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후세의 서양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라틴문학의 걸작으로 흔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꼽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엔 베르길리우스가 쓴 '로마 건국 신화'가 아무리 장중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로마의 위대함'을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천 년 이상이나 오랜 세월 동안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지냈던' 수많은 유럽 사람들의 자의식 형성에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 속에 담긴 드넓은 주제와 기가 막힌 이야기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는 너무나 로마 중심적인 데다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 탓에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조차 여전히 접근하기가 만만찮은 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는 그 주제의 범속성이나
세계성 측면에서 베르길리우스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치 폭넓고도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또한 후세의 서양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조각 등 온갖 예술작품에 두루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리고 로마의 밖에서만 살아온 수많은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조차도 그리 낯설지 않거나 심지어 친숙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에서도 저는 두 천재 시인 가운데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보다 좀 더 쉽게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온갖 책들도 결국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담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까지 고려해 본다면, 그런 이야기들의 원조격이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한번쯤 제대로 살펴보는 일은 '신화의 원형'을 직접 고스란히 마주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좀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지 싶습니다. 더군다나
서양에서조차 오비디우스가 쓴 신화가 고대 로마의 '서사시' 형식으로 쓰여진 탓에 읽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던 때문인지 미국 사람 토마스 불핀치가 산문으로 풀어 쓴 신화집이 오비디우스의 작품보다 훨씬 더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오비디우스의 원전에 다가가는 일이 더욱 흥분되는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조나 다름없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왜 그토록 재미있고도 유명한 책이면서도 여전히 읽기 어려운 묘한 책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저는 무엇보다도 우선 '신화'가 지닌 본질적인 성격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신들은 너무나 여러 '계보'가 있어서 그들의 족보와 촌수를 따지는 일이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닌데다가, 거기에 덧붙여 온갖 다양하고 낯선 이름들을 지닌 인간들조차 쉼없이 끼어드니 신화는 일단 너무나 복잡하다는 느낌부터 들게 됩니다. 게다가 신화에는 결코 신과 인간만 등장하는 법이 없지요. 수많은 강과 바다에 사는 온갖 요정들도 신과 인간들 사이에 쉼없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다양한 이름들을 지닌 여러 지방과 섬과 도시, 산과 강, 호수와 바다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니 도무지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그러니 신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갈피도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더군다나 온갖 함축적인 표현들로 가득찬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화'를 읽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게 되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두 번째 어려움은 대체로 '이야기의 방대함'에 있지 싶습니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시로 함축시켜' 펼쳐 놓은 이야기의 전체 행수가 무려 1만 2천 행에 이르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9천 9백 행에 못 미치는 걸 고려해 보면 그 길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1만 5천 행, 『오뒷세이아』가 1만 2천 행 정도여서 그와 비슷한 길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 표현이 훨씬 더 함축적이기 때문에 오비디우스의 작품이 길이가 훨씬 더 긴 작품으로 느껴진다고들 하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읽게 되면서 겪게 되는 세 번째 어려움이자 쉽게 극복하기 힘든 커다란 난제는 또 있습니다. 그건 대체로 '사전 지식의 부족' 때문이지요. 호메로스의 작품이 되었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 되었건, 혹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 되었건 그 작품들은 거의 모두 기본적으로는 시로 쓰여진 작품들이며, 아무리 이야기 형태의 시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함축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런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런 경향이 유난히 더 강합니다. 가령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다룬 짧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 유명한 '12 고역'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어리둥절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요. 그 대목을 여기서 조금만 살펴 보고 넘어가지요.  

 

"이러자고 내가 잔혹한 안타이우스에게서 어머니의 힘을 빼앗았던가요?"라는 짧은 구절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안타이우스가 땅의 자식으로서 땅에 닿을 때마다 힘을 얻기 때문에 헤라클레스가 그를 공중에 들어 올린 후 목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석'을 살펴보고나서야 겨우 그 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사실을 알고난 뒤라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아서 알 듯 모를 듯한 아리송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지요. 그런데 '이러자고'라는 표현이 그저 한 두번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마치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이 줄기차게 계속 이어져 나온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결국 '이러자고 내가 이 책을 펼쳤단 말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갑자기 그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요.


사실 헤라클레스의 '12 고역'만 하더라도 이야기 하나 하나가 온갖 흥미로운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지요. 가령 불을 내뿜는 용이 지키고 있는 '황금 사과'를 따오기 위해 지축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를 찾아가고, 거기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대신해서 그 무거운 짐을 떠메고 있다가 나중에 결국 황금사과를 손에 넣게 되자 이 영웅이 교묘한 꾀를 내어 그 무거운 짐을 도로 아틀라스에게 되돌려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는가요. 도저히 이뤄낼 수 없을 듯한 난제들을 척척 해내는 이 고대의 영웅을 보고 열광하지 않을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탓에 마치 고대판 '미션 임파서블'을 보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누구나 만끽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조차 헤라클레스의 영웅담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33편의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무려 세 편이 그의 신화를 다룬 작품이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또한 이 영웅의 이야기만 따로 떼어내어 온전히 한 권의 책으로 펴냈을 정도이지요. 최근에는 '현대판 헤라클레스'로 종종 여겨지는 축구 영웅 호날두의 연인 이리나 샤크가 영화『허큘리스』에서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일이 화제가 된 적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영웅'처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지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고대 로마의 시인이 '헤라클레스의 입'을 통해 '이러자고 내가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하고 열두 번씩이나 거푸 탄식을 연발하는 식으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그 이야기가 온전히 '귀에 들리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반쯤만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지요.

