 ······ 음악이 무엇인지를 독일인이 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독일 음악가라고 불리는 자들, 특히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은 외국인들이다. 슬라브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이며 ㅡ 아니면 유대인이다 ; 그렇지 않으면 하인리히 쉬츠, 바흐, 헨델과 같은 이미 소멸되어버린 강한 종족의 피가 흐르는 독일인이다. 나 스스로도 언제나 쇼팽을 위해서라면 나머지 음악들은 다 포기할 정도인 폴란드인이다 :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바그너의 지크프리트-목가는 예외로 한다. 그리고 그 고귀한 오케스트라적 악센트가 모든 음악가보다 앞서는 리스트도 예외로 한다 ; 마지막으로 알프스 너머에서 성장한 모든 것도 ㅡ 말하자면 지금 내가 있는 이쪽에서 성장한 모든 것도 예외로 한다 ······ 나는 로시니 없이 지낼 수는 없다. 음악에서의 나의 남쪽, 즉 내 베네치아의 거장인 피에트로 가스티의 음악 없이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내가 알프스 너머라고 말할 때는, 나는 진정 베네치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표현할 다른 단어를 찾아보면, 나는 언제나 베네치아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눈물과 음악을 구별할 수 없다. 나는 행복과 남쪽을 공포의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7 

 

 * * *

 

누군가가 그어주어야만 하는 성냥개비였던 것

 

또 다른 현명함과 자기 방어는 가능한 한 드물게 반응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의 '자유'를, 자기의 주도권을 말하자면 떼어내어 한갓 시약으로 만들어버리게 하는 상태와 조건들을 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로 서적을 대하는 법을 들어보겠다. 근본적으로 서적을 그냥 '뒤적거리는' 학자는 ㅡ 하루에 대략 200권 정도가 적당하다고 하는 문헌학자 ㅡ 결국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만다. 책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그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할 때는, 특정 자극에(ㅡ읽은 생각들에) 응답하는 것이다 ㅡ 결국 그는 반응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학자는 자기의 전 힘을 기존의 사고들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데에 다 쏟아붓는다 ㅡ 스스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 자기 방어 본능이 그에게서는 약할 대로 약해져버리고 만다 ; 그렇지 않다면 그는 책들에 저항할 것이다. 학자 ㅡ 일종의 데카당. ㅡ 나는 내 눈으로 보았다 : 천부적 소질을 지니고 있고, 풍부하며 자유롭게 태어난 본성의 소유자들이 30대에 이미 '망쳐질 정도로 독서'했던 것을.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서 ㅡ '생각'을 주기 위해서 ㅡ 누군가가 그어주어야만 하는 성냥개비였던 것을. ㅡ 아침 일찍 날이 밝을 때, 모든 것이 신선할 때, 자기 자신의 힘이 아침놀을 맞을 때, 한 권을 읽는다는 것 ㅡ 이것을 나는 못된 습관이라고 부른다! ㅡ ㅡ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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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하이네, 바이런, 슈만, 셰익스피어, 베이컨

 