 

이러한 여러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도 오비디우스가 집대성해 놓은 수많은 신화들 자체가 지닌 이야기의 매력과 더불어 시인이 풀어가는 기가 막힌 이야기 솜씨 덕분일 테지요. 그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널리 알려진, 그래서 나름대로 꽤나 식상한 이야기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문체로 그 이야기들을 정말 기가 막히도록 재미있게 술술 풀어내지요.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그의 표현이 평이하고 유려하고 우아하면서도 재치와 유머와 파토스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오비디우스가 널리 읽힌다고 말했는데, 역자의 평가만 들어봐도 그의 문체가 얼마나 다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금세 알 수 있지요.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여전히 매혹적인 또다른 이유는 좀 더 근본적입니다. 그가 쓴 신화를 읽으면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인간 본성을 탐구할 수 있는 상징체계'를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지요. 아무리 위엄있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오비디우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 속물들과 크게 달리 비치지 않지요. 신들도 인간처럼 질투하고 시기하고 남의 아내를 넘보고 자신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분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쉽게 걸려 넘어지며 어떨 땐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어서 얼른 그들에게 달려가 덥석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을 때조차 있지요.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 우리는 신화 속의 영웅들이 우리와는 다른 머나먼 세계에 존재하는 별종들이 아니라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오비디우스의 생애는 특기할 만한 대목이 몇 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태어났는데, 그가 차츰 성장하여 로마에서 시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마침 로마의 정치 체제가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으로 넘어간 때였습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이후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끝에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개막된 소위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지요.  

 

그는 초창기엔 주로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의 노래』, 신화와 전설 속의 유명 여성들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여걸들의 서한집』, 연애 기술을 다룬『사랑의 기술』, 실연한 자들을 위한 『사랑의 치료약』등을 썼는데, 여기서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그 뒤에 그는 『로마의 축제일들』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인『변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선배 시인들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마저 세상을 떠나고 오비디우스가 로마의 문학계를 대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흑해 서안의 토미스(오늘날의 루마니아)로 유배되고 맙니다. 거기서 그는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가 유배된 지 10년 만인 기원후 17년 또는 18년에 눈을 감고 마는데, 그가 얼마나 간절히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는 유배지에서 쓴『비탄의 노래』와『흑해로부터의 편지』에 잘 담겨져 있다고 하지요.

 

그가 유배된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두 가지 죄('詩'와 '과오')를 지었다고 합니다. 정작 본인은 '이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까지 말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말한 시(詩)가 『사랑의 기술』일 것으로 보는 데 대해 의견 일치를 보인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작품은 그가 추방되기 무려 8년 전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유배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추방된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과오' 때문으로 보이는데, 오비디우스는 자신의 처지를 '악타이온'에 비교했다고 하지요. 쉽게 말해서 '못 볼 것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오비디우스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비록 오비디우스는 끝내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끝까지 살아남아 영생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지요. 그의 예언은 이랬습니다.

 

이 작품은 윱피테르의 노여움도, 불도, 칼도, 게걸스런 노년의 이빨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변신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약 250편이며, 크게 신들에 관한 이야기(1권 452∼6권 420행),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6권 421∼11권 193행),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11권 194∼15권 744행)로 나뉘어 있지요. 그런데 신화의 경우에는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기 몹시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제의 유사성이나 상이성, 지리나 계보 등을 따라 절묘하게 이야기들을 연결시켜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어쩌면 거의 대부분 따로 떼어놓아도 좋을 이야기들이지만 시인의 솜씨 덕분에 느슨하게나마 주욱 이어진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는 것이지요.