서정시인에 대한 가장 최고의 개념을 내게 준 사람은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그 같은 감미롭고도 열정적인 음악을 찾아 나는 모든 세기의 전 영역을 다 뒤져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신적인 악의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 없이는 나는 완전성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ㅡ 나는 인간과 종족의 가치를 평가할 때 그들이 신과 사티로스의 분리 불가능함을 얼마나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지에 의거해서 평가한다. ㅡ 그리고 이네는 독일어를 어떻게 구사하는지! 단연 하이네와 내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최초의 예술가들이었다고 언젠가는 불릴 것이다 ㅡ 우리는 범속한 독일인들이 독일어를 가지고 해왔던 모든 것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바이런의 <만프레드>에 나오는 만프레드와 나는 틀림없이 아주 유사하다 : 그의 모든 심연을 나는 내 안에서 발견했었고 ㅡ 열세 살에 이미 이 <만프레드>를 이해할 만큼 성숙해 있었다. 만프레드가 있는 자리에서 감히 파우스트 운운하는 자들에게 나는 해줄 말이 한마디도 없다. 힐끗 쳐다볼 뿐이다. 독일인들은 위대함이라는 개념에는 무능력하다 : 그 증거가 슈만이다. 나는 언젠가 이 감상적인 작센인에게 분노가 생겨 그의 <만프레드 서곡>에 대한 반대 서곡을 작곡한 바 있다. 이 서곡에 대해 한스 폰 뵐로는 오선지에 그런 곡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고 : 음악의 뮤즈 에우테르페에 대한 강탈이라고 말했다. ㅡ 내가 셰익스피어를 최고로 표현해줄 만한 정식을 찾을 때면, 언제나 나는 '그는 카이사르 유형을 구상해냈었다'라는 정식만을 발견한다. . 그런 유형은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ㅡ 그런 유형이거나 아니면 그런 유형이 아니거나 할 뿐이지. 위대한 시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실재성만을 퍼내어 이용한다 ㅡ 그가 나중에 자기의 작품을 더 이상은 견뎌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도록 말이다 ······ 내가 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눈길을 던질라치면, 나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발작적인 흐느낌을 이겨내지 못한 채 방 안을 이러저리 30분가량은 서성이게 된다. ㅡ 나는 셰익스피어보다 더 가슴을 찢는 비통한 작가를 알지 못한다 : 어릿광대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만 했단 말인가! ㅡ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 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깊이가 있어야만 하고, 심연이어야만 하며, 철학자여야만 한다 ······ 우리 모두는 진실을 두려워한다 ······ 그리고 고백하거니와 : 나는 베이컨 경이 이 가장 무서운 문학의 창시자며 자기 학대를 하는 자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 미국의 혼란한 정신을 가진 자들과 멍청이들이 떠들어대는 불쌍한 수다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가장 강력한 사실을 보려는 힘은 행동으로, 무시무시한 행동으로, 범죄로 향하는 가장 강력한 힘과 양립될 수 있을 뿐 아니라 ㅡ 전자는 후자 자체를 전제한다 ······ 우리는 오랫동안 베이컨 경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실재론자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모든 위대한 의미에서 최초의 실재론자인 그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 그가 무엇을 체험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 그리고 빌어먹을, 내 친애하는 비평가들아! 내가 내 《차라투스트라》를 낯선 이름으로, 예를 들면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더라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저자가 차라투스트라라는 환상가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2천 년이 흘러도 비평가의 식별력으로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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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종류를 다독하는 것은 내 독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영양 섭취의 선택 ; 풍토와 장소의 선택 ; ㅡ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결코 실책을 범해서는 안 되는 세 번째 선택은 자기 자신의 휴양을 취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도 특정한 정신이 얼마나 독특한지에 따라, 그에게 허락되는 것, 즉 그에게 유용한 것의 범위는 좁고도 좁다. 내 경우에 독서 전반은 휴양의 일종이다 : 따라서 독서라는 것은 나를 내게서 떠나게 하고, 나를 낯선 학문과 영혼들 안으로 산책하게 하는 것의 일종이지만 ㅡ 나는 더 이상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독서는 나로 하여금 나의 진지함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게 한다. 열심히 일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나는 어떤 책도 곁에 두지 않는다 : 누군가를 내 곁에서 말하게 한다든가 생각하게 한다든가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리고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라고 불릴 만한 것이리라 ······ 잉태 시에 정신과 모든 기관은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데, 여기에 우연과 온갖 종류의 외적인 자극이 격렬하게 영향을 미치고, 아주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것을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우연이나 외적인 자극은 가능한 한 많이 없애버려야만 한다 ; 즉 일종의 자기의 성을 쌓는 일은 정신적인 잉태에서 본능이 취하는 첫째가는 현명한 일이다. 어떤 낯선 생각이 은밀하게 그 성벽을 올라타는 것을 내가 허락할 성싶은가? ㅡ 그리고 이런 것이야말로 독서라고 불릴 만한 것이리라 ······ 일하고 산출해내는 시간이 지나면 휴양의 시간이 그 뒤를 따른다 : 내게 오라, 너희 편안하고 영민하며 수줍어하는 책들이여! ㅡ 이런 책들이 과연 독일 책일 것인가? ······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반년 전의 일이다. 무슨 책이었던가? ㅡ 그것은 빅토르 브로차드V.Brochard의 《그리스 회의론자들》이라는 탁월한 연구서였는데, 내 라에티아나 논문들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이중적이고 심지어는 오중적이기도 한 철학자 대중들 사이에서 회의주의자는 유일하게 존경할 만한 유형인 것이다! ······ 이런 책 외에는 나는 거의 항상 몇 권 안 되는 똑같은 책들로 도피하는데, 이 책들은 내게 합당하다고 입증된 것들이다. 잡다한 종류를 다독하는 것은 내 독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열람실은 나를 병들게 한다. 새 책들에 대한 신중함과 심지어는 적개심도 '관용'이나 '아량'이나 여타의 '이웃 사랑'보다는 내 본능에 더 적합하다. ······ 실제로 내가 항상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은 몇 안 되는 옛 프랑스인들이다 : 나는 오로지 프랑스적 교양만을 믿고 다른 유럽적 '교양'은 전부 오해라고 간주한다. 물론 독일적 교양은 말할 것도 없다 ······ 내가 독일에서 발견했던 몇 경우의 고급한 교양은 모두 프랑스적 연원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는 취향의 문제에 관한 한, 내가 들어본 중에서 단연 최고의 소리였다 ······ 파스칼의 책을 읽지는 않지만, 그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스도교가 처음에는 육체적으로, 다음에는 심리적으로 서서히 죽여간 그리스도교의 가장 교훈적인 희생물로서의 그를, 가장 전율스러운 형태의 비인간적인 잔인함의 논리 전체가 죽여간 그를 사랑한다는 것 ; 내가 몽테뉴의 변덕을 내 정신에 갖고 있다는 것, 또는 누가 알랴만은 내 육체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 내 예술가적 취향은 셰익스피어와 같은 황량한 천재에 대해 통분하면서 몰리에르나 코르네유, 라신 등의 이름을 옹호한다는 것 : 그렇다고 최근의 프랑스인들이 나에게는 매력적인 교제 상대가 아니라고 결국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어느 세기에서 현재의 파리처럼 그렇게도 호기심 넘치는 동시에 섬세하기도 한 심리학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을 것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 시험 삼아 그 이름을 열거해보면 ㅡ 그 수가 결코 적지 않기에 ㅡ 폴 부르제, 비에르 로티, 지프, 메일락, 아나톨 프랑스, 쥐르 르메트르 등이다. 또한 강한 종족 중 한 사람이자 진정한 라틴인이며 내가 각별히 호감을 갖고 있는 기 드 모파상을 들 수 있다. 우리끼리 말하자면, 나는 세대를 심지어는 독일 철학이 몽땅 망쳐버렸던 그들의 위대한 스승들보다 선호한다 : 예를 들자면 친애하는 텐은 헤겔이 망쳐버렸다. 텐은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시기를 오해했는데, 이 오해는 헤겔 탓이다. 독일이 닿으면 문화가 부패한다. 전쟁이 비로소 프랑스에서 정신을 '구제'해냈다 ······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연에 속하는 스탕달은 ㅡ 그를 우연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내 삶에서 신기원을 이루는 모든 것은 우연이 내게 몰아댄 것이지, 결코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ㅡ 앞을 내다보는 심리학자의 눈과, 가장 위대한 사실적인 인물이 곁에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사실에 대한 파악력을 지닌 진정 귀중한 존재다. (손톱을 보고 나폴레옹을 알아차린다) ; 마지막으로 그가 프랑스에서는 드물고 거의 발견되지 않는 유형인 정직한 무신론자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ㅡ 프로스페르 메리메를 기리면서 ······ 아마도 나 자신 스탕달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바로 내가 할 수 있었을 그 최고의 무신론자 위트를 내게서 빼앗아가버렸다 : "신의 유일한 사과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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