 

신들의 이야기든 영웅들의 이야기든 서로 아무런 관계조차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오비디우스가 이 작품에서 한데 두루 붙들어 놓을 수 있도록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변신'입니다. 그렇지만 '변신'은 이 작품의 주제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끌어모으는 데 필요한 하나의 '구실'이나 '핑계거리'에 더 가까운 인상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이 반드시 '변신'을 포함하지는 않는 데다가, '변신'이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변신'은 그저 인간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 자연히 딸려나오는 또다른 상상으로의 자연스런 변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지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건 '여자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섬세한 심리 묘사'인데,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부분은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노래한 대목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을 온전히 제대로 감상하려면 '당연히' 오비디우스가 여기 저기서 끌어온 이야기들을 독자들이 미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에 대해 옮긴이의 설명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만큼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좋을까요. 제 판단으로는 적어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의 비극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정도는 미리 읽고 난 뒤에 이 시를 읽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가령 이 책에 실린 대표적인 명문장 가운데 하나인 '아킬레스의 무구를 두고 벌이는 아이약스와 울릭세스의 설전'만 하더라도, 이 두 영웅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얼마만큼 드높은 무공을 쌓았으며(『일리아스 』), 아킬레스만 빼고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장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약스(아이아스)가 '무구 재판'에서 울릭세스(오뒷세우스)에게 패했을 때 그가 왜 기어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소포클레스의 비극『아이아스』), 또한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뒤 오뒷세우스가 귀향하던 중에 고난을 겪는 와중에 잠시 저승으로 내려갔을 때, 그의 눈에 띄었던 '아이아스의 혼령'이 오뒷세우스에게 '끝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돌아서고 말았던 장면까지 떠올릴 수 있다면(『오뒷세이아』),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두 영웅 사이의 설전이 훨씬 더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오비디우스는 이 책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변주'해서 들려줍니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연애시'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던 시인이 자신의 특출난 재능을 '사랑 이야기'에 아낌없이 쏟아낸 덕분에 시인의 노래는 '어떤 사랑'에서나 거침이 없으며, 몽테뉴가 말했던 것처럼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은 조금도 찾을 수 없지요. 

 

오비디우스가 노래한 사랑 이야기 가운데 특히 매혹적으로 다가온 이야기들만 해도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쾌감'에 대한 남녀간의 차이를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현명하게' 밝힌 사랑의 쾌감을 이야기한 티레시아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르킷수스와 에코 이야기,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가 된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 낙랑공주 이야기를 닮은 이아손과 메데아 이야기, 해서는 안 될 사랑, 오라비를 사랑한 뷔블리스 이야기,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라고'라는 노래로 더욱 유명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 자신의 조각 작품을 사랑한 퓌그말리온의 기도, 애닯고도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인 물총새로 변한 케윅스와 알퀴오네 등이 제게는 하나같이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그 이야기들에 얽힌 명화들을 찾느라 한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으니까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보물 창고'와 다름없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숱한 회화와 조각 작품들은 물론 수많은 음악 작품에도 그 소재를 제공했으니까요. 오페라의 효시로 인정받는 1607년에 초연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캉캉 춤'으로 유명한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 등이 모두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이야기에서 비롯된 작품이지요. 아예 <변신 이야기>를 교향곡의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들도 여럿인데, 벤자민 브리튼의 <변신 이야기>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1739∼1799)의 <변신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 작품과 관련해서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릴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고전에 관해 남긴 말들입니다. 그는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에서 고전을 재미있는 표현들로 새롭게 정의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지요.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칼비노의 '고전의 정의'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얼마나 그의 주장과 찰떡 궁합을 이루는지 놀라게 됩니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10. 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런 설명들은 한결같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도 너무나 잘 들어맞지요. 칼비노가 '고전'에 관해 언급한 다음의 문장들을 읽으면 현대의 독자들이 왜 하필 2000년 전쯤에 쓰여진 까마득한 고대의 신화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쯤 되면 근본적인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즉 고전을 읽은 체험을, 고전이 아닌 책을 읽은 경험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동시대를 잘 이해하게 해 주는 다른 책들을 제쳐 두고 왜 굳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는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시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상적인 상황은 한 고전 작품에서 잘 구성된 음악처럼 울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현재에 관한 모든 것들은 창밖의 자동차 소음, 날씨의 변화와 같은 저 바깥의 잡음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행동하기 일쑤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전의 실체를 먼 메아리처럼 듣는다. 지금 발생하는 일들과 관련한 소식들은 쩌렁쩌렁 울리는 텔레비전 소리처럼 듣고, 고전은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머나먼 메아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칼비노의 얘기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되지요. '고전이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이와 같은 결론은『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얘기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당신은 그 책 속에서 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단지 전보다 더 많이 당신 자신을 발견한다."

 

미국의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나는 3천 년은 더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같은 작품이 바로 이런 표현에 딱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머슨의 절친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 남겨놓은 문장 속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거듭 발견되지요.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

요즘 저렴한 가격에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고 번역된 책도 많지만, 고대의 영웅을 그린 작가들은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들의 작품을 인쇄한 문자는 희한하고 이상해 보인다. 그래도 고대 언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암시와 자극이 될 만한 몇 마디를 배워 길거리의 천박함을 딛고 일어선다면, 젊은 날과 소중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결국에는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모험을 즐기는 학생이라면 어떤 언어로 얼마나 오래전에 쓰인 것인지 상관하지 않고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고전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결코 썩지 않는 유일한 신탁이어서, 지금 이 시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담겨 있다. 델포이와 도도나도 그 시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이것으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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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kIU5cCNfq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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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2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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